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이한우', 출판사는 '해냄'

영문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조선일보 기자가 10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탐독하고 써 낸 군주열전 중 마지막 시리즈이다. 군주열전 외에 공자와 논어에 관련된 책도 쓰고 역사에 관련된 번역서도 몇 권 낸 것으로 보아 아마추어 역사학자 치고는 나름 공부를 해 본 양반인 듯 하다.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무척 산만하고 장황하다. 뭔가 잔뜩 써 놓기는 했는데 읽기 쉽지 않고 그다지 재미도 없다. 읽어 나가다가 손 놓고 다시 읽어 나가다 손 놓기를 꽤 반복하다 보니 완독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신문에서 주말마다 특별 섹션으로 연재되던 글들을 엮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용과 관계 없이 그리 잘 쓴 책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세도정치가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 출발점이 궁금했었지만 관련 시대 전공자들은(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대중들에게 거의 입을 닫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세도정치가 등장하기 직전의 시대를 통치했던 정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담은 출판물은 이 책의 거의 유일했기에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읽어 보았다.

그렇게 의무감으로 읽어 보았는데 재미도 없고 내용도 신통치는 않다. 책을 완독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 아마추어 저자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가 다루는 정조의 시대가 그렇게 산만하고 장황했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어지간한 필력과 지식이 없으면  정조 시대를 다루기는 꽤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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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영조)가 아들(사도세자)을 죽인 비극인 임오화변은 왠만한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건이다.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고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진 바가 없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자 영조는 직접 그를 친국하였고 국문 과정에서 나경언은 세자의 10가지 잘못을 논한 문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나경언이 제출한 문서는 전해지지 않으며 10가지 잘못이 무엇인지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나경언의 문서를 보고 영조가 세자를 불러 호통치는 내용이 기록에 남았기에 10가지 잘못 중 4가지만 알려졌을 뿐이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거짓이 아닌 진실로 받아 들였지만 어쨌든 나경언은 죽어야 했다)

첫번째로 거론된 것은 세자빈 박씨를 칼로 죽인 것, 두번째는 여승을 궁에 끌어 들인 것, 세번째는 서로역행이며 네번째는 북성유람이다. 영조는 10가지 잘못 중 4가지 과실만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라며 사도세자에게 호통을 친다. 세자빈 박씨를 죽이고 여승을 궁에 끌어 들인 것은 죄이지만 폐세자라면 모를까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야 하는 중죄인지, 그것으로 나라가 망할 죄인지는 갸우뚱해진다.  "서로역행"과 "북성유람"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6가지 죄목 중 사도세자가 죽어야 할 엄청난 중죄가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사관이 왕을 따라다니며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기록하였다고 알고 있으나 이건 조선 전기 때의 상황이었다. 몇 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실록에 나름의 체계와 형식이 갖춰지면서 중요한 내용들이 선택적으로 실리게 된다. 그런데 영/정조 때에는 그 정도가 아니라 왕권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기록을 아예 삭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경언의 알려지지 않은 6가지 죄목은 물론 영조가 언급했던 "서로역행"과 "북성유람"에 대한 정확한 내용조차 실록에 없다. (서로역행과 북성유람은 사도세자의 군사 쿠데타 시도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 정조가 영조에게 간하여 사도세제가 죽던 해의 "승정원 일기"를 통째로 없애 버린다. 이렇게 임오년의 승정원일기는 세초되어 없어진다. 그나마도 영조가 승정원 일기를 세초한 이 사실을 반드시 기록해 놓으라고 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는 있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정조는 당시의 기록을 반드시 사수해서 자신이 집권한 후 사도세자를 복권시키는 근거로 삼았어야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주도하여 임오화변 당시의 상세기록을 삭제해 버렸다. 이러니 임오화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지금은 그럴듯한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런데 정조의 시대는 전체적으로 다 그렇게 흘러갔다. 뭔가 명확하지 않고 석연치가 않다.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거나 신하들이 알아서 누락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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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손상된 공적 시스템의 붕괴 가속화

정후겸은 생선장수 정석달의 아들이었으나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와 궁에 들어오면서 정8품의 말직에 오른다. 2년 후 18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22살에 병조참판을 맡을 때에는 영의정 김치인이 정후겸을 '비변사 당상'에 추천한다. '비변사'는 오늘날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 나 '국무회의" 같은 최고 국가 의결기관이며 '비변사 당상'은 그 의결 회의에 참석하는 회원이었다.

