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W.G. 비즐리 역자는 장인성, 출판사는 을유 문화사
편히 볼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잘 쓰고 잘 번역한 괜찮은 책.
일반인 대상이 아닌 관련 전공자을 위한 입문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 홍보 문구에는 일본사에 대한 교과서적인 입문서라고 하는데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서점을 둘러보니 일본에 대해 씌여진 책들은 대부분 피상적인 기행문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서술한 수필 수준의 내용이였다. 아무래도 일본과의 관계는 민감하고 특수한 부분이 있기에 역으로 가벼운 터치를 유지할 수 밖에 없나 싶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나름대로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가 집필한 이 책은 서점에서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없던 나에게는 그리 쉽게 읽혀질 책은 아니였다. 명료하지만 함축적이고,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딱딱한 문장들은 단어 하나 하나 꼭꼭 씹고 2-3번 반복해야 겨우 알아 볼 수 있었고 그래도 모르는 부분은 인터넷을 통해 관련 지식을 찾아 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어야 했던 것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평소의 생각 때문이였고 또한 딱딱하지만 그걸 상쇄할만큼 잘 씌여진 재미있는 책이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가 보니 의외의 내용이 꽤 많았고 많은 생각거리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씹어서 읽다보니 거의 매 장마다 밑줄을 치고 내 생각을 담은 메모를 적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과거 경험을 통해 국가와 사회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분명 잘 씌여진 책이고 읽는 동안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읽힌 것으로 보아 번역에도 꽤 많은 공을 들였을 듯 하다. 다만 저자가 신경쓰지 않은 친절함을 역자가 제공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 다음은 내 생각이 꽤나 추가된 요약 내용이다. 요약이라 하기에는 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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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통제되지 않는 그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각인된 것은 "통제되지 않는 그들"이였다. 일본인들은 상명하복에 익숙하고 조직의 논리를 중시 여긴다고 생각했던 내 선입관과는 완전히 다른 면이였다.
흔히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근현대사를 읽어 보니 과연 그들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것이 심히 의심스럽다. 외견상 공업화에는 성공한 듯 보이나 그들이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근대화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공업화 외에 일본이 이루어 낸 것으로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이다. 일본이 미국과 정면충돌하여 태평양 전쟁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보니 일본의 군사력이 당시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대등할 정도로 강대했는지 의문스러워졌다.
일본은 성공적인 개방과 공업화를 이룩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 놓지는 못했다. 답을 내 놓지 못했고 그들은 갈팡질팡 헤멨다. 사회 구성원들은 근대화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공유하지 못했고 각자 자신들의 주관대로 결정하고 행동했다. 이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서구의 문명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던 나라에 거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리라.
일본의 경우를 보면 개화 과정에서 기존의 질서가 전복되고 힘 쎈 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한다. 힘 쎈 놈으로 질서를 세우는 것은 쉬운 방법인 듯 하지만 힘만 있으면 된다는 Rule 때문에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난 세력은 승복하지 않고 힘을 키워 판을 뒤집을 생각만 하게 된다. 질서는 잡히지 않고 각 세력은 통제되지 않는다.
1852년 패리의 흑선으로 개항을 하고 1945년 패전 때까지, 약 100년 동안의 일본 근대사는 이러한 "통제되지 않는 그들"로 가득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 중 통제된 전쟁은 거의 없었다.
1. 세키가하라 전투
페리의 대포에 개항을 하고 막부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막부 정권이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 또한 별도의 책을 읽어 봐야 할 분량이지만 필요한 부분만을 인터넷으로 찾아 본 내용인 즉 이렇다.
일본에는 전국시대라는 시절이 있었다. 지방 영주끼리 사방에서 칼 들고 싸움질 하던 시기로 150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이 강력한 무력으로 그 싸움을 평정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자리를 물려 받는다.
싸움은 멈췄지만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언제든 칼부림은 날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에너지를 외부인 조선으로 돌렸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지휘권이 일원화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라기 보다는 다수의 공동 사령관이 존재하는 지방 귀족 사병의 연합군이였다.
