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현재 현실에서 정치 진영은 군소 세력을 제외하면 둘로 나뉜다. 그 둘은 지칭하는 단어들로 좌파/우파 또는 보수/진보 등이 있지만 그것 또한 각 진영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단어를 내세운 것일 뿐 내 개인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은 좌회전 깜빡이 넣고 우회전 한다고 욕 먹었지만 보수 진영에서도 우회전 깜빡이 넣고 좌회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진영의 성격을 규정하는 프레임들이 있지만 그걸 무시하는 계급배반투표가 횡횡한다.

분명 정치 진영은 두개로 나뉘는데 진영을 가르는 기준이 선명하지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 무관심층에서는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 나쁜 놈들이라는 인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뭐가 되든 사안에 따라 나의 이익에 부합되는 세력을 선택하면 되겠지만 사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존재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치 않으니 더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더 싫은 것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에 와 닿는 정치 진영의 구분 기준을 접해 본 적이 없다보니 내 스스로 그 기준을 정해 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경험치는 충분한데 굳이 타인이 정해 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결국 내 경험치 내에서 내가 정한 기준을 써 놓아 보았다. 선악 따위의 가치평가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따위는 내가 정한 기준에서는 없다. 그런 것들은 내가 경험했던 현실을 하나도 설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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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의한 구분 기준에 따르면, 보수우파 진영의 중요한 가치는 "서열"이다. 내가 겪은 범위 안에서 보수우파가 벌이는 모든 일들은 "서열"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의 공통점은 무리 내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치 진영을 떠나서 인간이라면 "서열"에 대해 타고난 뭔가가 있다. 이건 본능이라 학습하지 않아도 자연히 발현된다. 본능이라지만 현실에서 사회가 구동되는 중요한 장치임에는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자각하지 못할 뿐 사회생활의 일상은 서열에 기반하여 움직인다. 서구사회든 유교사회든 아마존 밀림의 원시사회든 마찬가지다.

"서열"을 정할 수 있다면 사회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비용이 적게 든다. 신분제도는 전근대적이며 후진적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타고난 신분으로 서열을 정하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년 동안 태생적 신분제를 바탕으로 국가가 운영되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서구는 신분제도를 완전히 타파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열은 유효하다.

자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은 신분제도를 말도 안되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으나 신분제도는 서열을 정하는 수 많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서열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신분제도는 소멸되었지만 인종으로 서열을 세우고 나이로 서열을 세운다. 인종차별을 지금까지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서열을 세울 때 가장 편리하고 저렴한 비용이 인종차별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서열"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명쾌하고 편리해진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방향을 정하고 서열 낮은 사람이 실행하면 된다. 의사결정에 소모적인 논쟁이 없다. 구성원이 자신의 서열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좌고우면 할 것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집중하면 된다. 세상이 소란스러울 일 자체가 없다. 서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서열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정치 이념이 뭐가 되든 서열을 정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안정이 된다.

서열이 가장 낮은 사람들이 여기에 반발하여 세상을 뒤집어 엎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선 최하위 서열에게는 세상을 바꿀 물리적 수단이 주어지지 않는다. 뒤집고 싶어도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최하위 서열은 어떻게 하든 자신보다 더 낮은 서열을 만들어 낸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꼬리칸에 속한 이들은 평등하게 그려졌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꼬리칸 내에서도 서열을 만들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서열은 일본인-조선인-중국인-동남아인 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차별받는 존재였지만 나름대로 2등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인들은 자신의 하위 서열로 중국인이 생겼고 많은 조선인들이 중일전쟁에 가담했다. 대한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이 변절했던 계기가 중일 전쟁이다. 동남아인들은 최하위 서열이었지만 일본제국주의가 계속 팽창했다면 남태평양 원주민을 자신의 하위 서열로 삼고 만족했을 것이다.

