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왜?
저자는 김동춘, 출판사는 사계절
막상 읽어 보니 새삼스러울 것 없는 내용을 저자의 시선으로 나열한 책. 나름 읽을만한 가치는 있으나 주의를 요하며 읽어 나가야 함.
----------------------------------------------------------------------------------------
구한말과 해방 전후 현대사의 내용을 통해 대한민국 70년을 비판한 책. 책에 실린 추천글에는 이 책을 대한민국 70년의 참회록이라 규정했지만 굳이 그런 표현까지 쓸 필요가 있었을까? 일독 후 가만 생각해 보니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현대사는 큰 맥락에서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책을 통해 세부적인 사항들을 좀 더 알게 되었을 뿐
읽으면서 눈에 거슬린 것은 저자의 자의적인 표현들이다. "그들은 ~을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라고 판단했다" 식의 문장들을 이용해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근현대사의 흐름을 맞춰 가고 있었다. 그런 자의적인 표현을 뒷받침하는 여러 사실들을 지면 관계상 생략했는지는 모르지만 엄정하지 않은 표현으로 대한민국의 참회록을 쓴다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근대기에 자력에 의한 개화가 실패하면서 개화 세력이 친일의 길을 걷게 되고, 해방 이후 친일 부역자들이 반공 이념을 앞세워 기득권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다. 저자는 그런 대한민국의 70년 역사를 반국가 상태로 규정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이렇게 된 원인이라 말하고 있다. 까놓고 말하자면 첫 단추부터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해야만 할까? 난 갸우뚱해진다.
저자는 현재의 양극화 심화 원인으로 대한민국 70년 역사의 반국가 상태를 지목했지만 양극화는 우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빈민의 바보짓이 트럼프를 낳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도 양극화 심화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현재는 과거의 총합이지만 과거의 어느 부분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참여정부의 분배정책을 외면하고 현대건설 사장 출신의 이명박을 당선 시킨 사람들은 다름 아닌 현재의 우리들 자신이다.
근현대사에 벌어진 일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기원을 직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모든 것을 구한말과 해방 직후에 벌어진 사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분명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주체는 우리들이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는 타자가 아니라 후세들에게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살아 있는 역사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
동학혁명 가담자 및 소외 계층이 중심이 되어 일진회(대표적인 친일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그 사실이 그리 놀랍지가 않다. 구한말 지배계층의 횡포에 시달린 하층민들에게 개화는 기회였을 것이다. "다수의 조선 백성은 나라가 없어졌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표현에는 공감이 간다. 오죽했으면 그러했겠는가? 그들에게는 역성혁명이든 일제치하든 천지개벽만이 살 길이였을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
광복 후 여러 정치 세력이 난립하면서 혼란을 겪었지만 그 누구도 조선왕조의 복권은 입에 꺼내지도 않았다. 구한말 기존 체제에 대한 실망감은 어느 진영을 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왕자님 이야기를 만들어 낸 드라마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며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이 난무했던 좌우 대립 역사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입헌군주제라는 아이디어는 참으로 철 없어 보이기도 한다.
책에서는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책에서 언급한 과거의 내용은 둘째치고 현 시점에서도 충분히 미국과 대한민국의 관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어느 나라가 수도 한복판 엄청난 규모의 땅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킨단 말인가?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용산 미군기지는 일제 시절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일본군 사령부를 미군이 점령하고 눌러 앉은 형국이다.
해방 후 일본군을 대신한 미군정은 당연히 미국을 위해 일했고 자신들에게 가장 쉬운 방식을 선택했다.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 할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 등용은 뻔할 일이다. 미국 유학 경험이 있고 영어가 가능한 인물이 친일파 외에 어디 있었을까? 이라크가 미군에게 점령 당한 후 개판이 된 것을 보면 우리의 과거사가 연상된다. 그리고 현재의 주한미군이 과거 미군정과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하지만 당시의 일을 지나치게 안타까워 하거나 분노 할 이유는 없다. 일진회에 참여한 하층민, 외세에 의존한 지도층, 나라가 망해도 슬퍼하지 않았던 정치 무관심층, 이 모두가 바로 나와 당신들의 선조들이며 나는 그러한 선조들이 부끄럽지 않다. 당시 사람들이 열등하거나 나라가 허약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개화 과정은 무질서했고 그야말로 개판이였다. 당시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이였든 조선이 좋은 나라였든 아니든, 개화를 맞이하여 조선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였던 거다.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개화는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무너뜨리고서야 가능한 것이였다. 개화를 해서 더 강한 조선, 더 강한 막부, 더 강한 청나라가 될 수는 없다. 구한말이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요순을 합한 시절이였다고 해도 결과는 같았으리라. 개화를 거스를 수 없다면 남는 길은 역성혁명 뿐이다. 그러나 주변에 강대국이 포진해 있으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세력들은 나름 똑똑하고 용감한 선택을 했지만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존했던 한계가 있었고 결국 청나라라는 외세에 밀려 실패했다.