연합군에 병력을 차출하지 않은 채 힘을 아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기존 세력과의 무력 다툼을 통해 정권을 잡게 되고 그 판을 결정짓는 중대한 전투가 세키가하라 전투였다. 세키가하라 전투로 일본 전체의 봉건 영주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선택에 따른 결과도 받아 들여야 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 전투의 승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아갔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반대 편에 섰던 지방 영주들을 약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친 도쿠가와 세력으로 영주를 갈아 치우거나 존속시키는 경우 영지 축소 및 척박한 변경의 오지로 전출(?) 시켰다. 이로써 도쿠가와의 반대편에 섰던 세력은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된다.
불이익을 받게 된 지방은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막부 정권은 지방 세력의 반란을 의식하여 모든 번주들은 1년 중 6개월을 도쿠가와의 근거지인 에도에 머물게 하고 그 가족들이 나머지 6개월을 머물게 하는 산킨코타이 제도를 운영하여 반란을 견제한다.
2. 에도 시대
전통적으로 일본 정치의 중심지는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이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거지도 교토에서 가까운 오사카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정권의 근거지는 에도였고 일본의 중심지는 에도로 변경된다.
당시 경제력은 쌀의 생산에 따라 좌우되었고 이에 따라 토지 및 농민은 중요한 자원이였다. 막부는 번주들을 통제했지만 여진히 지방은 번주의 관할 지역이였고 각 번은 쌀을 생산할 수 있는 귀중한 노동력을 관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평민들이 번을 이탈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번주들이 6개월을 단위로 번과 에도를 이동하는 산킨코타이는 막대한 예산이 드는 행사였다. 일본은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로 유지되는 봉건 영주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정기적으로 많은 돈을 쓰게 되는 산킨코타이에 맞춰 상업이 발달해 나갔고 오사카는 그 상업의 중심지로 등장한다.
책에서는 이 당시의 상업으로 일본이 자체적인 배태기 자본주의 (Embryo-Capitalism)를 가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나중에 자본주의가 도입 될 때 활용될 수 있는 일본적 자산이였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 당시 형성된 관료주의도 일본의 자산으로 보고 있다. 봉건제도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막부정권은 막부 아래 도쿠가와 가신 출신이 실질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관료제도로 운영되었고 각 번도 이에 본 떠 관료제를 운영했다. 사무라이 계급은 에도 시대에 관료 계급으로 전환되었고 각 번에서 관료로 등용되지 못하는 사무라이는 떠돌이 무사인 낭인 신세로 전락했다. 에도 시대 당시에 운영되었던 관료제는 일본이 개화기 때에 효과적인 행정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3. 페리의 흑선
일본이 우리와 비해 별로 나을 것도 없는데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요인으로 언뜻 떠오르는 것은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빨랐던 개화다. 도대체 일본은 어떻게 개화를 하였기에 그런 차이가 생겨난 것일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거란 생각으로 책을 읽었는데 예상 외로 그들의 개화 과정은 내가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했다.
일본은 고립된 섬나라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내부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외부로의 노출은 기존 질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였다. 막부 정권은 엄격한 쇄국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외부의 소식은 에도의 관료들에게만 집중되었다. 상위층 관료들은 아편전쟁 등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중국 진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서구 열강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세력과 충돌이 일어난 적은 있으나 이는 우발적인 사건이였고 서구 열강이 국가적인 정책을 가지고 개방을 요구하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주 관심은 중국이였고 중국 너머 극동 지방까지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 미국의 입장은 유럽의 서구 열강과는 입장이 달랐다. 미국이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너야 했다. 당시 미국의 서부는 아직 스페인의 세력하에 있었고 그 상황에서 중국으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루트는 남미 대륙을 돌아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였다. 그 루트에서 미국은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고 일본은 그 중간 기착지로 주목 받았다고 한다.
이에 미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기로 하고 페리 제독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페리 제독은 1852년에 처음 에도 앞바다에 나타났고 1853년 더욱 강한 함대를 이끌고 다시 나타난다. 막부의 고위 관료 집단은 이에 굴복하여 개항을 하게 되고 불공평한 미일 수교 조약을 맺게 된다.