'비변사'는 원래 군대와 관련한 의사결정을 보완하기 위한 임시적인 정치기구였으나 (3정승이 군 미필이라) 임진왜란을 통해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인조 이후 조선 후기에는 최고 정치 기구가 된다. 19세기에는 세도정치의 핵심기구가 되었으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의정부를 강화하면서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런 '비번사'의 멤버로 22살짜리 청년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영의정이 나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후겸이란 인물은 나름 총명하고 정치력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민한 인재라고 해도 궁에 들어오자마자 16세에 정8품의 관직에 올랐던 것은 영조의 총애 때문이며 이후 초고속 승진도 같은 이유에 연유한다. 영조는 당시 인사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급제도 유력 인사에게는 그냥 열려 있는 관문이었고 왕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인사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된다.

당쟁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이조정랑의 통청권(삼사 관원 인사권)과 자청권 (후임에 대한 인사권) 중 이조정랑의 통청권은 영조 때에 공식 폐기 되었는데 이는 탕평책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국왕을 비판해야 할 기구의 인사권을 국왕이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공적 시스템의 붕괴는 조선 중기, 특히 숙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정조는 사적 인연이 있는 세력들 (외척, 친인척)의 정치 세력화는 막았지만 여전히 공적 시스템이 아닌 사적 시스템을 키우려고 시도했다 정조의 업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규장각과 장용영은 나에게는 문무에 대한 정조의 사적 시스템 외에는 별 의의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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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최초의 세도정치

신하들을 바보 만들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간 군주는 숙종이었다. 숙종은 자신의 외가를 배경 삼아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 하는 변덕 신공을 부렸고 신하들은 그 변덕 신공에 죽을 힘을 다해 장단 맟추기에 바빴다.  영조는 출신이 한미했던 탓에 숙종처럼 자신감 넘치는 변덕을 부리지는 않았다. 영/정조를 태평시대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수량과 규모에서 가장 으뜸을 차지하는 역모 사건의 주인공은 영조이다. (한 때 안동을 제외한 영남 전체 유림이 역모에 가담한 적도 있다)

경종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심을 받았던 영조가 숙종처럼 변덕 신공을 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영조는 5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꾸준히 지속적으로 신하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정책이나 과정은 잘 모르지만 임오화변 이후 정조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세력들은 정치 이념이 아니라 각자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은 정치적 사상에 대한 논쟁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정조의 집권 과정에는 이념 논쟁이 없다. 벼슬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동일한 이해 관계를 가진 이들이 동분서주했고 영조는 그 움직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추를 기울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판에는 정치적 이념을 같이하는 동료가 아니라 이익을 공유할 친위 세력이 필요하다.

정조의 외가세력이 가장 큰 친위세력이 되어야 하겠지만 정조는 스승인 김종수의 영향 탓인지 집권 초기에 척신과 인척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두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외가세력은 임오화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작은 할아버지 홍인한 (비록 배다른 작은 할아버지였지만)은 아예 정후겸과 밀착하여 정조 즉위를 훼방 놓는다. 왕세손 시절의 정조를 보호하면서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친위 세력 중 대표자는 홍국영이다.

숙종과 영조가 신하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은 탓에 정치판이 이전투구가 되어 버렸고 그 덕에 왕권이 강화되기는 했으나 친위세력이 없으면 집권이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정치 세력이 공적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이념 집단이 아닌 이익 집단화 되었을 때 왕의 친위세력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 진행의 끝은 세도정치이다.

