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6년 8월 17일) 간만에 극장 나들이를 해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딧세이"를 봤다. 내가 아는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는 서구 문명에서 영웅 서사의 원류이며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원천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웅담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서구적 시선의 원론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딧세이에서 나타난 삶에 대한 태도는 서구의 창작물에서 계속 반복 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그러하며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도 서사시 오딧세이를 SF영화라는 형식으로 완전히 재 해석을 한 것이었다. 내 기억에 대 놓고 오딧세이를 한 편의 영화로 제작한 것은 놀란 감독의 오딧세이가 유일하다. 영웅 사서시의 원천인 오딧세이를 놀란은 어떻게 영화화 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 보고나니 갸우뚱해진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취해야 할 삶에 대한 태도를 영화에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신화적 요소를 모두 걷어 내고 현 시점에서 과학과 이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만 추려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거대 담론을 지극히 축소 시켜 마이크로 수준의 시선으로 끌어 내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를 정밀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뭔가 좁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이하 스포일러
이 글 쓰고 난 후 어쩌다 보니 설민석 유튜브( 《오디세이》이걸 알고 보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설민석의 영화 해설)를 봤는데 아예 대 놓고 스포일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 강사답게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데 신화에서 교훈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교과서적인 교훈을 찾으려는 태도는 신화를 읽는 깊이를 엄청나게 제한한다는것을 인지하고 보시라.
바다에서 건너온 자
우선 호머의 서사시에는 논하지 않았던 현재 눈 높이에서 본 오딧세이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흔히 고대 그리이스는 민주주의 정치 체계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도시국가 아테네가 익숙하지만 오딧세이 시대는 폴리스 아테네가 등장하기 500년 전의 시절이다. 이 때에는 민주주의 아테네가 없었고 문명 그 자체도 고대 아테네 문명이 아니라 "미케네" 문명인 시절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등장하는 인간 사회는 "미케네" 문명이다. 이 당시 중동 지방에는 히타이트 왕국이 있었고 북 아프리카에는 이집트가 있었다. 그런데 미케네 문명의 왕국들과 중동의 히타이트는 어느 날 갑자기 순삭 되었다. 지중해에 문명이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500년 뒤였다. 그렇게 기존의 문명들이 순삭되던 시점에 소아시아에 있던 트로이도 같이 순삭 되었다.
이집트도 이 때 위기에 빠졌었다. 이집트 상형 문제 기록들을 보면 이집트는 히타이트와 지속적인 전쟁을 벌였지만 히타이트가 망한 후 "바다에서 건너온 자"들과 국운을 건 전쟁에서 이겨서 이집트가 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히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에는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등장한다. 골리앗이 소속된 블레셋 사람들은 "바다에서 건너온 자"들로 추정된다고 한다.
난데 없이 나타난 "바다에서 건너온 자"들에 의해 기존 문명이 말살된 후 500년 간 문명 암흑기가 유지된 것은 그 동안 고대 시기를 연구하던 역사학계에서는 미스터리한 사건이었다. 최근의 역사 연구에 의하면 당시 청동기 문명은 청동기 제작에 필수적인 주석을 놓고 고도로 연결된 교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기후 변화로 먹고 사는 문제가 크게 위협 받으면서 교역망이 붕괴된 상태에서 바다를 건너 온 난민들에게 약탈을 당한 것이라 한다.
영화에서는 메넬라오스의 입을 빌려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공격한 진짜 이유는 교역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 교역 거점이라 하는 것도 "주석"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바다를 건너온 자"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디세우스 일행들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로마"는 트로이 잔존세력이 건설한 것이었지만 영화 말미에서 오디세우스가 서쪽 바다로 간 종착역은 아마도 "로마"였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최신 고고학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오딧세이를 풀어 나갔다. 명확하게 짚어 주지는 않지만 대사를 통해서 트로이를 멸망 시킨 후 지중해가 닿는 구석 구석을 휩쓸었던 오디세우스 같은 세력들이 "바다에서 건너온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트로이에서 아테네 신상의 목을 베어 파괴했다. 신을 죽이면서 그 연장선에 있었던 문명도 파괴한 것이다. 이 후 500년 간 문명 암흑기에 접어든 것이 당연하다.
마법은 등장하나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키르케나 세이렌 같은 요상한 마법을 부리는 존재들은 등장하지만 정작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혼자만 봤던 여인은 아테네 여신처럼 보이긴 했으나 영화에서 그 존재가 아테네 여신임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그 아테네 여신은 오딧세이의 망상이었고 그 망상의 근원은 트로이에서 참수된 아테네 신전의 여사제였다.
영화의 초입에서 나온 자막대로 영화에서는 마법의 시대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신의 시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칼립소도 여신이지만 영화에서는 칼립소를 여신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서시에서 키르케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하며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키르케와 1년을 동거하지만 영화에서는 키르케를 중세 유럽 설화에서 등장하는 마녀로 묘사해 놓았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동거하지 않을 만 하다.
애초에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할 당시 신탁을 통한 예언에서 오디세우스는 20년 후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 10년에 방랑기간 10년을 합쳐 20년이 들어 맞긴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신탁을 논하지 않는다.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신의 의지였지만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즉 오디세우스는 못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안 돌아 간 것이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하데스까지 찾아가 망자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도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곳이 그리스 신화의 지옥이라면 문지기인 케르베로스가 등장할 법도 하지만 문지기가 없는 것으로 봐서는 그 곳이 하데스인지 아닌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영험한 신빨을 보유한 테이레이시아스도 등장하지만 그도 역시 인간이었다. 영화에서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그냥 천둥번개와 거친 바다 폭풍으로만 등장한다.
