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데이비드 울프, 역자는 김수미, 출판사는 미래의 상
대한민국의 그 어떤 막장 드라마 보다 더 자극적인 성경 내용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는 책. 역자가 번역하느라 꽤 고생했을 듯.
성경과 그 외 참고 문헌(탈무드, 사해문서 등)들을 동원해 가며 다윗의 일생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내가 아는 다윗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빽(?) 믿고 짱돌 하나 들고 전쟁터로 나가 거인 골리앗을 처치한 후 사울 왕과 갈등을 좀 겪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 아들이 솔로몬 왕이라는 것 뿐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어 보니 그것 밖에 모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인생은 19세금 수준의 온갖 막장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성경을 어린 시절 동화책 수준으로 밖에 접했던 내가 그런 야리꾸리한 내용을 알 리가 없잖은가.
성경은 신앙의 입장에서는 한 글자도 건드릴 수 없는 경전이지만, 나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써 내려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서로도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 보면 그 역사서에서 전형적인 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다윗이겠구나 싶다. 세속에서는 강력한 권력자이지만 신 앞에서는 무기력한 종이며 죄인이기까지 한 다윗왕을 보면서 나는 존 피어폰트 모건이 연상되었다. (JP모건은 탐욕스러운 은행자본 세력의 대표로 묘사되지만 독실한 성공회 교도였으며 신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서양 정서에서 왕이란 존재는 다윗왕을 기본적인 모델로 삼는 듯 하다.
다윗왕은 참으로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물이라 뭐라고 딱히 잘라서 말하기가 굉장히 난해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시인이자 현악기 연주자였으며 그러면서도 용맹하고 잔인한 전사였다. 굉장히 귀가 얇고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대세를 결정 짓는 중대한 순간에는 과감했으며 의사결정 사항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추호의 두려움이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대범한 모습을 보이면서 수하의 부하들과 거의 평생을 같이 했었지만 그러면서도 뒷끝이 장난아니게 더러운 사람이였고 그의 부하들 중 중요한 인물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와 다른 길을 걸어 갔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러한 존재라고 해도 그런 모습을 온전히 품에 안을 수 있는 인간은 또한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변덕스럽고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러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갖춘 이를 주변에서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항상 주변의 예측과는 다르게 움직이지만 그러면서도 상황을 장악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 다윗왕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매력적인 권력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래의 내용은 책에서 언급한 다윗왕의 울트라 슈퍼 막장 인생에 대한 요약이다. 늘 그렇듯 내 생각이 살짝 곁들어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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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타 탄생
다윗왕에 대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성경 중에서도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서는 상/하로 나뉘어지는데 상편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과 즉위 전의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고 하편에는 사울왕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다윗왕의 통치 시기가 언급되어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왕정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단계인데, 왕을 뽑는 것이 부족 간의 협의로 유력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단독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특정인을 왕으로 지목한다는데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그렇게 제사장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지목된 이는 사울이였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 된다.
상식적으로는 왕의 아들이 후대를 계승해야 하지만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사울왕이 승리하였음에도 적국의 수장인 아말렉 왕을 사울왕이 살려 주는 것을 보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다윗을 지목한다. 사무엘서에서는 사울과 다윗 모두 "기름부음" 의식을 통해 왕으로 지목된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유다의 후손인 이새의 막내아들로 양치기를 하던 소년 목자였다.
의아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윗은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수금을 잘타는 미소년으로서 사울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궁궐생활을 하게 된다.그리고 희안하게도 사울은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사울은 다윗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삼았다" (삼상 16:21) 놀랍지 않은가? 자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즉 반역을 하게 될 이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심지어 무기까지 손에 들리게 한 것이다.