홍국영을 최초의 세도정치가로 보는 시선은 이런 면에서 꽤 의미심장하다. 홍국영은 정조의 집권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친위대였으며 정조 집권 후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홍국영은 후대 세도정치가 권력을 잡는 방식을 선구자적으로 개척해 나가는데 바로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여동생(당시 13세)을 정조의 빈으로 들여 보낸는데 그만 여동생이 궁에 들어간 후 1년 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홍국영은 여동생이 독살당했다고 간주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다)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도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별안간 홍국영은 사직을 청하고 정조가 이를 수락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후 홍국영에 대한 탄핵 상소가 올라오면서 홍국영을 유배 보내고 홍국영은 유배지에서 34세 나이에 사망한다. (홍국영은 정조 이후의 차기 대권을 구상하다가 발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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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친위대 양성

규장각을 정조의 업적으로 치는 사람들이 있다. 난 도대체 왜 규장각 설치가 왜 업적이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립했다. 원래 규장각은 숙종이 만들어 것으로 "규장각"이란 이름의 원 저자는 숙종이었다. 숙종이 세운 규장각은 역대 군주들의 시문이나 편지등의 문서들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전각에 불과했다. 즉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역할이었다.

규장각은 왕실 문서의 출납 업무를 맡으면서 정조의 비서실 역할을 수행했는데 정조는 집권 5년차에 초계문신 제도를 수행하면서 규장각을 정조의 사설 친위대 양성 기관으로 운영한다. 젊은 관료들 중 일부를 선발하여 3년 동안 규장각에서 별다른 업무 없이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하는 것을 초계문신이라고 하는데 이들 연구원들은 매달 두번의 구술고사와 한번의 필기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핵심은 정조 자신이 직접 강의도 하고 채점도 했다는 것이다.

이건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정조는 자신이 스승이 되어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심어주고 이를 친위세력으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정조 집권 내내 초계문신은 총 10차례에 걸쳐 138인이 선발되었다. 초계문신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약용(6차)이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김조순(4차)이다. 정조가 친위대로 양성한 인물이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를 열었던 인물이 된다.

책에 따르면 정조는 일찍부터 그 자신을 군사, 임금이자 스승,라 칭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가령 정조가 재위 16년 차에 성균관을 방문했다가 유생들을 무례함을 꾸짖을 때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군사의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 . . 요사이 그대들이 군주 앞에서 절을 하지 않으니 그 죄 어떠한가? . . . 대궐 뜰에서 담뱃대를 물고 다니면 엄히 다스려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냥 참아 두는 것이다. . .사도란 그렇게 엄한 것이니,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대권 뜰에 서 있게 하여 두려워할 바를 알도록 한 것이다"

요즘 말로 번역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들이 임금이자 스승인 나한테 제대로 인사도 안하고 버릇없이 아무데서나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말이야. 요즘 학생이란 것들이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어. 학생이면 학생답게 살라고 기합 한번 준 거다. 정신들 차려"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북쪽에 계신 양반은 "어버이 수령" 운운하면서 권력자와 아버지 캐릭터를 같이 해 먹었는데 정조는 권력자와 스승의 캐릭터를 같이 해 먹으려고 했다. 알고 보니 우리 역사에서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비슷한 권력 형태를 추구한 사례가 있었다.

규장각 출신의 초계문신들이 무엇인가를 해냈다면 규장각은 정조의 업적이라 할만 하다. 그러나 정조가 자신의 견해를 심어 친위대로 활용하려 했던 이들 중 고위 관직에 오른 상당수는 순조 때 세도정치로 위세를 부리거나 희생양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걷는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존속되었지만 초계문신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다.

 

청나라를 통해 최신 서역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시절, 당시 젊은이들이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에 끌렸던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북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상대적으로 기존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세력일수록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 중 명망이 높은 일부 인물들은 규장각과 인연이 있었으나 규장각의 설립의도를 살펴보면 그들은 주변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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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보수개혁군주?

정조 11년(1787년), 김조순은 궁에서 숙직을 하면서 청나라 베스트셀러 통속소설을 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걸 정조에게 딱 걸려 버렸다. 근무 중에 그런 책 좀 보면 어떨까 싶은데 정조에게는 그게 큰 일이었나 보다. 김조순을 파직하지는 않았지만 청나라 베스트셀러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고 김조순은 꾸지람을 들었다.