서열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서열 자체가 무너지는 일이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으면 뭘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가 된다. 자신의 서열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에 무리수를 던지게 된다. 사농공상이라는 엄격한 신분제로 서열을 정했던 조선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서열을 확인하기 위해 날뛰었다. 일제강점기가 갑작스럽게 끝나버리자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들이 날뛰며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지금의 보수우파는 다양한 서열기준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가장 익숙한 서열 기준은 나이와 학벌이지만 온갖 기준들로 갖가지 서열들이 존재한다. 교회의 목사님을 정점으로 하는 서열, 출신지역에 따른 서열, 판매부수에 따른 언론 서열, 각종 선배님 후배님으로 통하는 서열도 있다. 서열을 세우는 온갖 기준을 서로 인정해 주고 그 쪽 나와바리의 서열은 존중해 준다. 서열만 인정해 준다면 정치이념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보수우파의 확장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보수우파는 외교에도 서열을 따진다. 미국을 서열 1위, 일본을 서열 2위로 정해 놓고 외교를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를 거부하고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민국이 정면으로 반발한 것은 보수우파 입장에서 볼 때 서열을 무너뜨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짓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과 푸틴 사이에서 사진을 찍은 것을 보고 높은 서열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라 여겨 당시 보수우파들은 서울 시내에서 오성홍기를 흔들어 댔다. 보수우파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서열이다.

노무현의 당선은 서열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TV로 생중계된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검사들이 대통령에게 그런 태도를 보인 것도 자신들의 기준에서 노무현의 서열을 정할 수가 없으니 좌충우돌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노무현이 그런 검사들을 힘으로 제압했다면 서열을 확인 받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었다. 결국 민주당 내 서열 중시 세력과 보수우파와 연합하여 노무현 탄핵을 시도했다.

 

진보좌파가 권력을 잡았을 때 높은 서열임에도 세력을 장악하지 않는 것을 보고, 즉 힘으로 대놓고 족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진보좌파를 만만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건 원숭이 우두머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무리에서 내쳐지는 것과 동일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조폭 사회에서 두목이 가오를 잃어 버리면 조직원들이 등을 돌린다. 조폭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반응한다. 그러나 진보좌파는 서열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매우 매우 지독하다.

차상위계층이 의외로 정의당이나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계급배반투표도 "서열"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하위 서열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민주당은 그걸 부정하려 든다. 강남 부동산 때려 잡는 건 내 상층 서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건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서열의 계단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더욱 싫은 건 서열 질서가 무너져  내 아래 서열이 나와 맞먹게 되는 상황이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도 서열 질서를 잘 활용하고 있다. 문재인은 대통령이라는 높은 서열을 가지고도 서열에 어울리지 않게 답답한 모습을 보였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서열에 어울리게 거침없고 시원 시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보수 우파가 대통령이라는 최고 서열에게 바라는 모습은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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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우파 진영이 "서열"을 중시하는 반면 진보좌파는 "동원"을 중시한다.

전술했듯 서열은 사회적 비용은 낮추는 효율적인 장치이다.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에 부합하며 세상이 시끄러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 효율적인 장치가 역사적으로 볼 때 망해 버린 것이 문제다. 신분제로 운영되는 국가는 효율적인 면에서 대단히 우수했지만 근대를 거치면서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끌려 내려왔다. 보수우파는 효율이 높지만 생산량은 극히 낮기 때문이다. 

10원 투자하여 20원 버는 것으로 200%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 보수우파이고 100원 투자해서 120원을 벌어 120%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 진보좌파다. 보수우파는 200% 효율로 10원을 남겨 먹고 진보좌파는 120% 효율로 20원을 남겨 먹는다. 진보좌파는 효율이 좋지 않지만 자원을 더 많이 "동원" 할 수 있어 절대 생산량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이게 누적되면서 보수우파는 멸망했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라 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전쟁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서열"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전쟁은 해당 영역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서열의 몫이었다. 국가간 갈등을 전쟁으로 풀 수 밖에 없다면 전쟁 전문 서열인 귀족들만 전쟁에 나서서 결론을 보면 될 일이었다. 전체적인 효율에서 보자면 이 방법이 사망자가 가장 적게 나온다.

