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모래시계" 덕에 정동진이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집 내무부 장관과 연애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핫플레이스인 정동진에 가는 것은 일종의 의무였다. 그렇게 정동진을 갔었던 경험을 주변에게 이야기 하다가 강릉이 고향이신 은사님께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 때 은사님의 말씀이 의외였다.

"정동진?  그게 어디야?  강릉 근처라고?

. . . . . . . . . . .

아~~~~ 물고기 잡아서 사는 그 가난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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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또는 "~포"인 동네는 예전부터 가난한 동네였을 가능성이 높다. 섬이 많은 신안군에서도 벼농사가 가능한 섬은 잘 사는 동네였고 농사를 짓지 못해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섬은 가난한 동네였다고 한다.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강릉 부근에서 논을 볼 수 있다. 예전부터 동해 지역에서 강릉이 가장 주요한 지역이 되었던 것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논농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 지역이 가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시대 내내 외양으로의 진출을 엄격히 금하는 해금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농사가 잘 안되면 배 타고 나가서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할텐데 아예 배 타고 먼 바다를 나가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이러니 물질 수준의 연근해 어업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정동진이 딱 그러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제주도는 살아가기가 진짜 힘들었을 듯)

조선 후기 법령집 "속대전"에 따르면 "전선과 병선이라도 먼 바다로 내보낼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기고 100리 밖의 공해상으로 배를 내보냈을 때 1백대의 곤장을 때리고 충군시킨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군사적인 목적이라도 100리를 나갈 수 없었으니 어선이나 민간 선박은 외양에 나간다는 것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표류로 인한 외부로부터의 유입도 큰 일이었다. 표류된 외국인이 발견되면 지방 관리가 재량껏 처리하지 못하고 일단 한양으로 호송해야 했고 국왕이 주재하는 어전회의를 통해 송환방법에 대한 의사결정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엄격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온갖 고위 관리들이 출입하다 보니 해당 지역의 어민들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표류인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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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냥 조선왕조 500년 내내 유지되었던 정책이었다. 명나라가 왜구를 비롯한 해적문제로 골머리를 앓자 내린 처방이 해금령이었고 청나라 때에는 해금령은 기본 정책이었다. 조선에게도 바닷길을 통해 유입되는 외부 세력은 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해금 정책은 조선 내부의 사정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청나라 때에는 반청세력의 중심지였던 대만이 바닷길을 통해 조선에 정박만 해도 지방 관리가 참수되는 난리가 났었다. 바닷길을 통해 베트남 등의 외국과 직접 교역 및 외교를 할 수가 없었고 청나라 북경에 파견한 사신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숙종 때부터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하여 외교 관계를 전적으로 청나라에 의존하였고 영/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닷길로 일본을 오가던 조선 통신사도 정조 때에는 한번도 없었고 순조 11년을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외부 환경이 격변했지만 조선은 대외정책을 능동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청나라만 바라 보다가 청나라가 망하면서 조선도 같이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사대외교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외교 형태이긴 하지만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은 바닷길을 버리고 자주 노선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사실상 청나라에 완전히 종속된 제후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에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을 첫번째로 넣은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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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배계층들은 조선을 독립 자주국으로 명시한 시모노세키 1조를 보고 속된 말로 빡이 돌아야 했다. 그 조항은 우리가 스스로 청나라로부터 쟁취했어야 했던 것이다. 창피한 줄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일부 지배계층은 일본을 희망으로 생각하고 일본과 붙어서 뭔가를 해 보려고 했다. 하긴 쑨원과 안중근 의사도 한 때는 일본을 희망으로 생각했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할 때 외부 세력에 편승하여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고려 서희의 외교술을 모범적인 사례로 보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탐탁치 않게 여긴다. 일시적으로는 강동 6주를 얻었지만 결국은 귀주대첩으로 끝을 봐야 했다. 중간에서 잔꾀를 내어 해 먹는 것은 일시적이며 결국 위험은 사라지지 않은 채 누적되어 크게 돌아온다.

 

청나라에 붙든 일본에 붙든 도찐개찐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력으로 해 봐야 했다. 물론 무모한 행동이었을 것이며 죽기 딱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어야 했다. 우리가 청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고, 우리가 명성황후를 죽여야 했고, 우리가 조선을 멸망시켜야 했다. 엄청난 혼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혼란을 겪지 않은 댓가를 지금도 치르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이 항공모함을 운영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가 대양을 무대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교문화는 우리에게 무의식적인 문화적 자산으로 남았지만 같은 500년 동안 이어졌던 해금정책은 무의식적인 금기로 남은 모양이다. 정동진은 가난한 동네라는 인식이 여전한 것이다. 해상 루트를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은 외교를 청나라에 의존했던 것과 같은 일이다.

정조가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견해는 단단히 잘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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