또 다시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옆 나라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고, 사울왕 옆에서 수금을 타며 시종이나 들고 있던 다윗은 뜬금 없이 그 전쟁에 참전하여 블레셋의 에이스 골리앗을 돌맹이 하나로 때려 잡는 무공을 세운다. 이 사건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스타덤에 오르고 여인들은 거리를 뛰쳐 나와 이렇게 환호했다고 한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 18:7). 요즘 아이돌과 달리 그 시절 당시의 인기 있는 아이돌은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는 살인 능력에 있었나 보다. 참으로 야만했던 시절, 왕과 비교되는 칭송의 주인공은 왕권에 대한 위협이고 목숨이 풍전등화일 수 밖에.
그런데 그 이전에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공약을 해 놓은 것이 있어서, 사울왕은 여차 저차한 사정을 거쳐 둘째 공주인 미갈을 다윗에게 시집 보내게 된다. 야심찬 젊은이가 왕의 문제를 해결하고 왕가와의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하는 구도는 이런 저런 동화에서 많이 보던 구도다. 동화책에서는 그리고는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하고 끝나지만 현실에서 왕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위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사울은 작정하고 군사를 매복하여 다윗을 죽여 버리려 한다.
근데 이게 왠일? 아버지에게 협조해야 할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어 서방님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피신 시킨다. 다윗을 좋아하는 것은 딸 뿐만 아니다.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마저도 다윗을 좋아하는 골수 팬이 되어 버린다. 사울의 뒤를 이어야 할 왕위 계승자라면 왕권에 위협이 되는 다윗을 공격해야 할 것인데 요나단은 그러기는 커녕 그 이후에도 다윗의 편을 들며 그를 도왔다. 다윗은 분명 인간적인 매력을 풍기고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2. 도망자
그렇게 이리저리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다윗은 그 와중에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세력을 형성한다. 첫부인 미갈을 궁에 두고 돈 많은 과부인 아비가일을 맞으며 경제력을 확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울은 집요하게 다윗을 뒤쫓았다. 그런데 다윗은 결코 사울과 맞서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심지어 다윗은 사울 몰래 그의 코 앞에 접근하여 죽일 절호의 찬스가 있었음에도 그저 사울의 옷자락만 잘라내고 나중에 사울에게 옷자락을 보이며 다윗 자신은 결코 사울을 해할 의도가 없음을 탄원한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찬스 앞에서 다윗의 부하는 칼을 빼어 들었지만 다웟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부하를 말린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누구든지, 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였다가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 이 얼마나 욕심이 큰 자인가?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을 죽인다면 자기 부정에 처하고 만다.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인 "기름부음"에 대한 권위를 지켜내고 만다. 삼국지 유비의 가장 큰 자산은 황족이라는 것이며 (진짜든 아니든) 아무리 궁한 처지에 있더라도 그 자산을 말아 먹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암튼 이래 저래 하여 다윗은 블레셋의 왕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인 장본인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블레셋 왕의 보호를 받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블레셋의 왕은 다윗에게 땅을 하나 떼어 주는데 다윗은 그 곳에서 이웃 성읍을 약탈하며 먹고 산다. 다윗의 이웃 성읍도 블레셋 왕국의 일부이니 다윗의 약탈 소식이 블레셋 왕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다윗은 약탈 대상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린다. "다윗은 그들이 사는 지역을 칠 때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옷을 약탈했다" (삼상 27:9)
뜨아아...마을을 약탈하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몰살시켜 기밀을 유지한 것이다. 블레셋에 살면서 블레셋의 백성을 몰살시켰고 그 약탈의 일부를 블레셋 왕에서 상납하면서 이스라엘을 약탈했다고 뻥카를 쳤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동족이 아니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것이였다. 침팬지 무리는 다른 침팬지 무리를 습격하여 잡아 먹기도 한다. 사람으로 치면 식인 행위를 한 것인데 옛날 사람들도 그런 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같은 부족이 아니면 사람으로 봐 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흘러 블레셋 왕은 이스라엘의 사울왕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을 하고 그 전쟁에 다윗을 참여시키려 한다. 다윗이 블레셋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기름부음"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왕이라는 자리는 물 건너 가게 된다. 다윗에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절체절명의 위기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 블레셋 왕의 부하 장군들이 다윗의 참전을 반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에이스 골리앗을 죽인 원수가 다윗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며 다윗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꾸로 블레셋 왕은 다윗에게 이번 전쟁에는 참전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실망하지 말라며 다독여 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3.왕위 등극