책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무리 그래도 몇 척 되지도 않는 페리 제독의 군함에 막부 정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굴복 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상대에 비해 열악한 군사력이였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저항했으면 페리도 그냥 물러 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시절의 분위기가 어떠했길래 막부 정권이 그런 결정을 했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지금의 나에게만 드는 것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그 당시 일본에 사는 사람에게도 이런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다. 외국의 사정이 알려지지 않았던 그 때에 도대체 몇 척 되지도 않는 미군함에게 어떻게 그리 쉽게 당할 수 있었는지 쉽게 납득 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4. 존왕양이
페리의 출현 당시 막부 정권 내에서 개화에 대한 의견은 양분된 상태였다. 서구 열강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은 고위층 사이에서는 공유된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지는 한이 있어도 일단 붙어 봐야 한다는 측과 페리에 굴복하여 개화를 받아들이자는 상반된 두가지 주장이 있었다.
강경파에는 최상위 계층인 친막부 성향의 번주가 포함되어 있었고 화친파에는 막부의 가신들로 구성된 최고위층 관료그룹이 있었다. 페리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일 수교 조약을 주도한 관료는 이이 나오스케였는데 그는 조약 후 반대파를 제거하는 등 강수를 두다가 결국 반대파 무사들에 의해 대낮에 거리에서 참살된다.
막부세력은 개화에 대한 태도를 두고 양쪽으로 갈라졌으며 개화 과정에서 막부 정권의 무력한 모습을 확인한 지방에서는 반발 세력이 일어난다. 막부 정권의 개화 결정에 대해 다른 세력들은 수긍하지 못했다. 의사결정 과정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한 채 최상위층에서 무리하게 개화를 강행한 것의 댓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막부 정권이 겨우 대포 몇 방에 무너지는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 개화기 때에 지석영을 비롯한 중인 계층에게 친일의 혐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사회나 기존 체제에서 한계를 느끼는 신라의 육두품 같은 세력들은 존재하고 종종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에도정권은 고립된 섬에서 철저한 내부 통제로 유지되었고 신분 이동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왔다. 대포 한방에 무너지는 정권의 무력한 모습에 그 동안 눌려 왔던 일본의 육두품들은 사방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들의 모토는 천황을 모시고 서구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그 이후의 양상을 보면 존왕양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존 체계를 뒤집어 엎는데 필요한 핑계에 불과했다. 출세길이 요원한 젊은 하급 사무라이 계층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다.
이들은 존왕양이를 외치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존왕양이를 외치고 나온 선구자는 조슈 출신의 요시다 쇼인이였는데 이 책에서 지적한대로 "그는 다른 후배 지사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조리 있는 사회 철학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존왕양이를 외치며 막부에게 대항한 그들과 막부정권은 무엇이 달랐을까? 이후의 그들의 행보에서 나는 다름을 찾을 수 없었다.
5. 사쓰마/조슈
존왕양이를 부르짖은 세력이 선구자였던 요시다 쇼인은 조슈 출신이였다. 원래 조슈의 번주는 지금의 야마모토현과 히로시마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히데요리 세력으로 참전한 죄로 야마모토현으로 영지가 축소되었다. 전통적으로 막부 정권에 대한 반감이 강한 이 곳에서 존왕양이를 외친 요시다 쇼인이 등장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막부를 무너뜨리는 주역으로 활동한다.
사쓰마 역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한 바 있다. 사쓰마는 우리로 치면 땅끝이라 할만한 일본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번이였다. 이곳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가진 강병으로 유명한 곳으로 왜구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왜구의 본거지답게 사쓰마번은 해외로 진출하려는 성향이 있어 오키나와를 복속시킨 번이기도 하다.
사쓰마와 조슈는 메이지 유신을 이루어 낸 반 막부 세력의 근거지로 유명하지만 처음부터 같은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조슈는 번주가 아닌 요시다 쇼인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의 근거지였다. 책에서는 이들을 지사라고 번역했는데 기존 번의 관료집단과는 거리가 먼 개인들이 세력을 구성한 듯한 느낌이 강하다.
