문득 생각해 보니 한국어에는 상대를 부르는 대명사가 사실상 없다. 영어의 "You"에 해당하는 단어는 "너"이지만 이 단어는 상대방이 나와의 사회적 관계에서 동등하거나 또는 열세에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고 상대방 자체를 호칭할 수 있는 인칭 대명사가 한국어에는 없다.
나와 사회적 관계가 없는 이를 부를 호칭이 없으니 낯선 이와 이야기를 나누기가 참으로 어색해 진다. 반드시 상대를 지칭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저기요~" 같은 애매한 단어를 사용한다. 나와 상대방과의 사회적 관계가 명확해지면 그 사회적 관계를 호칭으로 사용한다. 대부분은 상대가 가진 직책을 호칭으로 삼는다.
직책이 호칭의 역할을 하게 되니 사람들은 직책을 잃는 것에 대해 거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명함에 박혀 있는 내 직책은 직책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불러 주는 호칭이 된다. 즉, 나라는 존재와 나의 사회적 지위는 서로 분리되기가 어렵다. 서구의 Last Name이 대부분 직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서구 사회 역시 사람과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분리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해 준다. 서구는 근대에 와서야 그 관계를 끊어냈고 그 덕에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Taylor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영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지만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다.
우리말은 주어와 목적어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생략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것 역시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한 호칭을 쓰는 특징에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을 지칭할 때 잘못 했다가는 상대를 기분 상하게 할 수 있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호칭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아예 최대한 이를 안 쓰는 방향으로 언어가 발달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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