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od Maps 라는 사이트가 있다. ( Flood Map: Elevation Map, Sea Level Rise Map)

 

해수면에 변화가 있을 때 해안선이 어떻게 바뀌는지 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는데 해수면을 0으로 설정해도 해수면 보다 낮은 간척지는 물에 잠기는 것으로 나와서 실제 땅을 나타내는 지도와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략적인 해안선을 파악할 수는 있다. 이걸로 해수면을 변화 시켜 해안선의 변화를 보고 있으니 뒷통수를 얻어 맞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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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과 견휜이 나주를 두고 해전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주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나주 일대에는 광대한 평야가 있다. 전쟁을 했다면 벌판에서 대규모 회전을 했을 곳인데 해전이라니 당치도 않다. 영산강이 흐르고 있으니 영산강에서 싸운 걸 해전이라고 했으려니 짐작만 했었다. 아니면 나주가 아니라 목포 근처에서 싸운 걸 나주라고 했었나 보다 했었다.

 

 

그런데 해수면을 10m로 높여 보면 나주에서 해전을 했다는 것이 그럴싸하게 와 닿는다. 영산강과 바다의 접점에 나주가 위치한다. 현재의 목포와 비슷한 입지가 된다.  광주는 일제강점시 시절 철도가 지나가며 규모가 커진 곳이며 전통적으로 전남 지방의 중심지는 나주였다. 이렇게 보니 영산강의 서쪽 지역 전체가 신안군이 확장된 듯한 다도해 지형이 된다. 나주는 진짜 해양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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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쪽을 보면 김해는 벌판에 있다. 김해와 밀양시 사이에는 삼량진읍이 있는데 "~진"으로 끝나는 동네는 포구라는 뜻이다. 이 곳을 지날 때마다 강에 있는 작은 포구가 있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해수면을 10m로 높여 보면 "어라?"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인도 공주가 김해에 배타고 와서 시집올 만 했었고 삼량진이 포구 역할을 했을 법 하다. 양산시와 밀양시도 이렇게 보면 물길이 닿는 도시이다. 자료를 조금 더 찾아 보니 밀양의 어원 자체가 "물"이라는 뜻이고 밀양 앞에 바다가 있었다고 한다. 양산은 초기 삼국시대에 신라와 왜구 간 전쟁이 자주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니 당연히 그럴만 하다. 신라로 쳐들어 가려면 배타고 양산에서 내릴 수 밖에 없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왜구 입장에서는 배 타고 와서 김해 털어 먹기가 더 쉬운데 김해의 가야는 왜구들이 양산까지  배타고 올 때까지 봐 주고 있었으려나? 가야는 왜구를 봐 주는 정도가 아니고 왜구와 한통속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할 정도로 가야와 왜는 밀착해 있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가야-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었으며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킬 때 백제와 왜는 가야에 지원군을 보낼 정도였다.

 

원래 이웃나라끼리는 사이가 좋지 못한 법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가 낙동강 동쪽에 있는 신라를 적대시 할 법 하고 백제와 가야 사이에는 백제를 적대시하는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기에 백제와 가야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건 그럴 듯한 그림이 된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가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한의 소국들이 흡수 되었고 가야연맹 중에서 대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남원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백제와 이웃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야 연맹의 내부 사정은 복잡해졌던 모양이다. 결국  백제/신라 사이에서 친신라/친백제/중립으로 노선을 오락가락 하다가 일부 영역은 백제에게 먹히고 일부 영역은 신라에게 먹히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신라에게 완전히 멸망 당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김해 출신의 노무현이 호남의 김대중과 연합했던 건 우연은 아닌 듯 하다. 초원 복국집에서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TK와 PK는 결속을 다짐했지만 PK가 이탈하여 호남에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초기 삼국시대에 이미 있었던 일이었다.

 

호남 순천에서 새누리당의 이정현이 당선될 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그럴만도 하다. 영산강 유역의 서쪽과 섬진강 유역의 동쪽은 정서가 다르다.  경전선 철도를 타고 순천역을 지나가면 승객의 대부분은 경상도 말을 쓴다. 순천만에 놀러가서 사람들의 말투만 들어보면 경상도라고 착각할 정도다.  섬진강 유역은 고대 가야의 영역이었고 지금 현재에도 교통의 편의성이나 경제적인 상관 관계를 봐도 서부 경남과 연관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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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군산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신도시로 개발된 곳이다. 고대 역사에서 전북의 중심지는 익산이며 익산은 벌판 한 가운데 위치한다.

 

역시 해수면을 10m 올려보면 익산이 고대에 중요한 지역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짐작이 간다. 미륵사지가 뜬금없이 벌판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군산 지역은 바다에 잠겨 섬이 되는데 조금 찾아 보니 군산시내는 예전에 갯벌이었고 섬이 많았다고 한다. ( 그 옛날 군산은 '섬' 모습 이었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 이렇게 보면 논산도 물길이 닿는 도시가 된다. 논산이 지금은 충청도이지만 예전에는 전라도였다. 물길이 닿는 것을 보면 그럴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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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은 내륙 도시이지만 해수면을 10m 올려보면 천안 옆의 아산시는 항구가 된다. 