어차피 망할 나라였다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로 조선 사람들이 개화되었다는 개소리가 설령 맞다고 치자. 어차피 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일본은 우리의 존엄을 짓밟았다.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고 노예로 취급한 것은 무슨 일을 했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군사 점령이 아니였는데도 일본은 일반 경찰이 아닌 헌병 군인으로 조선 식민지의 치안을 유지했다. 나라를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던 백성들이 왜 한일합방 9년만에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일으켰을까? 3.1절은 대한민국의 시작 시점이다.
조선은 어차피 망할 나라였으나 우리가 스스로 망할 기회를 외세가 강탈해 간 것이다. 외세 세력은 우리의 자주적인 개화를 방해하고 일본은 우리를 하등 인간으로 취급하면서 우리의 존엄을 훼손했다. 3.1절로 우리의 의사를 분명 피력했음에도 일본은 이를 누르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우리들을 거의 압살했다. 그래 놓고 일본이 식민 통치를 통해 조선을 개화한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간/쓸개 다 내 놓은 노예가 떠드는 웃기는 이야기다. 지랄 옆차기를 해도 분수가 있지. 조선의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과 일제 식민통치는 다르게 봐야 할 문제이다.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며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존엄을 우리 스스로 지키는 입장을 견지한 상태에서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엄정하게 받아 들여야 할 뿐이다. 저자의 책을 통해 내가 모르던 근현대사의 상세한 상황들을 좀 더 알게 되니 그저 마음이 짠해질 뿐이다. 우리들은 참으로 그렇게 험난하고 무서운 시대를 살아 왔구나 싶다. 해방 후의 혼란과 전쟁의 참상은 차라리 일제치하의 세상이 부럽게 느껴질 지경이였다. 그런 온갖 역경을 뚫고 70년만에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이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은 경이스럽다. 하지만 지금 누구는 "헬조선" 운운하고 있고 누구는 이런 참회록을 내고 앉았다.
----------------------------------------------------------------------------------------
3.1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우리들은 꾸준히 존엄을 향한 길을 걸어 왔고 앞으로도 이를 계승하여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존엄을 위한 길을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과거 70년 역사에 대해 나는 참회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내면의 성찰을 통해 시대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지속적인 민주주의와 평화, 정의의 이상은 대한민국이라도 제대로 만들자는 안목이나 시야를 갖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다"라는 저자의 의견에는 적극 동감한다. 구한말 자주적인 개화를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과 동일한 지형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의 공기 오염은 중국 안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도 마찬가지. 하물며 국가의 큰일은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저자가 말한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세계 자본주의와 얽혀 있다.
과거 역사와의 화해를 가장 먼저 해야 할 최우선 대상은 친일 부역자가 아니라 북한이다. 근현대사를 논하는 대부분의 서적들은 구한말 시절과 해방 전후의 대한민국의 내부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는 북한임에도 북한과 우리의 현대사를 같이 논하는 시도를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남북화해가 없이는 우리가 갈 길이 없어 보인다. 근대사에서 독립과 개화가 시대적 가치였다면 지금은 남북 화해가 일순위 명제이다. 과거에 사로 잡혀 적대관계를 유지하다가는 구한말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듯이 공멸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가장 쉬운 방법은 선거다. 선거날은 그냥 놀러가는 날이 아니라 3.1절 이후 무수한 희생을 거쳐가며 쟁취한 소중한 민주주의 절차다.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기권도 정치적 의사 표현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한표를 어떤 식으로든 행사하든 이를 위해서 각 개인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
책 리뷰를 쓰면서 책의 내용과는 상관 없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부 철없는 이들이 근현대사에 나타난 우리의 모습을 비하하고 심지어 일제치하를 긍정하는 발언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 결국 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진짜는 자기비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선조들을 "병맛"이라 하면 그건 결국 누워서 침 뱉기 밖에 더 되는가? 자기비하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겠으나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은 자신인데 안타까울 뿐이다. 존엄을 찾는 자에게는 존엄의 역사가 보이고 노예로 살고픈 자에게는 노예의 역사가 보일 뿐인가 보다. 부처님 눈에도 부처님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