그 뒤 5년 뒤, 그 동안 청나라에서 유입되는 문서들이 꽤나 유행을 했던 모양이다. 성균관 유생 중 한명이 정조가 내린 제목에 응해 올린 글에서 패관소설체를 썼다가 처벌을 받는 일이 발생하였고 정조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들을 불러서 귀국할 때 패관문체로 된 책이 반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독할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닷세 뒤 무려 초계문신인 남공철이 국정현안에 대한 공문서에 패관문자를 인용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연히 정조는 남공철을 파직시킨다.

 

이 와중에 정조는 5년 전 김조순이 당직 근무 때 청나라 베스트셀러 소설을 봤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김조순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명한다. 김조순은 착실하게 정통 성리학 문체로 반성문을 써 내서 정조가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건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사상검열이다. 정조는 "성리학 근본주의자" 군주로 다른 사상들을 철저하게 부정한 독재자다.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의 첫째 장 제목은 "The medium is the message"이다. 정조는  18세기에 이미 "미디어가 메시지" 라는 것을 분명히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정조는 자신을 신하들의 군주이자 스승이라 여겼고 정통 성리학의 스승 입장에서 패관문체의 유행은 바로 잡아야 할 사회적 일탈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 반정은 개혁군주라고 여겨지는 정조의 보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이 와중에 채제공과 이가환을 탄핵하는 상소가 정조에게 올라온다. 이 상소를 쓴 홍문관 부교리 이동직은 (이 사람도 초계문신이다) 당시 분위기에서 정조에게 먹힐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가환을 탄핵할 때에 그의 문체를 문제 삼는다. 책에서 인용된 탄핵상소 중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이가환은  . . . 그런데도 그는 외람되이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 . . 방자하고 기탄 없는 것이 비록 그들이 늘 하는 버릇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인간의 수치스러운 일을 모르는 자 . . . 그들의 문장이라는 것이 학문상으로는 대부분 이단, 사설들이고 문장이래야 순전히 패관소품을 숭상할 뿐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경전을 언제나 별 쓸모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그들 문장은 문장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 .가환에게 성균관을 관리하다록 제수한 명을 아울러 환수하고 이어 사판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여 . . ."

이가환을 탄핵한 내용에 대해 정조의 답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역시 일부분만 발췌하였다.

"가환으로 말하면 . . . 백 년 동안 벼슬길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 알이나 꿰면서 떠돌이나 시골에 묻혀 지내는 백성 . . .어울리는 자들이라곤 우스갯소리나 하고 괴벽한 짓이나 하는 무리일 것 아닌가 . . . 그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짓이겠는가. 조정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나름 정조는 이가환을 두둔하였는데 이가환 입장에서 읽어 보면 좀 섭섭하지 않았을까? 평소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이가환에 대해 수레바퀴 깎고 염주 알이나 꿰었다는 정조의 평가는 묘하게 앞뒤가 맞으면서도 씁쓸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건설 일정을 획기적으로 앞당긴 것을 봤으면서도 정조는 신문물의 가능성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 듯 하다. 그래봐야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알이나 꿰는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문체반정에 대한 정조의 대책은 기존세력이 정도를 걸으면 신진세력도 자연스럽게 바른 길로 나가게 될 것이란 것이었다. 이것이 정조의 최대치였다. 그가 개혁군주였을까? 도대체 개혁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참고로 당시 이가환은 채제공의 뒤를 잇는 남인 사파의 차기 영수였다. 그리고 조선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고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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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준 - 친위세력의 실패

