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IMF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어느 평론가가 IMF 영향이 오랫동안 (거의 준영구적으로) 대한민국에 미칠 것이라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IMF 차관을 상환하는 것으로 IMF를 극복했다지만 IMF 이전의 경제구조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경제 구조는 IMF 구조금융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큰 충격이 없는 한 이대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사를 논할 때 1998년 IMF 사태를 매우 중요한 변곡점으로 서술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훗날 역사가들이 지금까지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한민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대통령을 꼽는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선택될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정치 상황에는 노무현이 시발점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모든 것은 노무현 세력과 반노무현 세력 간 대립의 연속이다. 정치 진영을 어떻게 구분하든 지금까지의 모든 현상에는 노무현이 존재하며 통일한국이 등장까지 아니 어쩌면 통일한국이 등장한 이후에도 노무현의 영향은 지속될지도 모른다.
장담컨데, 윤석열 탄핵 반대 시위 참여자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있다 해도 현 시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물어본다면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내 주변에서 "국민의힘" 당을 지지하는 소위 보수 성향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 노무현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좋아서 지지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을 싫어 하다보니 보수 성향으로 구분 되었고 지지할 정당은 "국민의힘" 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어떻고 경제 정책이 어떻고 하는 건 다 핑계에 불과하다. 시작은 그저 노무현이 싫었을 뿐이다. 노무현이 싫은 세력들은 정치이념이 뭐가 되든 반노무현이기만 하면 되었다. 현재 강남3구는 "국민의힘" 지지가 절대적이지만 전두환 군사 독재 시절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은 야당이었다. 이후 여당 지지세가 점점 강해지긴 했지만 강남3구가 "국민의힘" 철옹성이 된 결정적 계기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 관련 정책이었다.
옛날 드라마인 "모래시계"에서 안기부 간부가 중산층 강남에서 정권 지지세가 약했다는 내용의 대사가 있었다. 먹고 살만한 동네에서 민주화 경향이 강했다는 의미였다. 경제개발이 되면 민주화 사회로 이행된다는 인식이 강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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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역대 어느 대통령과 달랐던 점은 그가 주류 세력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학벌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부산 지역에서 나름 민주화 운동을 했다지만 대학생이었던 적이 없어서 학생 운동 세력과는 인연이 없었다. 변변찮은 집안에 태어나 상고를 졸업하고 전방 소총수로 만기 전역 후 노가다 판을 전전하다가 덜컥 사법 시험에 합격하는 것으로 어쩌다가 팔자가 바뀐 "개천에서 난 용"에 불과했다.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자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우월성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사례로 꼽혔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성공을 넘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주류 세력이 되는 첫번째 방법은 등급이 높은 대학을 가서 지성인이라 불리는 세력의 일부가 되어 그 곳에 족보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족보 올려 놓고 고시 통과 후 관료 코스를 거치든가 일반 회사에 입사해 임원에 오르든가 아니면 유학으로 해외 네트웍을 갖추든가 해야 한다.
박정희도 당시로는 등급이 높은 학벌을 가졌고 상당한 부침은 있었지만 "소장"이라는 고위급 인사가 된 상태에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12.12 쿠데타 세력들도 군인 중에서는 나름 최고 등급 학벌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이 장성이 되고 난 후 결행한 것이었다. 이들과 대척점에 선 학생 운동 세력도 가장 높은 등급의 서울대 학생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세력도 주류는 서울대 출신 학생이었다.
약간의 의혹이 있지만 김영삼도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었다. 김대중은 목포상고 출신이지만 당시 상고는 엘리트 코스에 속했고 김대중은 졸업 후 해운회사를 경영하며 정치단체에서 나름 활동을 전개했던 명망가였다. 또한 정권을 상대로 오랜 투쟁을 하며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클래스가 되었다. 경제계는 이런 면이 덜했지만 소학교 졸업 정주영보다는 와세다 대학 출신 이병철이 은근 주류 대접을 받았다. 만약 정부가 현대와 삼성 두 회사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살려야 했다면 삼성을 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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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으로 반대 위치에 있었더라도 주도적 위치를 점한 세력들은 나름의 족보가 있다. 그 족보에 끼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높은 등급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고 집안 형편도 어느 정도 받쳐 줘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족보에 이름을 올려야 했는데 그래봤자 방계 취급을 받는다.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서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발버둥을 친다.
