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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극심한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다.
우울증 같은 병에 걸린 건 아니고 (혹시 모르지)
그 동안 살아 왔던 시간 중에서...
나를 움직여 왔던 것은 대부분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내 자신이 존귀하다고 믿어 왔는데...
그 동안의 삶은 그저 두려움이 이끄는대로 살아 왔다니...
그것이 보이면서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한마디로 허망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 자신이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작은 두려움들을 대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외면하는 것들도 많다.
최종적인 것은 아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내 자신이 소멸된다는 공포...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가능할 일이 아닐까.
내 안에 갖혀 있어서야 나를 만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를 만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것.
죽음의 공포는 그 때에서야 극복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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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옥상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아래로 뛰어 내리고 싶은 욕망이 들 때가 있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가...
왜 그렇지? 내 자신에 물어 봤다.
두려움 때문이였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떨어져서 죽을까 무섭다.
그 무서운 마음에 사로 잡히면 빨리 털어내고 싶다.
차라리 실제로 뛰어 내리면 그 무서운 마음은 없어 질 것 아닌가?
이건 두려움을 맞대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것이다.
외면하고 내버려둔 두려움이 내 자신을 지배하고 움직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죽음에 대한 찬미는...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 아닌 철저한 굴종이다.
모든 형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것...
온전한 나를 만나 나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살아 있고 죽어 있을 때 죽어 있자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
너무나도 멋진 통찰이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제야 조금 알 듯 하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아둥바둥할 필요는 없다.
언제 두려움을 벗어 던지고 온전한 나로 살아 갈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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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는 삶...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분노, 불안, 걱정...
그 많은 것들이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두려움에 눈이 막히면 자신을 볼 수 없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두려움을 매개로 외부에 종속된다.
스타워즈에서 황제는 왜 루크의 분노를 촉발시키려 하는가?
분노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분노를 터트리는 것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리기와 다름 없다.
두려움이 루크를 지배하고 움직이게 된다.
두려움은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니...
외부에서 개입되는 의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에 눈 먼 사람들은 때로는 엄청난 일을 벌이기도 한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후회한다.
두려움에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어서 그렇다.
인간을 통제하기에 가장 손 쉬운 방법은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어느 정도 두려움을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이 방법이 먹히기 않는다.
잘 산다는 나라에서 독재정치가 발 붙히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특정 국가를 지명해서 미안하긴 하다만...
싱가포르가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한...
싱가포르는 내 기준에서 좋은 국가가 될 수 없다.
지금 잘 살고 있다지만...
그건 언제 무너져 내릴 모를 사상누각과도 같다.
지금의 번영은 두려움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온전한 자신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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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이끄는 삶, 노예로 사는 삶이다.
자신이 이끄는 삶,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굉장히 어렵다.
자신에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몇 명이나 될까.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월급 받아 먹고 남이 시키는 일 하는게 자영업 보다 편하긴 하다.
이건 노예의 삶이다. 노예로 살아가는 삶은 편하다.
내 자신이 월급장이이므로 월급장이를 비하 할 뜻은 전혀 없다.
노예냐 주인이냐는 그 마음가짐이다.
수동적인 태도로 시키는 것만 하고 월급 받아 먹어 편히 살겠다는 것...
이건 노예의 마음가짐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렇게들 산다.
남북전쟁으로 노예가 해방되었지만...
실제 노예들이 주인을 떠나...
자유민의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평생 노예로 살다가 독립하라 하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그 두려움에 주인을 떠나지 못하고 남는 것이다.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유민은 먹고 사는 문제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귀찮고 편하지 않은 길이지만 기꺼이 떠 안는다.
주인으로 사는 월급장이의 태도가 어떤 것이냐고?
그건 그 주인 마음에 달렸다.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그런 질문에는 답해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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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너무 무책임하고 뜬 구름 잡는 거 아니냐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 볼 마음이 아직 없는 거다.
참고로 내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면...
언제 이 회사를 떠날지 모른다는 각오로 일한다.