하나님이 다윗 편을 들어주시긴 했나보다. 다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끼지 않았고,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하여 사울왕과 그 아들인 요나단이 죽게 된다. 다윗의 적들은 희안하게도 다윗이 손을 대지 않았어도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몸을 피하기 전, 이스라엘 내에서 도망자 신세였을 때에도 다윗의 적은 알아서 죽어줬고 가장 큰 적이였던 사울왕도 다윗이 참전하지 않은 전쟁에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죽었다. 글로는 기록되지 않은 음모를 꾸미고 다윗 자신은 앞에서 명분을 챙겼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책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일축하지만 앞뒤를 살펴 보면 다윗이 간교한 음모를 꾸몄다고 해도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러나 한편, 골리앗과의 싸움에 선뜻 나섰던 사람이 그렇게 음모를 꾸미고 다닐 리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분명 골리앗을 대하는 다윗의 모습은 자아를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소명에 충실히 대응하는 모습이다. 영웅은 운명이라는 바다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둥둥 떠 다닌다는 죠셉 캠벨이 말하던 그런 모습을 보이던 다윗이 그런 뒷통수 치는 음모를 꾸밀 필요가 있었을까? 자신을 운명의 바다에 내던졌던 이가 그런 비열한 짓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다윗은 왕위에 등극하고 결국은 나중에 비열한 짓을 벌이긴 한다.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으로 남부 유다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사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북부 이스라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사울왕의 사후 다윗은 남부 유다에서 왕으로 즉위하고 북부 이스라엘의 사울 세력과 내전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등극한다. 내전 중에 사울 세력은 내분이 발생하여 스스로 무너지면서 다윗이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하나 둘 죽어 나간다. 여기에도 다윗이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복종하고 낮추는 자세를 일관되게 취한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을 모세처럼 직접하지 않았다. 다윗은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받았다. 도망자 시절에도 그는 중대한 전투에 대한 가부를 제사장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했다. 은나라에서 거북이 등껍질로 점을 쳤듯이 이 당시 제사장들도 우연에 의한 괘를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듯 하다. 다윗은 세속적 권력인 왕으로서의 자리를 잘 지키고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했던 듯 하다. 성경의 시편 대부분은 다윗이 작성하였는데 책에서 인용한 시구를 음미해 보면 비 기독교도인 나조차 참으로 절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흡사, 교황과 사이가 좋은 중세의 신앙심 깊은 왕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냥 책 내용과 상관 없이 뜬금 없는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는 제사장들을 비판하였으나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다시 인간과 신 사이에 성직자 그룹을 만들고 급기야 나중에는 면죄부까지 만들어 팔아 먹는 것을 보면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인간은 이리도 변하지 않는 것일까.
4. 밧세바와 간음하다
지금까지의 다윗은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이를 모두 기회로 만들면서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이야기로 다윗은 막장의 길을 걷게 된다. 대부분의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그 위기는 여자 문제로 시작된다. 부하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다윗 자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왠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이 눈이 튀어 나온 다윗은 그녀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보니 전쟁터에 가 있는 자신의 부하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녀를 궁으로 불러 들이고 그녀와 정을 통한다.