폴리페모스의 저주가 포세이돈에게 접수되었던 것은 폴레페모스가 포세이돈의 아들이기 때문이었으나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안 나온다. 그저 외눈박이 식인 괴물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에게 기원을 했을 뿐이다. 기원을 하려면 저주 대상의 이름을 알아야 하며 서사시에는 오디세우스가 기고만장하여 자신의 이름을 폴리페모스에게 알리는 바람에 포세이돈이 폴리페모스의 민원을 접수할 수 있었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과정이 없다. 영화에서 포세이돈은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딧세이에서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당시 신을 믿었던 사람들의 입에서만 회자될 뿐이다. 신이 등장하지 않으니 신과 인간과의 관계도 당연히 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10년 동안 귀향하지 못하고 방황한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오디세우스 자신의 의지 때문이었다. 전쟁 후 정신적인 외상에 시달려 일부러 귀향하지 않은 것이다. 칼립소에서의 7년은 일종의 정신병원 입원 기간이었다.
오디세우스가 PTSD 라니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는 방랑 기간 10년 중에서 1년을 키르케와 보내고 7년을 칼립소와 보낸다. 10년 중 8년을 여신 같은 존재와 동거하면서 보낸 것이다. 마누라 페넬로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페넬로페는 천을 만들었다 다시 풀어 헤치면서 10년을 버텼는데 정작 신랑은 그 중 8년을 다른 여자와 팔자 좋게 보낸 것이다. 예전에 이걸 알게 되면서 옛날 고대 서사시니까 가능했지 지금 같았으면 호머는 욕을 엄청 먹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칼립소와의 7년을 다른 방식으로 읽은 듯 하다. 서사시 원전에서 칼립소의 섬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영화에서 나오는 칼립소의 영역은 100% 사막이다. 내 생각에 샤를리즈 테론은 칼립소 보다는 키르케가 더 어울리는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칼립소의 영역은 순백의 모래 사막이다. 이건 놀란 감독이 생각하는 칼립소를 영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서사시에는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에 푹 빠져서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도 귀향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이에 칼립소는 불로불사를 선물하며 오디세우스에게 매달리는 순정파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샤를리즈 테론의 칼립소는 매달리지 않으며 오디세우스와 친밀한 1차적 관계가 아닌 객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일종의 정신병동에서 망각을 통해 PTSD를 치료한 것이고 칼립소는 정신과 의사였다.
놀란은 현대의 눈높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와 보낸 7년의 세월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기에 병원 같은 새하얀 사막을 칼립소의 구역으로 설정해 놓았다. 서사시에는 불로불사의 유혹마저도 거부하고 인간의 길을 가는 오디세우스의 선택이 중요한 내용이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그저 PTSD를 치료하는 치유의 공간이 칼립소였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논하는 거대 담론을 쏙 빼고 현 시점에서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오딧세이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한 것이다. 기존 문명을 파괴했던 PTSD를 극복하고 고향으로 돌아 와서는 기존 문명을 대체할 신세계를 찾아 서쪽으로 낭만적인 여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 말하지는 않지만 이타카 섬에서 서쪽으로 간 신세계가 "로마"라는 건 뻔하다.
놀란 감독의 전작인 인셉션에서 느꼈던 공허감이 다시 느껴 진다. 거창한 신화적 이야기가 잔혹한 전쟁에 동원된 어느 인간의 PTSD 극복기로 쓰였다. 덩케르크 이후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후속으로 만든 느낌이다. 이럴거면 굳이 오딧세이를 원작으로 할 필요가 있었나? 감독님이 미케네 문명의 몰락 과정에 대한 최신 역사학계의 성과를 공부한 것을 칭찬해 드려야 하나? 뭔가 거창하기는 한데 서사시의 거대한 스케일을 Micro 수준으로 확 줄여버린 느낌이 든다.
PS : 크리스토퍼 놀란은 과학과 이성을 토대로 삼는 듯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적 허세를 부리는 경향이 있다. 다른 이들은 현대적 이야기에서 신화적 이야기를 재현하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정반대로 신화적 이야기를 가져와 현대적 이야기로 바꿔 놓았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다 보니 내 개인적으로는 갸우뚱 해 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 한번은 과학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PS : 영화를 보고 문헌으로 서사시 오딧세이를 읽어 본다면 엄청 지루하거나 엄청 재미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번역자의 역량에 따라 또는 독자의 역량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갈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친절한 책은 엄청 두꺼울 것이고 불친절한 책은 제법 얇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버젼이든 한번쯤 읽어 볼 고전임에는 분명하다.
PS : 어쩌면, 지금의 시대가 미케네 문명이 무너지며 문명의 암흑기로 접어드는 시대와 똑같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병사들이 아테네 신상의 목을 쳐서 기존의 Rule을 날려 버린 후 지중해의 섬들은 야만과 괴물들로 드글 댔고 이 후 각자도생의 시대가 벌어져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 나타났듯이 지금의 국제 정세도 기존의 Rule이 무력화 되면서 각자도생 직전의 음험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놀란은 본인도 모르게 지금 이 시대의 공기를 영화에 반영했고 관객들도 본인 모르게 그걸 읽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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