그런데 비용이 얼마가 되든 오로지 전쟁의 승패가 중요하다면 쪽수가 많은 것이 유리하다. 귀족이 아닌 다른 서열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물론 그들은 평시에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전투력이 약하다. 낫과 도끼 들고 전쟁에 나가봐야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마병에서 학살 당할 뿐이다. 그러나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전투 전문 서열이 서로 대등하다면 다른 서열이 전쟁에 참여한 측의 승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

백짓장이 맞들어서 유의미한 승률을 올린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기술 발달로 기존과 다른 물리적 도구가 탄생한다면 양상은 달라진다.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귀족들은 장궁과 석궁으로 무장한 영국의 평민 궁수 부대에게 호되게 당했다. 결국 잔다르크로 대표되는 일반 민중이 전쟁에 참여하여 프랑스가 승리하게 된다. 물론 귀족 중심의 서열을 중시하던 프랑스의 보수우파에게 잔다르크는 화형 당한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국민을 징집하는 동원력으로 유럽대륙을 평정했다.

진보좌파는 총력적인 동원을 중시한다. 전쟁이 터지면 서열이고 뭐고 총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징집하여 전쟁터에 보낸다. 요즘은 남녀 구분도 안하고 사지 멀쩡하면 전쟁터에 보내려고 한다. 그게 가능해진 이유는 기술력으로 기존의 한계를 뛰어 넘는 새로운 물리적 도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도구는 언제나 초창기에 결점이 있고 취약하다. 그걸 동원력을 높여서 돌파한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도구가 안정되면 대세는 결정된다.

새로운 도구가 나와도 동원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새로운 도구는 사장된다. 이러니 진보좌파는 사회 동작의 중요한 장치인 서열을 무너뜨리고 구성원을 평등하게 섞어서 무차별적인 균질 상태로 두고 언제든 동원하려 한다. 피부색이 검든 희든 상관 없이 총 쏠 수 있는 손가락 있고 뛰어 다닐 수 있으면 평등하게 동원 대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기존의 사회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혁명으로 실제 벌어졌다.

진보좌파의 지향점은 인간의 타고난 사회적 본성과는 다른다. 무차별적인 동원을 강조하기에 "평등"에 주안점을 찍을 수 밖에 없다. "서열"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면 머리 아플 일이 없는데 진보좌파의 세상에서는 내가 어느 서열인지 아는 것조차 불가능 하니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본능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주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이리저리 들이 받을 수 밖에 없다.

진보좌파는 의사결정에도 총동원령을 내린다. 소수 전문가가 알아서 결정하여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투표를 해 가며 시시콜콜 의사 결정에 대중의 참여를 요구한다. 매번 요란법썩을 떨며 지루한 소모적인 공방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사결정된 사항에 대해 국민들을 총동원 할 수가 없다. 너희들이 결정했으니 너희들에게 책임이 있다며 끌고 가 버린다. 대중이 참여하는 의사결정은 총동원을 하기 위한 절차의 시작점이다.

이럴 바에는 그냥 태생적 신분제가 맘 편하겠다 싶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진보좌파 세력들이 이미 그런 사회를 잡아 먹어 버렸다. 하기 싫지만 살아 남아서 이기려면 어쩔 수 없이 진보 좌파 해야 한다.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을 동원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찌 독일과 일본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데 찬밥 더운밥을 따질 수가 없다. 흑인들도 동원해야 하고 히스페닉도 동원해야 하고 다 해야 하다. 그러고도 더 동원할 대상이 있다면 기꺼이 떠 안는다.

월드컵에서 승리하는데 흑인이고 백인이고 그 따위는 없다. 가용한 축구 선수들을 모두 동원하고 그 중에서 승리 확률이 높은 멤버를 선발하는 수 밖에 없다. 인간이라고 인정되면 외계인이라도 끌어 들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승하겠다는 것이 진보좌파의 자세이다. 그런 총동원령을 사람들이 받아 들여야 하니 온갖 정치적인 언사와 철학적 논리를 만들어 나간 것 뿐이다.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닌지라 억지스러운 온갖 수사들이 동원되고 후천적으로 학습되어야 한다.

 

근대는 "서열"에 근거한 사회적 본능과 거리를 두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은 당신이 사회적 서열과는 아무 상관 없는 존재라는 선언이다. 진보좌파에는 데카르트, 보수우파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군자"라는 차별적 단어 탓에 공자는 보수우파적이지만 또한 공자는 모두가 "군자"가 되는 교화에 긍정적이다. 이에 유교는 보수우파도 써 먹을 수 있지만 진보좌파도 써 먹을 수 있다. 유교가 의외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하는 건 이런 이유다.