노무현은 그 족보에 끼지 않은 이질적인 지도자다. 세속적 성공을 달성한 자수성가 인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끝내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이 방계라도 주류 세력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면 명망 있는 정치가로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결코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곧 죽어도 주류 세력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대통령 재임 시절 많은 공격을 받았다.
노무현은 최고의 주류 코스를 거친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올랐다. 당시 주류 세력에게 노무현은 말도 안 되는 깜이었다. 족보로 연결되는 것이 없으니 주파수를 맞출 수가 없었다. 당시 노무현이 할 수 있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원칙대로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복잡하고 이해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상식과 원칙이 그대로 통할 리가 없다. 그의 개혁정책은 엄청난 반발과 잡음을 일으켰다. 그냥 가만둬도 될 것인데 사방에 벌집을 쑤신 듯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의 노무현은 주류 세력과 불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노무현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을 끌여 들였기 때문이다. 아니 노무현이 대중을 끌여 들인 것이 아니라 대중이 노무현에게 끌려 들었다. 그의 당선 자체가 대중의 힘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당시 정치공학적으로 불가능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것도 이전에 없던 대중의 적극적 참여 때문이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주류 세력이 대중을 이끄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주류 세력은 노무현을 포풀리스트로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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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귀족 원로원이 주류 세력이었다. 카이사르는 대중을 끌여 들여 원로원을 꺾고 권력을 장악했다. 통제되지 않는 대중이 주도권을 쥐면 로마가 멸망할 것은 염려한 귀족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만다. 그러나 결국 흐름을 꺾지 못했고 결국 대중을 등에 엎은 황제정이 출현하게 된다.
대중을 불신하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남성집단의 축소 샘플인 군대에서 생활 해 보면 이 세상에는 별별 희안한 놈들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런 놈들이 모두 다 나서서 중요한 국가적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프랑스 혁명은 왕이 어설프게 대중을 끌어들여 귀족을 견제하려다 대중이 폭발하여 국가 시스템 그 자체가 무너져 버린 사례다. 언제나 대중은 위험하며 폭주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대중은 노무현을 통해 집결하여 국가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그 이전에도 1인 1표 다수결 투표를 통해 대중이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긴 해 왔다. 그러나 노무현 이전에는 주류 엘리트들이 대중을 이끌어 가며 민의를 결정해 왔다. 대중은 주류 세력이 내 놓은 여러 방안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정치적 방안을 내 놓는 과정은 주류 엘리트 세력의 몫이었고 대중은 참여할 수 없었다.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를 "참여정부"로 정한 것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주류 엘리트에 속하지 않았던 노무현은 대중에게 의지하여 권력을 유지했고 그것은 당시 주류 엘리트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반칙이었다. 온갖 일에도 대중과 토론하고 협의해야 하니 어지러운 세상이 온 것이었다. 각 분야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던 세력들은 노무현 정부에 협력하지 않았다. 당시 민노당조차 참여정부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잡음이 일었고 변덕스러운 대중은 지지를 철회하고 노무현을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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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반노무현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뒤엎는 내란을 옹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2년의 그들이 지금의 상황을 접했다면 아마도 대다수는 윤석열의 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노무현 노선을 거의 20년 가깝게 걸어오다 보니 모든 것이 뒤죽 박죽 되었다. 주류 세력이 가장 경계하던 대중의 폭주가 오히려 반노무현 세력에게 나타난 것을 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들은 안티테제에 눈이 멀었다.
반노무현 세력은 경제계 주류 엘리트의 전형인 고려대 출신의 성공한(?) 샐러리맨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올렸고 연이어 주류 세력을 넘어 그야말로 공주님이라 할 박근혜도 대통령으로 올리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집권 이후 역대급 무능을 보이며 외교까지 개판을 쳤고 결국 탄핵되어 대통령직에서 끌려 내려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반노무현 세력으로 결집했던 기존 주류 엘리트 세력의 처절한 실패였다.