요즘 같으면 그렇고 그런 섹스 스캔들로 치부될 수도 있겠으나, "기름부음"을 받은 열렬한 신앙인으로서의 다윗에게 이건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밧세바가 엄연히 유부녀인 것을 알고도 불러들여 정을 통하였으니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내용을 정면으로 위반한 셈이다. 이게 그나마 들키지 않으면 되는데 하룻밤 정을 통한 후 얼마 후에 밧세바가 다윗에게 전갈을 전한다. "나 임신했어요"
신앙적 헤게모니의 장악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다윗에게 밧세바의 전갈은 청천벽력이였을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짜냈을 것이다. 남편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 있어 부재 중인데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그 알리바이를 만들기로 한다. 열심히 전쟁터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던 우리아를 급히 궁궐로 부른 것이다. 우리아는 대체 뭔 일인가 하고 궁궐로 돌아 왔을테고 그 앞에서 다윗이 한다는 말이 "전쟁터에서 고생 많지? 너 힘든거 다 안다. 집에 가서 좀 쉬고 네 마누라도 좀 안아주고 가". 왕이 까라면 까면 될 것을 우리아는 "왠 특별 휴가? 이 전쟁통에 마누라 안고 있을 때는 아닌데요"라며 충직하게 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어떻게 하든 충직한 우리아를 집에 보내어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던 다윗은 이 방법이 여의치 않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다. "네가 정 그렇다면 우짜겠냐. 괜히 널 여기까지 불러서 너만 피곤하게 만들었구나. 도로 부대로 복귀하고 가는 길에 내 편지 좀 총사령관 요압한테 전해다오" 편지에 무슨 내용이 써 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총사령관 요압은 편지에 적힌 왕의 지시대로 우리아를 최전방 선봉에 세우고는 본대를 뒤로 물러 아무 지원을 하지 않았다. 우리아는 전사한다.
과부가 된 밧세바를 다윗이 거두어 혼인을 하고 아이를 출산한다. 이런 비열한 짓을 저지른 다윗이기에 이전에 적들을 이런 음험한 방식으로 제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에 대한 형벌이였을까? 밧세바와 불륜을 통해 얻은 아이는 태어나고 얼마되지 않아 사망한다. 다윗은 아이가 아프자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아이를 구해줄 것을 빌었으나 아이의 사망이 확정되자 바로 금식을 풀고 음식을 먹는다. 신하들이 의아해 하니 이에 대한 다윗의 답은 "아이가 아플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금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였지만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잖아?"
영아 사망이 일반적인 시대이긴 했으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에게 정이 쌓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윗은 신앙적으로 독실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이런 식으로 비열하고 냉정한 현실적인 태도를 종종 내 보인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왕의 면전에서 밧세바를 취한 다윗왕의 잘못을 비난한다. 나단의 비난은 역린을 거스를 수 있는 것으로 보통의 왕 같으면 저 놈을 능지처참하라고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다윗은 자신을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한다.
다윗의 장점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으며 여러 문제를 일으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대세를 그르칠 수 있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는다.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그 결정으로도 대세는 이미 그르쳤지만 그는 어느 순간 겸허히 자신의 잘못을 받아 들이고 자신이 단추를 잘못 꿰었음을 인정한다.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였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5. 자식들의 근친과 살육
다윗에게는 19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부인은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후궁은 10명 이상이 있었다. 첫째아들은 암논, 둘째아들은 다니엘, 세째아들은 압살롬이였다. 1명의 딸은 다말이였는데 압살롬과 다말은 어머니가 같은 남매지간으로 압살롬이 오빠였다.
성경에 따르면 압살롬은 흠 잡을 곳 없는 미남이였다고 한다. 그의 여동생인 다말도 그럼 미녀였겠지. 주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마음이 달아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달아오른 남정네 중에 하나가 다윗의 첫째 아들이자 다말의 의붓오빠인 암논이였다. 그리고 욕정에 눈의 먼 암논이 결국은 다말을 강간을 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말이 강간에 저항하면서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오라버니!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법이 없습니다. 제발 나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제발 이런 악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주십시오. 오라버니가 나에게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도 또한 이스라엘에서 아주 정신 빠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똑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발 왕께 말씀을 드려보십시요. 나를 오라버니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삼하 13:12~13) 읽어 보면 읽어 볼수록 묘한 말이다. 흡사 "안 돼요~돼요~돼요~" 처럼 읽히지 않는가.
