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에서 "식민사관" 을 찾아보면 여러가지 "~론"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당파성론"이다.
이 이론은 "시데하라 다이라"라는 일본학자가 제창했다고 한다. 그는 1900년에 대한제국으로 건너 와 1905년 학정참여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교육에 관한 모든 사항"을 학정참여관의 자문과 동의를 얻은 후 시행해야 했다고 한다. 이 양반의 배경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당시 조선에서 교육 분야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 받은 인사였으며 1년 후 일본어 교과서 편찬 진행의 무능함을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해임 당한다.
직장을 잃고 일본에 돌아 온 후 1907년 "조선정쟁지"라는 논문으로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당파성론의 창시자답게 "당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장본인이며 1910년에는 동경제국대학에서 "조선사" 강좌를 개설하여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도했던 모양이다. 1918년에는 "조선교육론" (朝鮮敎育論)을 저술하였고 이 후 식민지 대만의 교육행정에 관여하여 대만제국대학의 창설을 주도하여 총장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아무튼 "시데하라 다이라"는 그가 작성한 박사 논문 "조선정쟁지(朝鮮政爭志)"에서 조선민족은 분열성이 강하여 항상 내분하여 싸웠으며 혈연,학연,지연등을 따지는 배타성이 역사현실로 반영되어 서로의 이해만을 두고 붕당들이 정쟁을 일삼은 탓에 정치적 혼란, 사회적 폐단을 유발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 왕조가 망국의 길을 걸었다는 당파성론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조선의 고문서들을 수집하여 읽어보는 노력을 제법 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데하라 다이라"는 그의 행보를 봤을 때 학자라기 보다는 교육 관료였으며 그의 연구 결과물들도 역사학자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교육 관료로서 그가 취했던 정책적 소신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교육관료였던 탓에 그가 제창한 당파성론이 교육현장에서 꽤 적용되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도 상당 수 대중들은 부지불식간에 당파성론의 시각에서 조선 후기 역사를 바라보고 있고 탕평책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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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 논리가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시데하라 다이라"의 당파성론 역시 조선이 망할만 해서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켜 놓고는 조선이 멸망한 건 조선 탓이라는 거다.
때린 놈은 죄가 없고 맞은 놈이 잘못이라는 엉터리 논리인데 피동적으로 당한 것은 주어가 될 수 없다. 조선이 스스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켰고 그 이유는 조선의 사정이 어찌되었든 일본이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러니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찾아봐야 자학 외에는 답이 없다. 일본이 어떻게 조선을 강제병합 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 봐야 한다.
호라즘 왕조와 중동, 동유럽 지역이 몽골에게 망했던 이유는? 그 당시 몽골이 그렇게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된 것 뿐이다.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서 정복했다면 그 이유가 지구인에게 있을까? 외계인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가 뭘 잘못해서 신이 우리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교훈을 찾을 수는 있어도 멸망의 이유를 멸망 당한 당사자에게 찾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는 것이다.
"당파성론"은 곰곰히 따지고 생각해 볼수록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런데 그 허접한 이론이 우리에게 은근히 먹힌다는 것이 문제다. 식민사관의 여러가지 이론들 중에서 특히 이 "당파성론"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도 꽤 내면화 되어 있다. 특히 정치에 관심 없으며 국회에서 시끄럽게 싸우는 꼴이 보기 싫다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 당파성론을 꽤 선호하는 양상이 된다.
맞은 놈이 잘못이라는 논리도 엉터리이지만, 조선이 허약해진 원인을 진단한 것도 엉터리다. "당파성론"은 붕당정치를 지목했지만 정작 조선이 19세기에 민란의 시대에 접어들 정도로 허약해진 원인을 정치적인 면에서 따져보자면 원인은 붕당 정치가 아니라 세도 정치 때문이다. "당파성론"에 따르면 붕당정치가 없어진 세도정치 시절에 조선은 더 강해져야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당파성론"은 붕당정치에 그 원인을 돌렸다. "당파성론"은 붕당정치가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으며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둘은 양립할 수 없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증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면 안동김씨가 등장할 수 없다. 노론과 남인이 서로를 견제하던 시절에는 외척이 정치 권력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파성론"이 조선의 멸망 원인을 엉뚱한 붕당정치로 돌린 것은 천황을 섬기면서 막부가 통치했던 일본의 이원적 통치 방식이 세도정치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도정치로 조선이 망했다는 소리는 일본인 입장에서는 할 수가 없다. 붕당정치와 세도정치를 대충 퉁치는 것으로 얼버무린다. 조선 중기에 이미 정당정치를 해 본 경험이 있음에도 부정적인 것으로 왜곡된 것이다.(일본이 무늬만 민주주의인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분명히 있다)
"당파성론"의 논리라면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된 분열의 붕당정치를 해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한 영/정조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흔히 영/정조가 나름 붕당정치를 없애고자 하였으나 결국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정조 사후에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 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조와 정조의 집권 기간은 도합 80년 정도가 되는 꽤 긴 세월이다.
80년 동안 시행된 정책이 아무 효과를 못 봤다면 정책을 추진한 세력이 엄청나게 무능했거나 저항세력이 지독할 정도로 엄청나게 강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아무리 무능했다고 해도 세대를 넘어서 시행된 정책이 정조 사후에 아무런 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조선이 곧바로 망국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세대 동안 시행된 정책의 결과는 세도정치의 등장과 붕당정치의 종결이다. 붕당 정치를 해소하려는 면에서 영/정조는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그 결과인 세도정치는 국가 시스템을 총체적인 난국으로 올려 놓았고 민란의 시대로 돌입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러한 흐름을 놓고 보면 영/정조는 조선을 망국 코스에 올려 놓은 초석을 세운 장본인이다. 그런데 식민사관인 "당파성론"에 따르면 조선은 분열의 정치 때문에 망한 것이 되어야 하니 탕평책으로 대표되는 영/정조는 한계를 넘지 못한 개혁 군주로 포장되고 정조 사후 자세한 설명 없이 세도 정치의 등장으로 조선이 몰락했다는 어물쩡한 도식이 제시된다.
정조가 훌륭한 군주로 평가될수록 역으로 조선은 자체적으로 개혁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로 하향 평가될 수 밖에 없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극이나 역사 교양서에서도 드라마틱한 정조의 일대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세도 정치의 등장에 대한 부분은 잘 다루지 않는다. 과연 영/정조가 휼륭한 군주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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