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측이 지원한 전쟁 패배 시,
통상, 패배 원인은 전쟁 당사자의 몫이 된다.
국공내전은 국민당의 부패가 원인이고,
월남전은 월남의 무능이 원인이라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연한 말이다.
가장 큰 책임은 목숨이 걸린 당사자에게 있다.
본인 목숨을 본인이 지켜야지 누가 지키는가?
외부에 목숨을 맡기는 건 결국 바보짓이다.
하지만 미국이 참여했다면,
미국이 퍼주기 자선사업을 했을 리 없고,
분명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을 것이다.
패배에 미국의 몫이 전혀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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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던 상식으로는,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의 무능에 방점이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항은 몰랐다.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어 본 기억으로,
당시 상황에서 국민당은 무능 할 만 했다.
삼국지처럼 군벌들이 지방을 장악했고,
중일전쟁으로 세상은 난세였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넓은 대륙을 장악했고,
나름 그 정도면 분명 유능한 세력이었다.
국민당이 통일 중국을 차지할 수도 있었고,
거의 그렇게 될 뻔 했었다.
만약 외부 요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역사에서 그런 가정은 의미없다.
하지만 외부 요인은 실제로 분명 있었고,
그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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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살펴 보면,
1941년 4월 일/소 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소련은 중국의 대일항쟁 지원을 중단했고,
뒷통수를 정리한 일본은 12월 진주만을 친다.
독일과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5년 2월에,
크림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정상이 만난다.
독일 4개국 분할 점령 원칙을 세웠으며,
그 외 짝짝꿍 맞추며 밀약들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짝짝꿍을 맞춘 내용 중 하나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이고
대가는 사할린/쿠릴열도 할양이었다.
하지만 추가 옵션이 있던 모양이다.
오키나와에서 큰 손실을 입었던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 시 엄청난 피해를 예상했고,
태평양 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원했다.
이에 스탈린은 남는 장사를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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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얄타에서 꿍꿍이를 맞춘 후,
4월 소련은 미국의 중국 주도권을 인정하며,
장개석에 의한 중국 통일을 지지하고,
중국공산당을 원조하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같은 해 7월부터 한달 반의 협상을 거쳐,
소련의 선전포고 5일 뒤인 8월 14일에,
스탈린과 장개석은 중소 동맹조약을 맺는다.
모택동에게는 X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스탈린/장개석 동맹의 중요 내용은,
소련: 국공내전 중립,만주는 중국땅 인정
중국: 외몽골 승인, 소련의 만주 이권 보장
등이었다.
얄타에서 미/소 가 그러기로 했고,
미국의 압박에 장개석이 굴복했다.
장개석은 만주 일부를 소련에 넘겼고,
대신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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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항복하던 1945년 8월에,
미/소는 장개석/모택동을 쪼아서 휴전시킨다.
스탈린 지시로 모택동은 적진인 충칭에 갔고,
몇 달 협의 후 10월10일 정전협정을 맺는다.
정전협정을 맺은 바로 다음 달에,
국민당 군대는 만주 대도시들을 점거한다.
소련군은 도시에서 중국공산군을 쫓아냈다.
중국공산군은 흩어져 일부는 북한으로 갔다.
이듬해 1946년 3월,
소련군은 중국 주권의 만주에서 철수한다.
그러자 국민당은 중국공산군을 공격한다.
몇 개월 만에 공산군은 하얼빈까지 쫓긴다.
국민당 군대는 공산군을 추격하였으며,
하얼빈 남쪽으로 48km 까지 진격했다.
중국공산당은 바람 앞에 촛불 신세였다.
그 순간에 장개석은 진격을 중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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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은 중국공산당을 괴멸시킬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을 살려 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진군 진행 시 수송기 제공 중지 및,
경제 원조 무효로 장개석을 압박했다.
적진 깊은 곳에서 기회를 놓치면 위험하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미국 압력에 굴복한다.
이에 1946.6.5 보름 간 휴전이 맺어진다.
장개석은 땅을 쳤을 것이다.
1945년 8월 스탈린/장개석 동맹협정은,
미국 병풍 둔 소련의 중국 삥 뜯기였다.
대신 소련군은 중국공산당을 쫓아냈다.
그리고 약속대로 만주에서 철수했다.
하얼빈은 소련 국경 코 앞이다.
혹시 소련 땅에 폭탄 떨어지면 낭패다.
소련은 할만큼 했는데 이러다 일 난다.
미국은 장개석을 말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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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6.5 휴전 종료 이후,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고분고분 않았고,
미국은 장개석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1946.7. 쿤밍에서 민주주의 인사가 암살된다.
국민당은 미국 유학 교수 2명을 암살했는데,
이 사건으로 국민당과 미국 관계는 악화된다.
미국의 지원이 늘어날 리 없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멈추지 않았다.
