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
저 자 : 마이클 샌델
출판사 : 김영사
역 자 : 이창신
교보문고 한 코너에서 이 책으로 떠들썩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도발적인 제목과 하바드 대학이라는 배경으로 한 건 잡으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그냥 저런 책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이러저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있는 모양. 어떤가 싶어서 한번 사 봤다.
읽다보면 독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딜레마로 몰아가는 저자의 솜씨는 감탄스럽다. 대학 1학년 교양 수업 수준인데 읽기에 어렵거나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번역도 이 정도면 꽤 잘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 책은 "정의"에 관련된 여러 주장을 열거하고 각 주장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질문들을 던진다. 그 질문들을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나는 이미 정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이 책을 읽어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자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끝까지 읽어 봤다.
저자가 생각하는 정의는 마지막 두 챕터에 나온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마지막 저자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 지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과연 하바드 대학의 학생들이 그 견해에 동감하고 받아 들였을지 의문이다. 아마도 그들이 그 이전에 교육 받았던 관점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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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봤으니 우선 책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정의"에 대한 입장으로 저자가 거론하는 인물은 밴담, 칸트, 척 롤스,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을 내 나름대로 각색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밴담 가라사대...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겠냐? 많은 쪽수가 좋아하면 그게 맞는거지. 민심이 천심이라며?"
여기에 칸트 가라사대...
"그러면 인간과 금수가 다를게 뭐냐?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선택한게 맞는거지. 내가 하늘인거여!"
거기에 척 롤스 가라사대...
"칸트 형님 말씀이 맞긴 한데, 그걸 분배에 적용할 때는 이렇게 하는게 맞지요."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이것들이 웃기고 있네! 인간이 뭔지도 모르면서 뭘 떠들고 있냐?"
여기에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손을 들어 준다.
서구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기지도 않는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지만...
21세기 최고 명문대 중의 하나의 하바드에서 강의하는 교수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을 들어 준 거다.
사실 저자의 견해는 굉장히 위험하다.
저자 역시 그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솔직하게 말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점은 좋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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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밴담이 주장한 공리주의는 굉장히 강력하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 공리주의에 대해 "정의"라는 말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다.
공리주의는 정의라는 존재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다.
정의가 있든 없든 의사판단은 이익이 커지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다는거다.
이렇게 써 놓으니 무슨 악덕상인이 하는 말 같아 보인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공리주의에서 사람은 다 똑같은 1명의 사람이다.
그 사람의 신분이나 능력, 자질 따위는 다 무시된다.
즉 개인의 특성이 무시된 숫자로 추상화 된 지극히 중립적인 존재이다.
다 똑같은 사람이라면 다수가 이익을 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
그래서 공리주의를 따르면 판단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나름대로 판단에 객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문제를 객관화, 기계화 시킨다.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때에도 편리하다.
경제학에서 떠드는 이야기들을 봐라.
온갖 수치화된 Index를 가지고 이것 저것 따진다.
내가 볼 때 경제학자 중에서 공리주의적 사고를 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LG그룹에서 한 때 "정도경영"을 앞세운 적이 있었다.
기업이 "정도"라는 도덕적 가치를 추구해야할 집단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도"를 지키느라 회사가 부도에 빠진다면 경영자는 무능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그럼에도 "정도경영"을 해야 하는 필요성은 과연 무엇인가?
경제를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정도 경영"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도"를 지키지 않으면 이익이 많아질 수도 있지만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
"정도"를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위험보다는 지켜서 위험을 줄이는 것이 이익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냥 정도경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높아진다.
주관적 견해가 아닌 객관적이고 기계적인 입장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 중 이러한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거의 없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유전자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행동한다는 생각도 공리주의가 깔려 있다.
각 개인은 유전자 입장에서 볼 때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운반체에 불과하며...
운반체는 유전자가 더 잘 남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것이다.
"쾌락"이라는 잣대가 "유전자 번성"으로 바뀐 것 뿐 나머지는 공리주의 입장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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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는 비인간적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
내 자신이 나서서 판단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 딴지를 건다.
공리주의는 사람을 평등하다고 여기기는 하는데 그 평등의 기준은 "쾌락"이다.
칸트는 "쾌락"이 잣대가 되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쾌락"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것이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건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담배는 한번 배우면 끊기가 매우 어렵다.
요즘 같이 흡연에 대해 이러저러한 태클이 많으면 차라리 끊는 것이 낫다.
건강상의 이유든 다른 이유이든 금연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도 금연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적다.
담배를 끊고 싶어도 그러기는 사실 불가능 하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피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흡연에 대한 욕구 그 자체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즉 "나"는 욕구 그 자체를 선택할 수가 없다.