박근혜가 중국에서 오성홍기를 흔들지만 않았어도 탄핵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은 복잡하며 그러기에 상식 외의 세계가 필요할 수 있다. 대통령이 도움을 받기 위해 남 모르게 비선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탄핵 되기에는 충분한 꼬투리다. 박근혜가 탄핵되어야 했던 진짜 이유는 외교 파탄이였고 탄핵이 실행 가능했던 것은 박근혜의 지속적인 무능으로 여당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지지 기반이 취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권성동을 비롯한 여당의 일부 세력과 야당이 합작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노무현 세력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끌어 올렸다. 문재인 정권은 나름 유능했지만 진보/보수 양쪽에서 두들겨 맞았던 노무현 시절의 경험 탓인지 진보 좌파 세력에게 끌려 다녔다. 특히 당시에는 북미 간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북한과 의사소통을 해야 했고 아마도 종북좌파라 불리는 세력이 국정원과 협력했을 것이다. 주 52시간 및 최저 임금의 갑작스러운 상승도 그런 영향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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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노무현 세력은 박근혜 탄핵으로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며 오히려 결집한다. 이념이고 논리고 다 필요 없었다. 반노무현 노선이기만 하면 되었고 연장선에서 반문재인, 반이재명이면 되었다. 그렇게 결집 될수록 기존 엘리트 주류 세력이 아닌 새로운 세력이 구심점으로 등장하며 대중이 전면에 등장한다. 미워하면 닮는다더니 반노무현 세력에서도 대중이 나서게 된다. 노무현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반노무현 세력은 안티테제로 결집하다 보니 장님이 되었다. 박근혜를 구속 수사하고 기소하여 감옥으로 보낸 장본인인 윤석열을 영입하여 대권 후보로 세웠고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 시켰다. 실제 벌어졌던 상황만을 보고 판단하자면 그들에게 박근혜는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박근혜 지지는 그야말로 쑈에 불과했으며 그들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그저 반대하는 것에 있었다. 그렇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다보니 눈이 멀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박근혜를 잡아 쳐 넣은 주역을 그들의 대통령 후보가 옹립할 수 있나? 훗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역사를 배울 때 이걸 이해 할 수 있을까? 옛날 사람들은 이상했었구나 여길 것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은 어쩌다 보면 그렇게 된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운 것도 있지만 지금 현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증오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인 것이다.
당시 나는 반노무현 세력이 자기 부정적인 결정으로 윤석열을 대통령 후보로 내 놓았으니 당선이 될 리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기어코 당선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노무현 정서는 반이재명 정서로 변화했다. 노무현과 마찬가지로 이재명도 개천에서 난 용이었고 그 역시 주류 세력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독고다이였으니 만만해 보였고 만만하니까 죽이려 들었다. 반노무현 세력은 죽고 없는 노무현을 대신해서 이재명을 안티테제로 삼았다. 이것 또한 다 노무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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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되는 쿠데타 현장을 TV로 모두 목도 했다. 그럼에도 반노무현 세력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엘리트 주류 계층이 대중의 직접 개입을 염려한 이유를 실감했다. 엘리트 주류 계층으로 정통 보수라 불리는 조갑제옹이 윤석열의 탄핵을 찬성한 것은 이상하지만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주류 엘리트 입장에서 볼 때 윤석열의 계엄은 말도 안되는 짓이지만 더욱 말이 안 되는 건 대중이 개입하여 폭주하는 사태이다.
노무현이 대중을 끌여 들였듯이 윤석열도 대중을 끌어 들였다. 반노무현 세력이 대중들을 안티테제로 결속했던 부작용은 심각하다. 보수 진영에서도 엘리트 주류 세력의 공간은 없어졌고 지도적 위치를 사이비 교주나 함량미달의 선동꾼들이 꿰어 찼다. 대중을 믿지 않고 혐오하던 귀족 엘리트들이 열심히 반노무현 정서를 전파하며 세력을 결집했던 결과는 결국 그들의 생각한 대중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뿌린대로 거두는 모습이 되었다. 이것 또한 노무현 때문이다.