하지만 거사가 끝난 후 암논의 마음은 식다 못해 그녀를 증오하게 된다. 암논은 일이 끝난 후 하인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어서 이것을 내 앞에서 내쫓고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질러라" (삼하 13:17)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다말에 대해 "이 여자"가 아닌 "이것"이란 용어를 썼다고 한다. 국내 어느 막장 드라마에서 어느 배우가 시어머니 역할을 하며 "이것 치워"라는 대사를 했었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열렬했다. "이것"이란 말을 들은 다말의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을 것이다.
암논은 그렇게 품에 안고 싶었던 여인을 막상 품어보고 나니 정나미가 뚝 떨어졌고 오히려 여인을 벌레 취급 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지만 남자의 마음도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욕정에 눈이 멀어 강간을 했지만 그 욕정이 식은 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을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려는 심리가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관계 시 다말이 암논의 남성성에 결정적인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었던 것일까? 육체적인 관계는 생각보다 미묘하고 남자는 의외로 그런 면에 대해 복잡하고 상처 받기 쉬운 존재다.
암논의 사정이 어떻든, 여동생 다말의 입장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이였으면 피해자로 취급되었겠지만 그 당시는 그럴 때가 아니였다. 자신을 겁탈한 사람과 결혼할 생각만으로도 끔찍한데 지금와서 결혼도 안 해주고 자신을 내치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답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윗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성경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윗 왕은 이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몹시 분개하였다. 압살롬은 암논이 누이 다말에게 욕을 보인 일로 그가 미웠으므로 암논에게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삼하 13:21~22)
아버지로서 몹시 분개했겠지. 그런데 위의 내용이 전부다. 분개하였으나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다말은 암논에게 그렇게 당하고 난 후 "그리하여 다말은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삼하 13:21)는 기록을 끝으로 성경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 다윗이 다말을 위해 뭔가 해 준 것이 없었던 듯 하다. 암논을 불러다가 귀싸대기를 올려 붙이며 책망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상으로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말과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오라비 압살롬이 빡친 것은 당연하다. 골리앗에 맞섰던 다윗의 아들답게 그는 자신의 이복형 암논에게 복수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2년 후 압살롬은 암논을 들판에서 무참히 살해한다. 압살롬은 그 후 이웃나라로 망명을 하고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밧세바의 아들이 죽었을 때와 달리 깊은 상실감에 자리에 몸져 누워 버린다.
6. 아들의 반란과 죽음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우찌 우찌 하여 3년 후 다시 이스라엘로 귀국한다. 어찌 되었든 첫아들 암논은 이미 죽어버렸는데 그나마 또다른 아들 하나를 영영 안 보고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윗왕은 압살롬의 귀국을 허락했지만 그렇다고 압살롬과 잘 지낸 것은 아니였다. 압살롬을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지고 가슴이 미어졌을테지. 압살롬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챙긴 것도 아니였다. 그야말로 소 닭 보듯 무시하며 없는 아들인 듯 살았다.
압살롬은 귀국 후 2년이 지나도록 다윗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자 삐뚤어진 행보를 보인다. 남의 집 멀쩡한 보리밭에 불을 지르는 사고를 친 것이다. 유아가 부모의 관심을 얻기 위해 땡깡을 부리고 사고를 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리하여 우찌 우찌 다윗왕은 압살롬을 만나주긴 한다. 성경에는 그 광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압살롬이 왕에게 나아가서, 왕 앞에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자, 왕이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삼하 14:33)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칭하지 못하고 죽어라 머리를 숙이는 압살롬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입을 맞춘 것도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마나 볼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훨씬 친밀감이 떨어지는 손이나 어깨에 입을 맞춘 것이라 한다. 아들이지만 마치 남 보듯 압살롬을 대한 것이다. 다윗에 이러한 냉랭한 태도에 압살롬은 더욱 삐뚤어 질 것이 뻔하다.
이후 압살롬은 인기영합적인 행보를 보이며 민심을 얻고 추종자 200명과 다윗왕의 작전참모 아히도벨을 영입하여 헤브론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운 후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의 기세는 드세어 다윗은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열명의 후궁을 남겨둔 채 피란길에 오른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압살롬은 깜놀한 일을 벌이는데, 아버지 다윗이 남기고 간 10명의 후궁을 벌건 대낮에 옥상에서, 즉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욕 보인 것이다.