정조는 집권 18년 차에 화성 신도시 건설에 착수했고 정동준이라는 인물에게 홍국영에 버금가는 신임과 실권을 주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했다 한다. 정동준은 초계문신 출신으로 정조가 키우다시피 한 인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실록의 정조 17년/18년 기록에는 정동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같은 초계문신 출신인 정약용이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 당시 정동준을 까는 내용을 남겼다고 한다. 목민심서를 집필할 당시 정동준은 고인이 된지 꽤 오래 전이었는데도 굳이 고인을 까는 내용을 쓴 것을 보면 정약용은 정동준을 무척 싫어했던 모양이다. 내용을 발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무렵 정동준은 . . . 음흉하게 조정의 권한을 잡아보려고 사방의 뇌물을 긁어 모으고 . . . 밤마다 백화당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 . . (규장)각신인 정동준은 병을 핑계삼아 집안에 머무르면서 아침저녁으로 공부하고 몸 닦는 일도 하지 않으니 . . . "  (그래서 임금님께 일러 바치려고 했는데 정동준이 죽는 바람에 안 했어)

정조 17년/18년 정동준은 정조의 총애를 배경을 막강한 자리에 올라 뭔 일을 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정조 19년 말단 관리가 장문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발췌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로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권세와 이익을 키워나갈 생각만 하면서 . . . 

더 많이 차지하면서 뺏기지 않으려고 눈이 뒤집힌 채 . . . 

사사건건 조정의 명령을 가차하면서, 

은혜가 융숭해질수록 보답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위치가 근밀해질수록 감히 배타적으로 도모할 생각만 품고 있습니다. . .

천고에 볼 수 없는 은총을 받고 천고에 듣지 못하던 지위를 차지하고서도 

천고에 듣지 못하고 볼 수 없었던 흉칙하고 극악한 정절을 보이고 있는데, 

하께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시면서도 금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까. . .

전하께서 매번 마음먹은 대로 정치가 안 된다고 조정에서 탄식하곤 하십니다만,

이 자들의 죄를 바로잡지 않는 한 오늘날의 조정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며. . .

이 자들을 그냥 놔 두고서 차마 법대로 적용하지 못한다면

전하께서 비록 한나라나 당나라 때의

중간 수준쯤 되는 임금이 되어보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소문을 보면 주어도 없고 목적어도 없다. 구체적인 범죄 사실도 적혀 있지도 않다.  그냥 온갖 필설을 동원해서 이 놈은 나쁜 놈이라고 적어 놨을 뿐이다. 책에서 인용된 수 많은 상소문들이 다 이런 식이다. 구체적으로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걸 읽어 본 정조의 반응은 상소문 내용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정동준은 바로 음독자살한다.

임오화변의 승정원일기를 삭제했듯이 정조는 재위 17년/18년 동안의 기록에서 정동준을 삭제했음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조는 자신이 직접 키워낸 친위세력이 처절히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 실패를 인정했으며 기록에서 그 수치스러운 기록들을 삭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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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신의 귀환 - 말년에 결국 도루묵

정조에게는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가 있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는 입궁 후 1년 뒤에 사망했고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들였으나 역시 자손을 얻지 못했다. 화빈 윤씨의 나인이었던 의빈 성씨에게서 아들을 얻으니 이가 문효세자이지만 5세 때 사망한다. 이런 것을 보면 정조는 가정사에서 대단히 불운했다. 

문효세자가 사망한 후 왕대비의 재촉으로 노론 집안인 반남 박씨에서 수빈 박씨를 후궁으로 맞았고 3년 후 아들을 낳으니 이 분이 순조가 된다. 정조는 재위에 오른 후 14년만에 아들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때가 1790년이었는데 그 이듬해 1791년 초에 임금 재량으로 우의정 후보자에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을 올린다. 물론 박종악이 우의정이 된다. 그리고 박종악이 반남 반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도 뻔한 스토리가 된다.

정조 22년/23년에는 정조에게 우호적인 최측근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다. 김종수/채제공/정민시/서호수/김희 등이 사망했고 주변은 노론 벽파 천지로 채워지고 있었다. 친위세력들은 실패했거나 아직 고위직으로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진 정조는 재위 24년 차 정초 1월 1일부터 공석이었던 영의정 자리에 이병모를 임명하고 그 날 바로 당상관 이상의 조정 신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왕세자 책봉을 논의하고 당일 세자의 성인식과 혼례식도 같이 진행하기로 벼락치기 결정을 하고 금혼령을 내린다.