1946.11 남경 국민대회로 헌법을 만들고,
1947.03. 중국공산당의 핵심인 연안 점령 후
4월 국민당 주도의 연립정부를 출범한다.
이 시기 아시아 지도자들이 다들 그렇듯,
장개석도 독재자였고 미국과 마찰을 빚었다.
미국은 장개석을 괘씸하게 여겼던 듯 하고,
나름 장개석을 길들이려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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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장개석 버르장머리 고치기는,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은 모양이다.
1947년 3월 연안이 점령되었지만,
7월 공산군이 황하를 넘어 남진한다.
1948년 8월 여름, 이승만 정부 수립 시절,
공산군은 라오션 전투로 만주를 장악한다.
겨울 지나 1949.01 서주(쉬저우)를 장악하고,
1949.04. 양쯔강 건너 남경을 점령한다.
급기야 5월 공산군이 상해를 점령했고,
8월 에치슨 국무부는 "중국백서"를 발표한다.
백서는 패배를 국민당 부패/무능으로 돌린다.
즉, 미국은 국민당 손절을 공식화 했다.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10월 3일 소련은 중화민국과 단교한다.
국민당 군대는 대만 도피 또는 투항했고,
1949년 12월 10일 국공내전이 종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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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입장에서 볼 때,
소련 나와바리 만주 중국공산당은 괜찮다.
황하 이남 미국 나와바리를 넘는 건 위험하다.
그러다가 미국이 의심하면 큰일이다.
소련은 계속 장개석과 외교를 유지했다.
미국이 장개석을 손절해도 유지했다.
"중공" 이 선포되어도 이틀 더 유지했다.
게다가 "중공"과 바로 수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이런 행보를 보면,
스탈린도 분명 모택동을 통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얼라가 아닌 모택동이다.
결과를 보면 모택동도 통제 되지 않았다.
1945년 8월 장제스/스탈린 동맹과,
붉은 군대가 중국공산군을 쫓아낸 걸,
모택동 자신은 처절히 경험했을 것이다.
모택동이 과연 스탈린을 신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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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신중국 선포 후 모스크바로 간다.
스탈린은 모택동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모택동을 홀대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바짝 엎드렸다.
스탈린은 모택동 제어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 통제에 실패한 모양이다.
미국 동의 하에 장개석과 만든 판이 깨졌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건국 시점에 모택동이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70일을 모스크바에서 소모한다.
인내 끝에 중소우호동행조약을 맺으며.
장개석의 약속을 뒤집는 성과를 쥔다.
스탈린이 무력으로 만주를 칠 수도 없었다.
괘씸하지만 모택동이 미국에 붙으면 답 없다.
결국 소련은 만주의 이권을 다 포기한다.
뤼순기지는 스탈린 사후 중국에 반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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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패배를 국민당의 부패로 돌렸지만,
사실은 미/소가 중국을 갈라 먹으려다가,
뻘짓을 거듭하며 닭 쫓던 개가 된 것이다.
세상 만사가 다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스탈린도 벙 쪘고 미국도 벙 쪘다.
하지만 미국은 모택동에 대해 오판 한다.
"중국백서"로 모택동에 추파를 던졌고,
에치슨 라인의 대만 제외로 러브콜을 던졌다.
스탈린은 모택동이 친미 할까봐 걱정이었다.
미국은 모택동에 은근히 추파를 던졌다.
모택동은 미/소 사이에서 이익을 챙겨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터졌다.
얄타회담을 냉전의 시작으로 본다고 하는데,
국공내전과 이후의 한국전쟁을 보고 있으니,
간 보는 국공내전이고 선 그은 한국전이었다.
한국전쟁은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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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소련 눈치 보며 장개석을 길들이려다,
초가삼간을 공산진영에게 홀랑 넘겼다.
김일성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미국 아새끼들....맹탕 이구만..."
결과적으로 오판이었지만 그럴만 했다.
예민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결국 내질렀다.
그러나 미국은 뻘짓을 반복하지 않는다.
미국은 북한의 침공에 강경히 대응한다.
맥아더가 청천강에서 멈췄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는 중국이라도 쳐들어갈 기세였다.
내가 모택동이라면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과 중국 간 개싸움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중/미를 소모 시켰고,
모택동이 미국에 붙는 상황을 막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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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장개석과 스탈린의 동맹 시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고 쫓아냈다.
공산당끼리 이럴 수 있냐는 항의가 있었지만,
스탈린에게 소련의 국익이 더 우선이었다.
스탈린은 의심많고 잔인한 독재자이지만,
영리했으며 영리한만큼 겁도 많았다.
그는 미국과의 충돌을 회피로 일관했다.
미/중 전면전에 미국을 때릴 바보가 아니었다.