 

진보좌파는 "동원"을 중요시 하다 보니 평등에 방점을 찍을 수 밖에 없고 경제적 불평등 해소에 대해서 목소리를 더 낼 수 밖에 없다. 외교에 대해 국가간 힘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원칙적으로 국가간 서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보좌파들이 이미 세계를 다 평정해 놓은 상태에서 국제 외교의 규범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서열에 기초한 조공외교 따위는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힘의 논리로 상대를 동원하려고 한다.

 

차상위 계층들은 나름대로 그들 내부에 꾸려 놓은 서열 체계가 있는데 진보좌파는 그걸 부정하고 뒤엎으려 든다. 공장노동자라도 그 안에는 온갖 서열들이 있다. 파견직도 있을 것이고 임시 알바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도 있고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3명만 있어도 서열이 생기는데 어디에서 굴러 먹은 진보좌파가 와서 서열들을 모두 뒤집어 놓으니 좋아할 리가 없다. 차상위 계층 중에서 일부가 계급배반투표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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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우파는 서열을 중시하고 효율 높은 것을 선호하므로 집권 시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실행하기 편한 쪽으로 빠르게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진보좌파는 전체 동원을 위한 명분을 중시하므로 편의를 위한 예외에 인색하며 의사결정을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맡기는 경향이 있어 소모적이고 답답하며 종종 배가 산으로 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보수우파는 쉬운 길을 선택하므로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 줄였지 늘리지는 않는다. 세금도 감세를 기치로 내거는 경우가 보통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별도의 비용 없이 서열을 매개로 이를 해결해 나간다. 진보좌파는 효과적인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효과적인 선택은 대개 어려운 길이다. 이렇다 보니 큰 정부를 지향하며 공무원 숫자를 늘려서 동원력을 높이려 한다. 당연히 세금도 많이 걷으려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비용을 들여서 해결한다. 

 

보수우파는 자원을 한정적으로 동원하는 경향이 있어 전례 없는 문제가 발생한 경우 이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회 규모가 더 커지고 복잡해지기에 보수우파의 능력 저하는 더 심화 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진보좌파는 가용한 자원을 몽땅 쏟아 넣기에 전례 없는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해결해 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들고 모든 국민이 피로도를 느낀다.

 

시행착오는 언제나 진보좌파 때 많이 벌어지며 시끌벅적한 소동도 많이 벌어진다. 온 국민이 억지로 떠들썩하게 참여 당하고 에너지 소모를 강요 당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진보좌파 때 경제적 성장이 정체되거나 멈췄던 적은 없다. 자원이 많이 투입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들인 밑천에 비해 효율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나 효율보다는 생산총량이 우선시 되며 장기전으로 가면 효율마저도 좋아진다.

 

서열을 중시하는 보수우파는 인간 본성과 그리 다르지 않기에 학습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기 쉽다.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보수우파들 중 상당수는 자유 민주주의가 아닌 반공 민족주의에 가깝다. 그들 입장에서 이미 자유 민주주의를 접하고 있는데 이걸 굳이 학습할 필요는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현재 시점의 체제를 수호하자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현재의 서열을 존중하는 본능이 깔려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자유총연맹이 기여한 바는 내가 알기에 없다.

 

진보좌파는 본능에 부합하지 않으며 기존에 없었던 변화를 도모하므로 진보좌파 진영을 지지하려면 추상적 개념을 학습으로 습득해야 한다. 진보좌파는 기존에 없었던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기에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여성 장교가 남자 사병들을 호령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지만 학습을 통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으로 훈련 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지도 배워야 한다. 진보좌파에서 역량이 모자란 세력은 이슈를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분위기를 강제로 모는 경우도 있다. 진보좌파의 무늬를 띄고 있지만 서열 놀음을 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다.

