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예전에 만들어진 (1986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영화. 명성은 오래 전부터 들었으나 요즘 들어서 봤다. 분명 잘 만든 볼 만한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내가 접한 일본 영상들이 보통 그랬듯이 이것 역시 공허하다.

이하 스포일러 다수 포함된 내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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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어릴 때 봤던 "미래소년 코난"과 이야기 구조가 판박이라는 점. "미래소년 코난"(1978년)과 "천공의 라퓨타"(1986년)는 TV연재물과 영화라는 장르적인 형식의 차이만 있을 뿐 내가 볼 때는 같은 내용의 재탕이다. 이야기 구조/그림체/주인공 얼굴까지도 비슷하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미래소년 코난"이 더 재미있었다.

어린 시절 봤다면 분명 열광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진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니 마뜩찮은 점이 꽤 보인다. 호소력 있게 잘 만들었지만 예쁘게 포장된 그의 정치적 메세지는 꽤 불편하게 읽힌다.

결론은 "바루스!"를 외치는 것 뿐이었다.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길을 걸어가다 금덩이를 발견했는데 그냥 버리자는 것이다. 물론 금덩이를 들고 가면 분명 여러 문제들이 생길 것이다. 화목했던 가정이 깨질 수도 있고 금덩이를 노리고 괴한이 쳐들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금덩이를 버리고 갈 것인가?

우리가 쇄국을 하다가 시기를 놓쳐서 처참한 꼴을 당했던 역사를 기억한다면 그럴 수 없다. 내가 금덩이를 안 가져가면 결국 다른 놈이 가져가며 어쨌든 돌고 돌아 세상이 바뀐다. 그 세상에서 금덩이를 버렸던 이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가고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지경이 이르게 된다. 금덩이를 봤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들고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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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파즈가 시타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눈에 걸린다. 파즈에게 시타는 그야말로 빛을 뿜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였다. 그 장면에서 "천손강림"이란 단어가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진짜로 하늘에 거한 세상에서 내려온 황족이었다.

같은 천손이지만 시타와 완전히 정반대 입장을 취하는 캐릭터가 무스카이다. 성별도 여성과 남성으로 반대이지만 시타가 모계 전승으로 내려 온 구전을 통해 몸으로 체화한 주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에 반해 무스카는 텍스트를 통한 학습과 분석으로 힘을 발휘한다. 라퓨타의 비행석을 힘의 근원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남녀간 인터페이스 차이가 존재한 것이다.

시타는 청각에 의존하는 주술을 인터페이스로 사용하고 무스카는 시각에 의존하는 문자를 인터페이스로 사용한다. 음성으로 입력된 "바루스"라는 자폭명령에 무스카가 시각을 잃어버리며 시스템 장악력을 상실하는 것은 꽤 상징적이다. 서양 근대 문명이 오감 중 시각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포스트 모더니즘을 깔고 있다.

(자폭명령이 이렇게 간단할 수가...게다가 그렇게 중요한 명령에 대해 재차 확인하는 기능도 없고...그야말로 Safety가 허접의 극을 달린다...황손의 목소리 외에 일반인 파즈의 목소리가 섞였는데도 동작도 하고...Security 빵점인 시스템...이따위가 엄청난 과학기술의 산물이라니...700년이 지났어도 동작한다는 점에서 Reliability는 엄청 높은 듯...)

천손강림은 천황의 이미지와 닿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부러 의식한 것이든 그렇지 않았든 그가 일본인은 것은 분명하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 일본적 정서가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 자신의 막강한 힘을 부정하고 땅에 내려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일본의 천황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무스카는 높은 하늘에 거하며 강력한 천황 중앙집권제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시타는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모두 부정하고 낮은 땅에 거하는 평민처럼 살아가기를 원했다. 지방분권이 강했던 일본의 역사를 볼 때 정서상 어느 쪽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지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시타가 "바루스"를 외쳤듯 일본의 천황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책임을 천황에게 묻지 않는 것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를 살짝 볼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무정부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천황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할 것은 꿈에도 생각 안 해 봤을 듯 하다. 미야자키에게 천황은 정치적인 의견을 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면 공유하는 정서적 대상인 것 같다.