만약 스탈린이 살아 있었다면
미/중 간 소모전으로 누군가 발 뺄 때,
당시 상황을 봐 가며 이익을 챙겼을 것이다.
훗카이도나 만주 또는 북한 해안을 먹었을 듯
하지만 1953년 3월 스탈린은 수명을 다했고,
스탈린 사망한 그 해 7월 휴전이 성립했다.
전쟁을 원한 것은 스탈린과 이승만이었다.
스탈린은 사망으로 제외, 이승만은 그냥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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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들은 "나무위키"를 살펴보고,
링크 내용까지 찾아보고 알아낸 것이다.
찾아보면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아는 이들은 주변에 없다.
내 자신의 언어로,
위의 내용을 다시 써 본다.
공산주의/자본주의 구도가 익숙하지만,
1945년 당시 그런 구도는 없었다.
소련은 미국을 존중했고 (겁냈고),
미국도 소련을 존중했다. (겁냈다)
스탈린은 의외로 약속을 잘 지켰고,
특히 강자와의 약속은 더욱 그러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중화민국을 존중했고,
미국도 스탈린을 자극하지 않았다.
미/소는 눈치보며 상호 협의하에,
만만한 놈을 털어 먹기로 했다.
하지만 서로 체면 세워 주다가,
엉뚱한 나가리 판이 되었다.
미국이 국민당을 탓할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버릇 들이려 했더니 그냥 뻗었네?
으이그...이 국민당 병신들아....
스탈린도 뻘줌해 졌다.
내가 배후라고 미국이 의심하려나?
모택동 저걸 씹어 먹을 수도 없고,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저거 믿을 수 있나?
이것이 국공내전 과정 및 결과다.
미국은 빙다리 핫바지가 되었고,
소련도 애매하게 병신이 되었다.
신생 중국은 표정관리 잘 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이 뛰었다.
망둥어 뛰고 꼴뚜기 뛰고 난리다.
미국은 또 등신이 될 수 없었다.
미국은 선을 긋고 줄을 세웠다.
세계 대전 이후 또 전쟁이다.
못 끼었던 애들이 몰려들었다.
전후 질서에 숟가락 올릴 찬스다.
미국 줄에 16국이 섰고 피 흘렸다.
모택동은 표정 관리 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이 허락치 않았다.
이러다 미군이 압록강 건너면?
선은 그어졌고 선택해야 했다.
당시 장개석은 참전을 원했다.
미군 끼고 만주로 들어갈 찬스다.
중공은 전선 확대를 막아야 했다.
이래저래 참전할 수 밖에 없었다.
모택동의 국공내전 승리는,
미/소 어리버리 짓에 운이 따른 것.
행운에 대한 청구서가 날라 왔다.
모택동은 목숨 100만을 지불했다.
중국은 항미원조 전쟁이라 하지만,
건국 1차는 내부 승인 국공내전,
건국 2차는 외부 승인 한국전.
중국은 한국전으로 견고해졌다.
전 세계가 두 줄로 나뉘었다.
대전 후 새로운 질서가 나왔다.
한국전으로 냉전이 출발했다.
나중에 인도가 다른 줄을 세웠다.
대전 후 질서는 한반도에서 나왔다.
한반도에서 흘린 피로 세운 질서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났다지만,
우리는 여전히 냉전에 살고 있다.
새삼 88 올림픽이 새롭게 보인다.
80년/84년 2번의 반쪽 올림픽 후에
동/서 모두 모인 올림픽이 88 이었다.
냉전의 고향에서 열린 올림픽이었다.
그리고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91년 소련 쿠데타에 소련 해제
냉전의 고향에서 열린 올림픽 이후
냉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2025년 우리는,
여전히 냉전에서 자유롭지 않다.
베를린은 피 흘리지 않았지만,
이곳은 피로 넘쳤기 때문이다.
이 곳의 피값은 언제 청산되려나?
통일비용이 아무리 비싸봐야,
목숨값 이상 되지는 않을 터.
내 생전에는 청산 되려나?
PS :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썰이 있다.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 미국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대한 대처가 그야말로 등신 수준이었다. 등신 미국이 치밀하게 김일성의 남침을 유도할 역량이 있었을까? 다만 미국이 등신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전제라면 역으로 남침을 유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정지해 있다면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어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PS : 이것 저것 찾아보니 위 글 작성한 후 3일 후 연합뉴스에서 나온 서평(?)을 찾을 수 있었다. 한반도가 냉전의 고향이라는 내 생각과 맞닿은 내용을 예일대 교수가 썼었나 보다. ( "가장 소름 끼치는 충돌…'한국전쟁'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 연합뉴스 ) 책의 저자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고 강조했다는데 과연 그럴까? 미/소 양측은 굳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예일대 교수라는 저자 역시 미/소가 중국을 만만히 봤던, 아니 세상을 만만히 봤던 오만함에서 자유롭지 않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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