"쾌락"을 따라 살아간다면 내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욕구의 의지로 살아가게 된다.
칸트는 이게 마음에 안 들었던거다.
어떻게 하든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했다.
그럼 "나"라는 존재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내"가 선택 할 수 있으면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무슨 커피 광고의 카피처럼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말은 간단하나 그게 간단하지 않다.
그 선택이 "내"가 하는 것이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 지점에서 칸트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성적 존재"라는 말을 앞세운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선택하라는거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나에게는 난해하고 공허하게 들린다.
순수이성이니 뭐니 이 지점부터 칸트의 이야기는 어려워진다.
암튼 칸트는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
남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해 줘야 한다고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듯이 남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
이 점은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객관화 된 무차별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어떻게 하든 유지하고 싶었고...
그러자니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한다는 거다.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고 싶다면 말이다.
결론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은...
칸트의 입장에서는 옳은 일이 아니다.
공리주의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듯이 칸트의 아이디어도 꽤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소수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데 칸트의 사상은 꽤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할 수 있고 남들 역시 마찬가지라면...
"여호와의 증인"이 집총거부하는 것을 선택한다 한들 그건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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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칸트에 이어 저자는 척 롤스를 언급한다.
척 롤스는 20세기를 풍미한 정치 철학자인데 책을 읽다보면 척 롤스야말로 저자의 극복 대상이다.
EBS를 보면 롤스의 의견에 대해 몇 학생들을 반대 의견을 내 놓는데...
그 반대 의견이 저자와는 정반대 입장에서 내 놓는 것이였고...
이에 저자가 도리어 롤스의 의견을 변호하는 것을 보니 아이러니했다.
롤스도 반대에 부딪치는데 센델의 정의론에 학생들이 얼마나 동감할 수 있었을까?
암튼, 저자의 의견에 따르면 롤스는 칸트와 기본적인 입장은 같다.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데카르트 이후 서구 근대의 핵심 아이디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나'의 존재여부를 확정 지은 말이였다.
여기에서 롤스는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차별적 분배를 지지하는 획기적인 이론을 내 놓는다.
칸트가 '나'라는 존재에서 "쾌락"을 배제했듯이...
롤스는 '나'라는 존재를 정의할 때 임의적인 모든 것을 모두 배제하는 입장을 취한다.
임의적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이야기 한다.
타고나는 신체적 조건이나 신분 및 부모는 물론이고 재능이나 성향 등 모든 것을 배제한다.
즉 '나'라는 존재를 그야말로 '나'라는 이름만 남겨 놓은 백지 상태로 두는 것이다.
실제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을지 어떤 배경에 있을지 어떤 성향일지 모르는 상태로 두는 것이다.
롤스는 이 상태를 상정하여 분배에 대한 기준을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자유주의를 지키면서도 차별적인 분배를 가능케 한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나와 타인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장막이 걷히 현실에서 내가 어떤 상태가 될지 전혀 알 수 없고 타인도 그렇다면...
재능 많고 능력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어느 정도 지원해 주는 것에 합의 할 수 있고...
그러기에 자유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차별적인 분배는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롤스는 그 어떠한 임의적인 요소가 분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노력하는 것조차도 성향에 따른 임의적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한 논리라면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차별적인 분배에 합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EBS의 동영상 강의를 보면 학생들은 롤스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나'를 너무 백지 상태로 만들기에 사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발상이기도 하다.
내가 저 사람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상상이 다들 하지 않는가?
클론의 강원래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건강미의 상징이던 강원래도 그런 사고를 당할 수 있음을 보고...
이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가?
훨체어가 다닐 수 있게 도로를 정비하자는데 딱히 반대할 수가 있던가?
교통사고는 조심한다면 덜 날 수가 있지만 100%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교통사고에 대해서 사실 우리들은 모두 무지의 장막 뒤에 서 있는 셈이다.
내 평생 교통사고를 당할지 안 당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통사고 안 나면 그냥 버리는 돈인 보험금을 다들 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성실하고 똑똑하지만 내 아들 딸이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 후손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무지의 장막 뒤에 서 있다.
우리 후손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자고 이야기 하면...
취약 계층에 대한 차별적 분배를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
롤스의 아이디어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평상시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롤스의 이런 주장이 미덥지 않다.
그의 주장은 사람들의 두려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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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의 주장이 복지를 주장하는 소위 "좌파"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의적인 요소를 배제했을망정 '나'라는 존재를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롤스는 자유주의 사상가로 분류된다.
밴담과 칸트, 롤스는 모두 근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들의 공통점은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나'라는 존재를 모든 것에 우선하여 사고한다.
단 이들은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다.
밴담은 "쾌락을 쫓는 존재", 칸트는 "선택 가능한 존재", 롤스는 "임의성이 배제된 존재"였다.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이가 있었다.