형식적으로 세자빈 간택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조는 이미 김조순을 딸을 내정해 둔 상태였다. 답은 정해져 있던 상태였다. 정조는 척신 세력이라도 빨리 키워서 노론 벽파와 균형을 이뤄야 했다. 하지만 세자가 혼례를 치르기 전에 그 해 6월 머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면서 결국 사망한다.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젊은 나이에 홍국영,김종수 등과 의기투합해 척리를 물리쳐야 한다는 명분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홍봉한 집안이나 정순왕대비 집안과 등을 돌린 것은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을 스스로 내친 것이나 다름 없었다. . . 정조보다 열 살 어릴 때 즉위한 숙종이 어머니의 5촌 아저씨 김석주를 동원해 왕권을 강화했던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봉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고 한다.
"거대한 사림세력에 둘러싸여 고단한 위치에 있었던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탕평을 추진하면서 언제나 측근세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측근에게 실망하게 되면서 정조의 탕평정치도 영조 대 탕평정치의 귀결이 그러하였듯이 결국은 외척의 중용이라는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외척 세도 정치는 왕권강화를 지향하였던 영정조 대 탕평정치의 한계가 노출된 결과이자 필연적 귀결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유봉학 교수의 의견에 동감이다. 아니 동감은 넘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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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임오화변에 대한 승정원일기의 세초였다. 그 뿐이랴. 정동준에 대한 이름이 실록이 나오지 않는 것도 놀랍다. 정조는 군주와 스승을 자처했지만 성군은 절대 아니었다. 기록을 날조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은 의도적으로 삭제했던 군주였다.

그리 오래 되지 않는 과거로 기억하는데, 정조가 영의정 심환지에게 내린 서찰이 공개 되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비밀 서찰을 보내어 입을 맞춘 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미리 정해진 각본대로 일을 진행했던 쇼를 했던 것이다. 정조는 서찰을 태워버리라고 명했지만 심환지는 꼬박 꼬박 서찰을 보관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수백년 후에 정조에게 큰 엿을 먹이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렇고, 홍국영과 김귀주의 몰락도 그렇고, 암튼 영/정조 시대의 벌어진 일들의 대부분은 원인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황상 적대세력이었으니 그럴만하다 싶은 것일 뿐 구체적인 죄명이나 증거 따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그냥 추상적인 문장으로 탄핵상소 핑퐁 치며 분위기 몰고 가면 그렇게 된다. 심환지에게 내렸던 밀서처럼 사전에 답을 정해 놓고 분위기 몰아가는 정치공작이 의심스럽다.

기록도 삭제하고 뒷구멍으로 정치공작도 하고 온갖 추접스런 짓은 다 했던 듯 하다. 영남 만인소 사건도 정치 공작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현실 정치인이 그럴 수 있다 치는데 자신이 스승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니 더욱 문제가 된다. 정조를 개혁군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난 도대체 왜 정조가 개혁 군주인지 알 수가 없다.

사도세자 추존 문제를 제외하면 정조와 노론 세력의 정치적 입장이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다. 사도세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정치 싸움에 희생양이 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미친 짓을 해서 죽을만한 죄를 지은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정조 본인은 그 내용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만약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면 사도세자의 추존은 포기하고 공적 시스템을 부활시켜서 나라를 정상화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고 사적 시스템을 키워 나가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 척신 세력을 키울 시도를 한다.

책을 읽어보면서 앞뒤를 따져 보니 영/정조의 정치 행태에서 세도정치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영/정조는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 아니라 지속적인 공적 시스템의 파괴로 세도정치가 등장할 여건을 조성해 조선을 망국의 길에 올려 놓은 군주들이었다. 그러나 설령 정조가 공적 시스템을 복원하여 조선을 건강한 성리학적 정치체계로 계속 유지했었더라도 개화기 때에 조선이 유지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조선은 급진적으로 다른 형태의 국가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독한 내전을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은 끔찍한 내전을 겪긴 했지. 그리고 그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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