 

삼한 시절 목지국이 천안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 곳 역시 바다와 인접한 곳이었다. 당진시와 서산시도 이렇게 보면 해안 도시이다. 평택항과 평택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 보면 평택시 중심가가 해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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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벌판에 대동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

 

그러나 역시 10m를 올려보면 평양은 물길이 쉽게 닿는 복잡한 해안선에 위치한 지역이다. 고조선이 평양 인근을 수도로 삼은 것은 이런 지형이 영향이 미쳤을 듯 하다. 낙랑이 여기에 위치한 이유도 본국인 한나라와 뱃길이 통하기 때문인 듯 하다. 고조선이 연나라의 침략을 받기 전의 수도인 아사달 역시  물길이 닿는 곳이었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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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아니지만 해수면을 10m 올렸을 때의 영국의 런던이다.

 

 

이렇게 보니 로마의 클라디우스 황제가 식민정착지로 런던을 선택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굳이 바다에서 한참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곳에 왜 런던을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옛날의 탬스강은 지금과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지금의 런던은 클라디우스 황제 시절에는 탬스강과 바다가 접하는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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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해 봤지만 한반도의 해안선이 수천년 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한 연구는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해수면을 10m 정도 올려 보면 예전부터 사람들이 몰려 살았고 전통적으로 지역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도시들이 해안선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해수면 상승폭에 따라 해안선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상승폭을 10m가 아닌 5m 정도로 해 봐도 주요 지역에 물길이 닿는 것은 비슷하다.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수천년 동안 해수면이 낮아지고 있었다는 심증이 강하게 든다. 물론 해수면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퇴적으로 인해 지표면이 상승했을 가능성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역사시대 내에서도 한반도의 해안선은 지금 현재의 해안선과 꽤 달랐던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조선 때 해금정책으로 바닷길을 완전히 통제했기에 항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고대에는 뱃길이 통하는 항구가 지역과 나라의 중심이 되었던 듯 하다. 서해와 남해의 해안선은 복잡하며 그러다 보니 여러 곳의 항구가 있었으며 항구를 중심으로 하는 소국이 여러 개 난립해 있었던 모양이다. 해수면을 10m 올리면 서부경남의 진주도 거의 항구가 된다. 가야가 여러 소국으로 구성되었던 사정이나 가야와 일본 사이의 교류가 많았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렇게 놓고 보면 비류가 인천 근방의 미추홀을 택했던 건 그 당시 상식으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비류가 형이고 온조가 동생이기에 해안가의 좋은 터는 형이 차지하고 내륙의 나쁜 터는 동생이 차지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와는 다르게 비류가 성공했을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도 396년 미추성을 함락했다고 써 있는데 이게 미추홀인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비류 백제와 온조 백제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썰도 있기는 한데 주류는 아닌 모양이다.

 

해수면을 10m 정도 올리면 김포시와 부천은 거의 늪지로 변하지만 서울 한강의 모습은 거의 유지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한강은 자연적인 모습이 아니라 범람에 대비해 어느 정도 수위까지는 하천 폭을 인공적으로 고정시킨 강이다. 지금의 한강은 옛날의 한강과 물줄기가 다르다. 자연적인 강의 물줄기는 산처럼 고정적이지 않고 수시로 바뀐다.

 

최근까지도 서울 강서구 지역에는 바다에서 살고 있는 복어가 올라 왔었다. "강서복집" 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해수면이 높았던 고대의 한강이라면 풍납토성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에 그 곳에 성을 쌓았을 것이고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죽자고 덤비며 한강 유역에 대한 쟁탈을 벌였을 것이다.

 

비류의 미추홀과 온조의 위례성은 둘 다 항구로 기능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미추홀과 위례성은 모두 북쪽에서 내려온 부여계가 개척했으며 먼저 도착한 부여사람들이 당시 상식대로 해안가 미추홀에 자리를 잡고 나중에 도착한 부여사람들은 위례성에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물길이 같아서 결국 둘 중 하나만 살아 남을 수 있었을 텐데 하구에 위치한 미추홀이 위례성의 물길을 틀어 막을 수 있어 더 유리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위례성의 승리로 끝났는데 내 짐작에 미추홀은 일시 번성했더라도 장마철 범람 피해에 취약하여 규모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비류 백제의 흔적이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한강 홍수로 인해 유적이 될만한 것들이 다 떠내려 갔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위례 쪽까지 바닷물이 올라 왔다면 하구 미추홀의 식수 확보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장기전에서 위례성이 미추홀을 압도한 모양이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은유적인 설화로 내려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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