그의 사상은 수천년 동안 중세 유럽을 지배했었고...
데카르트를 비롯한 날고 긴다는 철학자들의 진정한 적수였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갈릴레오와 뉴튼 그리고 데카르트와 그 뒤를 이은 근대사상가들의 공격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옛날 당시로는 꽤 괜찮았던 헛소리를 하던 사람이 되고 말았다.
특히 그의 사상은 기독교와 결합하여 중세를 장악하였기에...
중세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꼭 넘어야 할 산이였다.
"학생이 학생다워야지!"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난 학생답다는게 뭘까 의문이였다.
난 학생이기 전에 인간이고 난 '나'일 뿐인데...
왜 나에게 학생이라는 작위적인 모습을 강요할까 싶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이와 비슷하다.
학생이 학생다운 것이 정의고 인간이 인간다운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인간이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미덕을 행해야 하고 이것이 정의다.
학생이 학생다워야 한다는 말에 '나'의 존재를 먼저 앞세워 거부하는 것.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주장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특정 종교의 신자, 특정 지역의 부족민, 특정 국가의 국민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 자체로 존재하며 국가나 종교 심지어 자연보다도 우선시 된다.
우선 내가 있고 나머지는 다 환경이다.
내 주변에는 자연 환경이 있고 그 자연 환경마저도 선택 가능해야 한다.
주거 환경은 인간이 마음대로 조절하는 형태가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내 맘대로 되면 될수록 좋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정해진 미덕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
그가 살던 시대는 그리스 도시 국가 시절이고...
그 미덕이라는 것은 폴리스의 시민으로 가져야 할 미덕이였다.
중세는 그 미덕을 신에 충실한 인간으로 바꾸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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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자유"를 긍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듯 정치가는 정치가다워야 했다.
정치가는 폴리스의 이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해야 했고...
이는 무차별적인 투표로 의사결정을 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그런데 저자는 21세기인 현재 시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한다.
왜 그럴까?
롤스는 '나'라는 존재를 백지 상태로 놓고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하지만 샌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러지 못하겠다는거다.
샌델의 말은 흡사 커밍아웃처럼 들렸다.
아무리 '나'라는 존재를 앞세우려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안 되더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나'라는 존재를 일종의 표백된 초기상태로 상정한다.
EBS에서 교육학의 최신 이론을 배경으로 한 교육 다큐를 방송하는데...
그 다큐의 배경을 보면 아이는 일종의 백지로 취급한다.
결국 아이가 잘못되는 것은 그 백지에 그림을 그린 부모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학문이라고 하는 것들이 근대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인간을 객관적이며 무차별적인 존재로 본 관점은 교육학에서도 유효하다.
타고난 부분이 있고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교육은 그 부분에서 의미를 상실한다.
교육학에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를 백지 상태로 상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가 정말로 백지 상태에 있는 건가?
난 그 의견에 동감할 수 없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진 무엇이 있다.
누구는 그것을 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그것을 불심이라 하였다.
칸트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으로 '나'라는 존재를 삼았지만...
인간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인간이 될 것임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결정하지 않는가?
정체성이 임의적이긴 하지만 샌델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샌델은 남부군의 로버트 리 장군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종사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판단은 도덕적으로 비난 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더 큰 어떤 부분의 일부로 살아가는 서사적 관점을 지지한다.
개인을 넘어선 숭고한 것의 일부로 자신의 인생을 바친 것에...
사람들이 칭송을 마다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마 샌델 그 자신이 칭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샌델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을 부정한 셈이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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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샌델의 생각은 위험하며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그의 생각은 자칫 자유민주주의 근간을 흔들어 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샌델의 생각을 지지한다.
물론 샌델이 판단하는 도덕적 결론이 나와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서두에서 밝혔듯이 나는 이미 정의가 뭔지 알고 있었다.
그게 뭐든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살아오다 보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잘나든 못나든 인생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그 말은 잘 난 놈이 잘 난 맛에 쓰는 건방진 용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잔인한 현실이다.
온 몸으로 이 세상 전체와 맞짱을 떠야 하는 순간이 있다.
Network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가 아니라 내가 발딛고 있는 현재의 Node다.
내가 소속된 Node가 있어야 Network 전체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Node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도 받아 들여야 한다.
어떤 사태에 대해 자신은 쏙 빠져 나가고...
객관화 된 또는 거세되어 중립화 된 상황만을 상정하여 기계적인 판단만을 논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짓이 매우 비겁하고 역겨운 행태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안다. 결코 속일 수 없다.
정의가 무엇이냐고?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정의다.
이미 당신은 알고 있다.
그 알고 있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 샌델의 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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