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란 영화가 있다.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것으로 아는데 영화에 대해 기억 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개꿈의 느낌을 기가 막히게 똑같이 재현한 장면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뒤죽박죽 개꿈의 느낌을 이렇게 영상으로 옮길 수도 있다니. 그것 하나만 강렬히 기억에 남았다.

 

개꿈을 묘사한 것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최고였지만 장주의 나비꿈을 묘사한 것은 "사라진 시간"이 최고일 듯 싶다. 영화를 보고 나니 장주의 나비꿈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싶다. 재미 있어서 한번 더 보니 더 재미있다. 내가 영화 전문가는 아니어서 모르겠지만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영화였고 너무나도 신선했으며 보는 내내 집중할 수 있었다.

 

근래에 본 영화 중에서 제일 재미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평을 보니 불호에 압도적으로 표가 간 모양이다. 이 영화에 대해 여러가지 느낌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미덕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내가 느낀 점을 써 놓을까 한다. 당연히 스포일러 포함이다. 배역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그냥 배우 이름을 그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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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고 있는 동안 꿈꾸는 자신이 이것을 꿈이라고 느낄 수가 있는가?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아채면 꿈의 진행을 내가 바꿀 수도 있기에 꿈이 더 재미 있어 지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꿈 속에서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아채기는 어렵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꿈의 진행에 매몰되어 그냥 달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수빈과 차수연이 등장했던 초반부는 뭔가 엉성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느꼈던, 꿈을 영상으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차수연이 시어머니로 빙의하면서 배수빈이 얼굴 빛을 바꾸는 장면은 처음 볼 때 공포스러웠는데 두번째 보니 뜬금 없이 맥락을 바꾸며 널뛰는 꿈의 어느 장면처럼 느껴진다. 실뭉치를 던지며 개그맨 흉내를 내는 장면은 진짜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꿈 같은 장면이다.

 

초반부 조진웅의 아내는 지현이었고 두 아들은 지성과 주영이었다. 영화에서 그 가족의 모습은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법한 현실적인 모습이었지만 나중에 이름에 '성'이 붙으니 "전지현"/"박지성"/"박주영"이 되어 버린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지만 그럴듯했던 전반부는 모두가 상상이거나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를 구분할 수가 없다. 헐리우드 영화라면 전반부가 현실이고 후반부는 거대 조직이나 정부의 음모로 꾸며진 가짜이다. 주인공은 저항을 계속하다가 음모를 발견하고 적들을 신나게 깨부수는 모험을 하지만, 이 상황이 타인의 음모가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본인에게는 분명히 있었지만 갑자기 다른 평형세계에 내던져진 듯 온 세상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은 다소 달콤하게 씌여져 있지만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다소 어두운 버젼으로 그려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항 할 수 밖에 없지만 결국 자신이 알고 있던 이전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현실을 받아 들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조진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갖은 저항을 해 보지만 결국 내일 당장 아이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순응을 시작한다.

 

그 순응의 순간에 등장하는 것은 목욕. 자기 부정의 명시적인 선언이다. 목욕탕에 혼자 있는 장면은 그래서 참으로 쓸쓸해 보인다. 목욕탕에서 그는 그가 알고 있던 그의 가족과 경찰로 살았던 그의 인생을 포기하고 씻어 내린다. 그리고 그 목욕탕에서 자신의 망상 중 일부였던 배수빈과 차수연을 스쳐듯 잠시 만난다. 목욕탕은 강제적인 망각과 포기의 공간.

 

그 망각과 포기의 공간에서 만난 뜨개질 선생님, 그녀도 알고 보니 매일 강제적인 망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조진웅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조진웅은 그녀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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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전문으로만 알아 왔던 "정해균"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꿈속의 꿈인 듯 하는 장면들에서 유일하게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실타래 같은 존재이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거슬려 보인 것은 시골 촌부인 정해균이 타고 다니는 RAM-1500 트럭. 봉고 트럭이 아닌 6000cc 가솔린 엔진의 괴물 같은 미국산 대형 픽업 트럭이 시골 마을에서 돌아다가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있을 법한 상황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포드 F-150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본 적이 있으며 조금 작긴 하지만 쉐보레의 콜라라도가 시골 농사 현장에서 쓰이는 것이 예능 방송 (일로 만난 사이) 에서 보인 적도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의외로 현실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RAM-1500에 떡 하니 써 있는 "해균농원"은 배우의 실제 이름인 "정해균"을 그대로 써 놓은 것. 시골에서 미국 트럭을 몰고 다니는 비현실적인 배역이 사실은 영화 밖의 진짜 현실이라고 쾅쾅 명시적으로 못을 박아 버린 것이다. 감독의 숨겨진 웃음 포인트이도 하지만 또한 그 배역이 실제 현실에 관련된 실마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현실과 연결된 배역이라서 그런지, 현실과 몽상의 공간을 가르는 철창을 설치한 장본인이며 또한 자신이 철창을 해체한다. 조진웅이 죽이고자 했지만 죽은 것은 고라니이고 정해균은 버젓이 살아 현실로 작용한다. 어찌 현실을 죽일 수 있겠는가? 조진웅이 무릎 끓고 살려 달라며 빌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의 연기가 어색하고 연극에 가까운 톤인 반면, 정해균의 연기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다. 등장인물의 연기톤에 암시들이 들어가 있다. 감독은 시골촌부의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연기할 배우를 고르는데 꽤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정진영이 감독 생활을 계속한다면 자신이 인기력을 인정한 정해균을 페르소나로 삼을 수도 있을 듯 싶다.