언제나 홀로 서기를 염두에 두고 일한다.
난 이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동등한 자격으로 회사와 동업하는...
개인 사업자라고 생각하고 업무에 임한다.
최악의 경우 나 혼자 1인 기업을 할 수도 있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배우고 싶다.
따라서 주어진 업무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 따지지 않는다.
빨간 날도 그리 따지는 편은 아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를 일방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 뭔가를 제안하고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 내 목표는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동업자에게 뭔가를 제안 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내 자신이 내 분야에 대해서 내고 싶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회사와의 동업 관계는 그 수단일 뿐이다.
내가 찾아 낸 주인으로 살아가는 월급장이는 이런 모습이다.
사실 회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월급장이란 개념도 없다.
오로지 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기적인 모습이다.
회사와 내가 서로의 이익을 맞출 수 있을 때에는 월급쟁이의 모습으로 산다.
아니라면 언제든 결별하고 나 혼자 설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먹고사니즘의 두려움에 감싸여 있는 모습이다.
내 눈에는 그게 보이니 개선 할 여지는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맞고 틀린 차원에서 논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모습을 찾아 낼 수 있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묻고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나 자신도 아직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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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려움을 기초로 한 것인가 아닌가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한다.
온전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가? 두려움에 기대어 통제하려 하는가?
소통과 계몽의 차이를 나는 여기에 두고 있다.
소통이 진짜고 계몽은 가짜다.
나는 내 자식에게 진실한 부모의 이야기를 하는가?
아니면 겁을 줘서 통제하려 하는가?
체벌제도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들이 많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면 체벌은 틀렸다.
편한 방법이지만 틀린 방법이다.
그럼에도 나 자신도 가끔 매를 들고 호통을 친다.
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온전한 부모로써 난 아직도 갈 길이 멀게 느껴진다.
지식인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 양반이 자기가 공부해서 느낀 바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가?
그렇지 않고 그저 위대하다는 대가의 무게를 이용해 남을 뭉개려고 하는가?
정치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에 기대어 표를 호소하는 것은 가짜다.
대세론은 두려움을 이용하는 사례다.
범여권에서 떠드는 반한나라당 연합? 이것도 가짜다.
한나라당에서 떠드는 정권교체의 열망? 이것도 가짜다.
아직까지 진짜가 없다. 온전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 없다.
아직 막판이 아니여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다.
막판이 되어 진짜 카드를 내 밀면 밝혀질 듯...
재벌들이 잇따른 재판에서 집행유예나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무전유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유전무죄는 엄연한 현실임을 보여줬다.
재벌 총수를 구속하면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나 하는 두려움...
총수가 구속되면 현대 자동차나 한화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분 못하는 사람이 재판관을 한 것은 맞다.
논란 많은 박정희에 대한 공과...
그 많은 공에 불구하고... (그 공마저도 알고 보면 의심스럽다지만..)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면에서 박정희는 가짜다.
일제시대...
일본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라면 그들도 나름대로의 공이 있다.
그들의 주장이라면 배은망덕일 수도 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판단해 보려면...
우리가 노예로 살았는지 주인으로 살았는지 보면 된다.
명확하다. 일제시대는 우리에게는 가짜다.
그게 왜 가짜인지 그들이 모른다는게 안타까울 뿐...
우리들 중에서도 왜 그게 가짜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하더라만...
구약의 야훼는 두려움에 기대어 사람들을 굴복시켰다.
왜 신이 그 명성에 걸맞지도 않게 두려움을 이용한단 말인가.
내 기준에서 야훼는 가짜다.
내가 아는 예수는 두려움에 기대지 않았다.
신약의 예수님은 진짜다.
그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냈고...
생사를 초월하여 그 자신을 만나 넘어선 존재다.
하지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자들은 가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나는 두려움에 의거하여 판단하는가?
아니면 온전한 나를 만나서 판단하는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겸허하고 정직하게 물어 보면 될 뿐이다.
하지만 참으로 어렵기도 하다.
평생을 걸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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