기세 좋게 기존의 근대적 세계관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 반발이 향하는 곳은 지극히 일본적인 과거 전통 가치로의 회귀에 불과하다. 전통 가치의 부활이라는 것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일본적 전통 가치의 시작은 천황으로부터 시작된다. 천황이라는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계급과 차별을 긍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일본은 천황을 죽이거나 아니면 모두가 천황이 되는 신성모독을 저지르지 않으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세계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설 수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천상 일본인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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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석은 사실 라퓨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땅 속에 있던 것이었다. 지하 갱도에서 빛나는 돌이 바로 비행석의 원석들이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고 광원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암석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 예쁘다는 생각 보다는 "어...저거 방사능인데..." 라는 이공계스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빛나는 돌을 가공하여 압축시키는 기술은 과거 라퓨타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는 할아버지의 대사와 무스카가 시범적으로 라퓨터에서 광선을 바다에 쏘아 일으키는 거대한 폭발 구름을 생각해 보면 비행석이 농축 우라늄이고 라퓨타의 무기가 핵무기를 은유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 무기를 작동시킨 무스카는 머리색이 백인의 머리색인 금발이지 않은가?

어라 어라 어라....이것 봐라. 현재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가 아니라 그냥 과거에 대한 피해자 코스프레다. 그러고 보니 내 눈에는 영락 없는 일본군처럼 보였던 골리앗의 군인들이 금발머리 무스카에게 무참히 학살당하는 장면에서 무스카의 쓰레기 운운 하는 대사가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나에게도 보이는 것이 일본인들에게 안 보일 리 없다. 피해자 코스프레에 더하여 고도의 미국 돌려까기가 시전된 것이다. 역시 작가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본인.

주인공이 결사적으로 라퓨타를 해체해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해 진다. 평화지향적이고 환경보존론적인 입장을 띄는 것 같지만 그래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아쉬움과 미화다. 그럴듯한 현실비판과 환경보호론적인 포장 속에 천황에 기반한 지극히 일본적인 전통 가치에 대한 옹호와 미국에 대한 돌려까기.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닌가? 이런 상징이 나만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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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생이다. 2차 세계 대전에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세대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패전 후 일본을 이끌고 전후 부흥을 이끌어 온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가 실패했던 이전 일본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보이는 군대의 모습은 이탈리아 군복을 입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냥 일본군이다. 특히 민머리의 장군은 안경만 안 썼을 뿐 분명히 A급 전범 도조 히데끼를 연상 시킨다.

왠만한 또라이가 아니라면 파시즘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전후 세대에게는 당연한 태도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는 없다. 어느 신문 기사를 보니 "탐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 환경 보호주의, 무정부주의적 이념을 가미시킴으로써 이른바 '철학적 애니매이션'의 길을 열었다" 라는 평을 있는데 철학은 무슨 얼어 죽을 철학. 단어 포장은 그럴 듯 하게 있어 보이지만 하나 하나 까 놓고 생각해 보면 막연한 "싫어요"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뭐든지 "싫어요"를 외치는 중2병 증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접한 애니메이션들은 다 그렇더라. 뭔가 있어 보이고 뭔가 대단한 것처럼 포장은 해 놓지만 그래서 도대체 나더라 어쩌라는 것인지를 찾아보면 아무 것도 없다. 더군다나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 일 뿐 나에게는 그저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손을 맞잡고 진지한 태도로 "바루스!"를 외치는 장면에서 실소가 나왔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메더니 고작 한다는 것이 파괴하는 것이다. 수저로 떠서 입에 넣어 줘도 삼키지 않고 내뱉는다. 반중력을 구현한 문명을 발견하고도 그걸 엎어 버리고 없는 것으로 해 놓고는 기껏 얼마 안되는 보물에 희희낙낙이다. 인공태양 기술을 갖다 줘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하던대로 초밥이나 만들겠다는 심보다. 네트웍 기술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팩스와 도장으로 업무를 처리하겠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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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모스"라는 프랑스 사회학자의 "증여론"이란 책을 보면 근대 유럽 이외의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선물 교환"을 통해 사회가 유지되어 왔다는 이론을 펼친 바 있다. 사회학에서 통용될 법한 어려운 용어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고 느슨하게 보이는 시골 마을이 알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한 상호 증여를 기반으로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것을 다들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소규모 공동체가 깨지기 시작하는 것은 증여가 아닌 매매가 들어서는 시점부터이다. 매매는 국가라는 거대 공동체가 담보하는 경제 시스템을 뒷 배경으로 삼으며 매매를 통한 이권의 이동이 벌어지면 소규모 공동체는 와해되어 국가라는 거대한 중앙집권적 공동체에 철저하게 흡수된다. 돈과 이권이 개입되면 가족끼리 소송 걸고 친구끼리 원수 되고 이웃과 결별하게 되는 일은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소규모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잉여 생산물을 제거해야 한다. 동네 잔치를 벌일 때 음식을 넉넉히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짓이다. 허례허식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체면치레로 과하게 물질을 주고 받는 것도 역시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얌체 짓을 하면서 이익을 따지면 공동체에서 퇴출되고 구성원이 모두 얌체 짓을 하면 공동체는 붕괴한다.