 

정해균(현실)은 조진웅이 현실에 저항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인물이지만 그러면서도 조진웅을 가장 많이 도와주는 인물이다. 조진웅은 결국 정해균에 의지하여 꿈 속을 기어나와 현실을 받아 들인다. 인셉션 같은 영화라면 정해균은 꿈에서 탈출하기 위한 장치인 킥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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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을 때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인물의 심정을 1인칭 시점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성격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 입장에서 볼 때 기가 막히는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환자 조진웅에게는 진짜 현실이다. 관객들은 말도 안되는 영화 내용에 환장하겠지만 이게 진짜 현실인 조진웅은 그야말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을만큼 환장할 일이다. 환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정신과 전문의 수련에 교재로 쓰여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봤을 때에는 조진웅과 내가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으며 그렇다면 조진웅의 입장과 나의 입장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이다. 설령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해도 ,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자신과 세상이 원하는 '나'가 다를 때 그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다들 가면을 쓰고 세상에 맞춰 나를 포기해 가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내 개인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세상이 원하는 '나'의 차이에 대해 극한의 고통을 느껴 본 적은 없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 봤다. 그런데 매 작품마다 배역에 맞춰 자신을 재창조해야 하는 연기자라면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듯 싶다. 대개 데뷔작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정진영 이 양반 보기보다 힘들게 살아 왔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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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정보 없이 그냥 봤는데 나에게는 쉽고 재미 있었다. 맨 처음의 화면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수미쌍관으로 끝내려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냥 그렇게 다소 갑작스럽게 끝내고 말았다.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가가 많은데 전혀 그럴 것이 없다. 전반부가 몽상이고 망상이었다는 것만 받아 들이면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다.

 

배수빈/차수연의 어색한 연기톤, 전지현/박지성/박주영 가족, 감독은 대 놓고 전반부가 몽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빙 돌려 암시는 해 놓고는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이걸 받아들이지 않도록 미스터리 비슷한 톤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연출을 통해 관객의 허를 찌르는 장난스러움이 보인다.

 

내가 본 내용에서는 심오한 철학 따위는 없으며 교훈 따위도 당연히 없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장주의 나비꿈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표현한 영상으로 즐기면 된다. 영화 내부의 분위기는 심각하지만 시선을 영화 밖으로 돌려 이걸 만들어 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장난스러운 구석이 많다. 정진영의 연기 역시 굉장히 진지하지만 어딘지 유머스러운 구석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장사할 생각도 좀 했어야...

 

영화는 앞과 뒤가 대칭되어 있다. 조진웅이 꿈에서 깨어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영화를 반으로 접으면 같은 내용들이 중복될 듯. 그 내용들도 찾아보고 생각해 보면 나름 이야기꺼리가 있을 것 같으나 나는 그냥 감독이 나름대로 수미쌍관 비슷한 형식을 갖춘다는 핑계 하에 앞 뒤 대칭을 맞추는 것으로 관객을 놀려 먹는 떡밥들을 마구 던진듯한 인상을 받는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허구인데 영화 안에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따져서 뭐하나? 수미쌍관 비슷한 데칼코마니 형식을 통해 같은 내용을 다른 버젼으로 반복하면서 이 놈이 저 놈이며 저 놈이 이 놈이라는 식으로 신선 놀음 하는 걸 재미있게 봐 주면 된다. 고라니 사체 장면은 대 놓고 관객들을 낚는 연출 , 구급대원들이 고라니 사체를 그렇게 옮길 리가 없잖아, 이었고 흡사 전우치전을 보는 듯 해서 매우 웃겼다. 전우치가 잘 써먹는 방법이 바위나 나무를 자신으로 변신시켜 놓고 적들이 티각태각 싸우게 만든 것. 감독의 의도는 그럴듯한 허깨비 떡밥 던져 줄테니 관객들끼리 티각태각 해 보라는 것이다.

 

경찰서장 부인과의 불륜을 알아낸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그냥 얻어 걸린 것으로 치자. 이런 건 감독이 관객을 놀려 먹을려고 장난을 친 것 아니겠는가? 학생 사물함을 경찰 때 기억으로 열어 버린 것도 관객 놀려 먹는 장난. "꿈과 현실을 대칭으로 섞어 놓으니 서로 구별 안되고 헷갈리는게 호접몽 스럽지?" 하는 식의 도끼 자루 썩어 나가는 신선 놀음 흉내내는 장난이다. 

 

한글 제목은 "사라진 시간"이지만 영어 제목은 "Me and Me"다. 영어 제목이 더 적당해 보인다. 첫번째 봤을 때는 벙 찌는 듯 했지만 신선했고 두번째 볼 때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며 곱씹어 보니 장난스럽고 웃기기까지 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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