 

진보좌파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동원의 대상을 계속 넓히므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학습량이 많다고 해도 가만 내버려 두면 결국 본능적 태도로 회귀하기 십상이다. 젊은 시절 진보좌파를 지지했다고 해도 나이가 들면 서열에 대한 본능적인 선호도가 생긴다. 게다가 젊은 시절의 내가 알던 진보좌파가 떠들던 이야기를 지금은 보수우파가 하고 있으며 진보좌파는 변화하여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령 옛날에는 진보좌파가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보수우파가 남녀칠세부동석을 견지했다면 지금의 진보좌파는 성소수자를 평등 대상으로 삼고 있고 보수우파는 남녀평등을 기정 사실로 받아 들이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진보좌파가 계속 수위를 높여간다면 개인 입장에서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진보좌파 보다는 보수우파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보좌파는 동원할 수 있다면 외계인이라도 동원할 지독한 놈들이다.

 

인공지능이나 생명공학 분야에서 분명 진보좌파는 기존에 없었던 유연한(?) 결정을 할 것이다. 복제인간의 법적 지위를 인간으로 인정하여 근로소득에 대한 세금을 걷으려고 한다던가 인간과 복제인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안을 낼 수도 있다. 소대장으로 인공지능 로봇의 지위를 인정하는 법안을 내어 전시 명령 불복종 시 즉결처분권을 로봇에게 줄 수도 있다. 이런 짓은 보수우파는 못하지만 진보좌파는 할 수 있다.

 

보수우파와 진보좌파가 티격태격 하면서 사회가 발전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항상 진보좌파가 보수우파를 씹어 먹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보좌파는 보수우파보다 동원력을 높이는 방법에 관심이 많으며 신기술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진보좌파는 계속 변화해 나가기에 보수우파는 진보좌파가 빠져 나간 빈 공백을 메우는 식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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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중 어느 진영이 옳은 진영인지에 대해 묻는다면 질문이 잘못 되었으므로 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중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답할 수 있다. 언제나 진보좌파가 이긴다. 정권을 잡지 못한다고 해도 진보좌파는 이미 승자의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승패는 결국 동원력과 생산총량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외란이 전혀 없는 철저히 고립된 환경에서 살고 있다면 언제나 보수우파가 이긴다. 석기 시대 수준의 원시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인도의 노스 센티널 섬은 보나마나 서열로 돌아가는 보수우파 세상일 가능성이 거의 100%다. 중국대륙은 주변에 위협적인 외부세력이 없었던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 언제나 저비용을 강조하는 보수우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이 후 주변 상황이 변화하면 자원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한 채 멸망하는 것을 반복해 왔다.

 

상대가 없으면 생산총량은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나오면 된다. 생산총량의 증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비용에만 관심이 간다. 편한 길을 찾게 되고 비용을 적게 드는 선택만 하려 든다. 신기술이 등장하지 않으며 설령 나오더라도 용도를 찾지 못한 채 초기의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장된다. 이러니 새로운 물적토대가 등장하지 않게 되고 혁신은  불가능하게 된다. 청나라와 조선이 그렇게 대응하다가 망해갔다.

 

큰 힘을 가진 외부 세력이 있다면 언제나 진보좌파가 이긴다. 외부에 대항하여 내부의 자원을 총동원 하지 않으면 언젠가 외부에게 흡수되기 때문이다. 진보좌파가 보수우파에게 패배하면 당연히 외부 세력에 흡수되고 그나마 진보좌파가 이겨야 외부에 맞설 희망이라도 생긴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겪은 것은 보수우파 수구파의 실패가 아니라 진보좌파 개화파의 실패이다. 쇄국 정책으로 조선을 지금까지 존속시킬 수 있었을까? 보수우파는 아무리 성공해도 실패가 필연이다.

 

흔히 좌파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여기지만 내 개인적인 정의로 보자면 공산주의는 프로레타리아 혁명 이후 공산독재 과정을 거치는데 이게 결국 보수우파의 서열 중시와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동작한다. 소련과 동구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결국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에서 생산총량의 격차를 좁히지 못해서 망한 것이다. 공산독재로 인한 비효율이 문제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노동강도 대비 효율은 좋았을 것이다. 다만 가용한 노동강도를 모두 동원할 수 없었을 뿐이다.

 

자신의 시선이 안쪽에 있다면 보수우파를 지지하면 되고 외부에 있다면 진보좌파를 지지하면 된다. 사안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시기에 따라 시선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기는 쪽은 진보좌파로 이미 정해져 있다. 백인 우월주의 국가의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할 가능성은 이미 Zero로 수렴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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