중동에서 IS가 이라크 군인들을 공개로 처형하는 동영상에 대해 어떤 이는 정치적인 포르노라고 칭했다. 압살롬은 그야말로 진짜 정치적인 포르노를 연출했다. 나는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작전참모 아히도벨의 건의에 따라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인 이벤트였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통해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왕보다 강력한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이를 통해 대중들이 압살롬을 지지하도록 만들자는 노림수가 있었다.
다윗왕이 피난길에 아히도벨의 계책이 수포로 돌아가기를 기도한 것을 보면 다윗왕은 아히도벨을 위협적인 존재로 본 모양이다. 아무래도 한 때 수하로 두었으니 다윗왕은 아히도벨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윗왕의 기도가 먹혔는지 다윗왕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 넣을 아히도벨의 또다른 계책은 채택되지 않았고 이에 좌절한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다. 아히도벨은 그의 계책이 실행되지 않았을 경우에 다윗왕인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고 그 후 벌어진 일을 보면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그만큼 그는 유능한 모사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한 휼륭한 작전참모가 말도 안되는 계책을 냈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옥상에서 부왕의 후궁을 아들이 공개적으로 강간하는 말도 안되는 이벤트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먹혔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구성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였을까? 전쟁과 약탈이 당연히 되던 야만적인 고대사회라고 해도 이런 짓이 휼륭한 계책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섬겼던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이였던 건지 참으로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아히도벨의 예측처럼 압살롬은 다윗왕과의 전투에서 패해 전사한다. 피난길에 오른 다윗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압살롬과 정식으로 전투를 벌이고 그 전투에서 압살롬은 머리가 나무에 걸려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예전 자신이 태웠던 보리밭의 주인인 다윗군의 총사령관 요압의 창에 최후를 맞는다.전투 전 다윗왕은 수하의 군대에게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당부하였건만 총사령관 요압은 왕의 지시를 무시하고 보리밭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충실히 갚는다. 그리고 첫째 암논에 이어 세째 압살롬의 죽음을 들은 다윗왕은 그야말로 목 놓아 대성통곡한다.
압살롬의 죽음을 전해들은 다윗이 통곡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울부짖었다"(삼하 19:1) 성경 구절 중에서 이렇게 감정을 구구절절 표현한 것은 드물 것이다 '내 아들' 이란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온다. 이렇게 슬퍼할 아들이였으면 진작에 잘해 주었을 것을. 다윗은 정말 여러 회한이 들었을 것이다.
7. 후계자 솔로몬과 다윗의 죽음
압살롬의 반란에 이어 다윗왕은 전임 사울왕의 세력인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사무엘서에는 자세한 내막이 나오지는 않지만 사울의 후손 중 7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 처형 시킨다. 결과적으로 다윗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그리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되어서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기름부음 의식을 비롯한 공식적인 대관식을 챙기며 후계작업을 공식적으로 끝낸다.
비록 기름부음 의식을 제사장이 진행하기는 했지만 이전 사무엘처럼 제사장이 독단적으로 왕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다윗이 후계자를 지정하고 제사장은 왕의 원하는대로 종교적인 의식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였던 사울왕과는 이 점에서 많이 다르다. 다윗은 왕권을 강화하였고 후계를 자신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의 세습왕조를 세운 것이다. 조선으로 치면 개국을 한 태조이면서도 왕권을 공고히 한 태종이기도 하다. 가히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중의 왕이라 불리울만 하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죽는 그 최후의 순간에 살생부를 후계자 솔로몬에게 건넨다. 첫번째는 군부의 최고 수장인 요압. 다윗의 도망자 시절부터 그를 보필했던 군부의 최고 사령관으로 다윗과는 평생을 같이한 심복 중의 심복이 첫번째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다. 자신의 세째 아들 압살롬을 살해한 장본인이 요압이라는 것은 다윗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않고 자신의 당부를 무시한 죄값을 받아내려 한다.