"바루스"를 외치는 것이 딱 이런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족민 수준의 공동체 유지에 불필요한 과잉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영화에 나온 대사처럼 비행석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불행을 가지고 올지 행복을 가지고 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행복은 실체가 없는 것이고 실제로 존재하는지 조차 불분명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비행석은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온다. 고통 뒤에 행복이 찾아 올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행석을 버리다면 언젠가는 더 큰 고통이 찾아온다. 이래도 저래도 고통이 찾아 온다면 비행석을 취해야 하는 것이 맞다.

영화에서는 누구도 라퓨타의 거대한 비행석을 취하지 못하도록 천상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상황이 전개되지만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 우주를 건너간 비행석이 먼 훗날 외계인에게 접수되어 이를 통해 기술력을 강화한 외계인들에게 지구가 침공 받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만화적인 상상력을 더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금덩이는 흘러 흘러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며 세상이 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허생전에서 주인공이 금덩이를 바다에 던지는 것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부질 없는 짓이다. 기존 공동체의 붕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이고 금덩이를 취한 후 다음 단계의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너럴 셔먼호라는 금덩이가 대동강에 들어 왔을 때 우리는 그걸 불태우고 쇄국으로 조선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식민 지배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연장선으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 질서의 성립에 참여하지 못한 채 분단과 내전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금덩이를 버린 댓가에 대한 비싼 청구서를 우리는 아직도 지불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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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잘 나가다던 1980년대에 금덩이는 버려야 한다는 내용이 히트를 쳤다.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무위"가 당시 사람들에게 먹힌 것이다. 일본의 전성기 시절에 금덩이를 버리자는 팔자 좋은 소리가 약발이 들었다. 지금의 몰락을 예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성기 시절부터 보인 것이다.

1978년의 미래소년 코난에서는 그래도 뭘 하자는 것이 있었다. 과학 기술 기반의 막강한 힘을 봉인하고 대동사회 비슷한 공산주의적 이상향을 구축하자는 결론이었다. 그 당시는 상호 확증 파괴가 가능한 핵 전쟁이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했던 냉전 시대였고 반핵 정서는 "무위"가 아닌 "당위"였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전쟁을 배격하고 조그마한 지역사회 비슷한 대동사회를 앞세운 것은 그래도 조촐한 대안을 내 놓은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난 1986년의 천공의 라퓨타에서는 대안이 아예 없다. 그저 "No"라고 외칠 뿐이다. 하지만 눈 앞의 황금은 일단 줍고 볼 일이다. 끊임없이 대응하고 상호작용을 해야 할 일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먹고 죽어야 한다. 못 먹겠더라도 할 수 있다면 입에 물고 이빨이라도 넣어 봐야 한다. 스트레스를 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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