대중의 전면적 등장이 대한민국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트럼프 역시 기존 미국 정치 세력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대중의 적극 엄호로 권력을 획득했고 심지어 낙선 이후 재선에 성공했다. 노무현 이후 미국의 트럼프도 대중을 끌여들였고 국힘당은 윤석열이 대중을 끌여 들였다. 조만간 미국의 민주당에도 대중이 끌려 들어갈 태세다. 전통적인 엘리트 주류 세력이 그토록 염려하던 어지러운 세상이 활짝 열리게 생겼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노무현이 의도했든 안 했든 다 노무현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검찰은 어떻게 하든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 안 되었다. 노무현이 죽지만 않았아도 이렇게까지는 간극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두가 노무현의 영향력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살아오면서 죽은 자의 영향력이 이렇게나 크게 퍼져 나가는 건 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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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직접 정치에 등장하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투표를 통해 주기적으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을 뿐 그 중간에 대중이 정치 사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끼어 들 수는 없다. 주류 엘리트 세력은 대중의 참여를 굉장히 싫어한다. 요즘은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 개입을 "광장 민주주의"라고 하는 모양이다. "대의 민주주의"의 반대말로 사용되고 있는 듯 하며 이에 대한 주류 엘리트 세력의 반감은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따르면, 대중이 결집하여 시위해 봤자 사법부의 판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야 한다.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지만 사법부의 고유 권한에 대해 개입하겠다는 대중의 의도 자체는 사법부 입장에서는 위협적이다. 의사 표명 자체도 괘씸한데 대중이 폭주하여 법원에 난입하여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심각한 체제 부정이다. 주류 엘리트는 대중을 언제나 폭주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여긴다.
1987년 6월 항쟁도 광장 민주주의의 승리였지만 영화 "1987"에서 나왔듯 정권에 대한 주류 엘리트 세력의 반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 대중은 자체 역량으로 광장 민주주의를 경험 했으며 이명박 정권 때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대중은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 심지어 박근혜 탄핵 때 "촛불집회"로 피플파워를 과시하며 드디어 현직 대통령을 끌어 내렸다. 대의 민주주의 주체들이 대중의 피플파워에 굴복한 것으로 비춰졌다.
대중은 "광장 민주주의"가 동작 가능함을 경험했다. 너 하나 나선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만 막상 나서 보니 세상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전에 없었던 물적 토대로 이것이 가능해졌다. "광장 민주주의"의 원흉은 노무현이 아니라 인터넷이었다. 정보 유통 경로의 변화로 인해 대중이 자력으로 나설 수 있었고 하필 그 당시 정치인 중 대중이 결집하기 좋은 서사를 가진 인물이 노무현이었다. 어느 외신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 시 그를 인터넷 대통령이라 평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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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노무현 세력에서 대중의 폭주가 나타난 것은 "광장 민주주의"가 동작할 수 있는 환경을 그들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신기술을 진보좌파가 먼저 써 먹고 신기술이 성숙되면 이 후 보수우파도 써 먹는다. 초기 인터넷은 게시판 만드는 것도 번잡했지만 지금은 유튜브 채널만 개설하면 된다. 반노무현 세력은 결집 수단으로 "광장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물적토대를 활용했고 이에 보수우파 진영에서 "광장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를 위한 반대로 결집했던 대중들은 폭주했다.
윤석열은 보수우파 버젼의 노무현이다. 노무현을 좋아했다는 그의 말이 빈말은 아닌 듯 하다. 그 역시 지지율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자신의 국민들을 위해 뚜벅 뚜벅 걸어갔으며 대중을 직접 끌여 들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주류 엘리트 세력이 걱정한대로 "국민의 힘"의 중진 국회의원들이 태극기 집회에 나가 전광훈에게 굽신거리며 굴복했으며 흥분한 군중은 서부지검에 난입했다. 조갑제옹이 윤석열을 보수를 참칭한 반역자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광장 민주주의"를 배격하고 이전의 "대의 민주주의"를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까? 만약 복원한다면 그것을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인 "광장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이것이 세계의 희망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노무현이 "깨어 있는 시민"을 외쳤던 것이 새삼스럽다. "광장 민주주의"의 성공 여부는 대중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양쪽 진영이 "광장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효용을 경험했으니 어느 쪽도 "광장 민주주의"를 폐기 처분하지 않을 것이다. 피하지 못할 것이라면 즐길 수 밖에 없다. 쌍방이 공존 가능한 "광장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 외에 답은 없어 보인다. 이전의 "대의 민주주의" 회귀는 오히려 퇴행이다. 지난하고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절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선두에 섰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이 고생을 하게 된 것이 다 노무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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