살생부에는 다윗왕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던 시절, 돌팔매질을 하며 다윗왕을 비난했던 베냐민 지파, 즉 사울왕의 세력인 시므이가 포함되어 있다.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가던 길에 시므이는 자신의 행동을 사죄하였으며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나라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러나 시므이의 패역한 행동을 다윗은 죽는 날까지도 잊지 않았다. 자신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을 솔로몬에게 말하면 그에 덧붙여 "그러나 너는 그에게 죄가 없다고 여기지 말아라.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너는 그의 백발에 피를 묻혀 스올(구약에서 말하는 저승세계)로 내려가게 해야 한다"(왕상 2:9)
뜨아...다윗 이 양반 뒤끝이 장난 아니다. 자신에게 원한을 산 이들을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가 후계자 솔로몬에게 살인을 지시한다. 무시무시한 왕이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솔로몬은 어리버리한 왕이 아닌 능력 있는 지혜의 왕. 아버지의 살생부를 아주 지혜롭고 문제 없이 잘 수행해 낸다. 영화 대부 마지막 장면은 다윗왕의 살생부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내내 지루하게 참고 참았다가 막판에 싹쓸이로 복수하는 장면은 평생의 적을 가까이 두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다윗왕의 행태와 참으로 닮았다.
그리고 후계자 솔로몬의 어머니는 다윗왕이 우리아를 간계로 죽이고 취한 밧세바이다. 밧세바와 불륜을 통해 취한 첫 아이는 일찍 죽었지만 그 후로 밧세바를 통해 얻은 다음 아들이 솔로몬이였다. 다윗왕이 지은 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여인의 아들인 솔로몬으로 후계를 잇게 하고 다윗왕의 마지막 의지가 솔로몬의 선왕 유언 실행으로 현실화 되는 것을 보면 요즘 말로 소름이다. 다윗왕의 긍정적인 부분이든 부정적인 부분이든 그 모든 것이 다윗의 일부였고 그가 영웅이 되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였다. 동일한 원천에서 불륜을 통해 얻은 첫번째 아들은 죽었지만 두번째 아들은 그를 계승하고 현명한 군주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중세 영어의 고전 "베오울프"를 영화화 한 동명의 영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베오울프의 재위 말년에 동굴에서 불을 뿜는 용이 나타나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베오울프를 대면한 화룡은 베오울프에게 대 놓고 자신이 당신 베오울프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불을 뿜는다. (스타워즈는 반대로 다스베이더가 "I am your father"라고 했지) 그러나 세상이 달랐으면 베오울프의 아들은 괴물 화룡이 아니라 강력하 차기 왕이 되어 천하를 지배했을 것이다. 동일한 근원에서 태어난 강력한 존재가 괴물이 될지 영웅이 될지는 그 시대가 어떤 시대냐에 달렸을 것이다. 첫아들은 다윗왕의 죄에 대한 처벌로 죽었으나 둘째 아들 솔로몬은 다윗왕의 후계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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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하고 재미 없는 Text라 알았던 성경의 내용이 이리 자극적이고 드라마틱 할 줄은 몰랐다. 신앙적 입장에서 귀한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내용을 막장 드라마로 읽은 불경스런 내 태도에 불쾌함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문체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 실제로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실제 주변에 다윗왕과 같은 다면적인 인물이 있다면 그런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다윗왕의 이야기는 꽤 괜찮은 참고 자료이다. 그리고 아마 십중팔구 그런 인물은 꽤 능력 있고 주변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유능한 인재일 가능성이 높다.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에 많고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 들면서도 반복해서 접할 때마다 새롭다. 베트맨/슈퍼맨/스파이더맨 등등의 영웅을 이야기 하는 영화에서도 매번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그러면서도 매번 섬찟하고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먼 옛날에 있었던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먼 옛날에 씌어진 문헌으로 접해도 역시 그러하다. 어느 누구이든 내면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안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이야기가 형태를 바꿔 계속 반복되는 것은 그 이야기에 공명하는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