사쓰마는 이와 다르게 번주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당시 사쓰마에도 존왕양이를 부르짖는 세력은 있었으나 조슈와는 다르게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들 중 관료로 등용된 엘리트 그룹이 영향력을 나타내게 된다. 사쓰마는 예전부터 위계질서가 엄격한 스파르타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사쓰마가 반막부 성향을 취한 것은 예전 세키가하라 전투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사쓰마의 번주가 반막부 성향을 보인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사쓰마가 에도 막부에 지고 있던 막대한 채무도 한 몫 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사쓰마의 실질적 번주(그는 번주의 아버지로 우리로 치면 흥선대원군쯤 된다)인 시마즈 히사미쓰의 태도는 애매하다고 느꼈다. 사쓰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번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애매함을 취하는데 번주는 아무래도 기존 질서 위에 성립된 기득권 층이기에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지사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반 막부 세력이기는 했으나 막부의 개화 정책을 대 놓고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였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쓰마와 조슈는 예전부터 철천지 원수였다고 한다. 막부 정권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많은 세력이 발호하는데 사쓰마는 이 상황에서 조슈를 계속 견제하는 선택을 한다. 한 때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마쓰는 막부와 연합하여 교토에서 조슈 세력을 몰아내기까지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쓰마와 조슈가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아는 이들이 있는 듯 한데 사쓰마와 조슈의 악연은 그 이전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며 지사 (책을 읽다보면 지사가 아니라 거의 깡패처럼 보인다) 로 불리던 개인이 주축이 된 세력은 영향력을 잃어가지만 이들 중 관료 사회에 편입된 자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존왕양이에서 존왕반막으로 입장을 변경한다. 그리고 이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6. 존왕반막
개화 직후 영국인이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히사마쓰의 행렬을 막아섰다가 무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한다. 번주 입장에서 그의 길을 막아서는 행인을 처단하는 것은 에도시대 기준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였으나 이는 외교 문제로 비화되고 영국 정부는 배상을 요구한다.
사쓰마 입장에서는 당시 기준에서 정당한 행위를 했기에 영국 정부의 배상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였고 결국 영국과 사쓰마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전쟁 후 양측이 서로 승리를 주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은 모양이다. 이 전쟁은 막부 정권이 사쓰마 대신 영국에게 배상금을 물어내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그러나 사쓰마는 이 전쟁에서 서구 열강의 힘을 느끼게 되었고 개화로 입장을 선회한다.
조슈를 중심으로 하는 지사세력은 대체로 신중하지 못하고 아마추어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결국 서구 열강의 연합군이 조슈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데 조슈는 이 전쟁에서 박살이 나고 만다. 이 후 조슈도 양이에서 개화로 입장을 변경하게 된다.
존왕양이에서 양이 대신 막부를 몰아내자는 반막이 슬로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서구를 배척하는 정서가 없어진 것도 아니였다. 일본적이지 않은 서구가치에 대한 배격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진다.
존왕양이가 힘을 얻은 것은 막부 세력이 개화를 반대하는 천황의 의지를 거슬르는 무리수를 두면서 미일 조약을 체결했고 기존 사회에 불만을 품었던 세력이 이를 공론화 하였기 때문이다. 반막부 세력의 본심은 사실 양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막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서구 열강에게 쓴 맛을 본 그들은 양이를 폐기하고 반막을 앞세웠다. 양이를 폐기하고 반막을 내세운 것은 논리상 앞뒤가 전혀 맞지 않으나 사실 반막은 그들은 정말 하고 싶은 것이였으리라.
조슈와 사쓰마에서는 존왕양이 세력 중 일부가 관료 사회로 진출하였고 이들의 주도하에 존왕반막이 정치적 슬로건으로 등장한다.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이러한 관료 세력으로 활동한다.
7. 대정봉환
서구 열강과의 전쟁으로 조슈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양이를 외치면서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던 아마추어 지사 세력들은 와해 된다. 그러나 이들 중 영국 유학을 경험했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중산 계층은 조슈의 관료로 진출하였고 서구 문물을 받아 들여 힘을 축적한다.
친막부든 반막부든 서양열강의 힘을 인정한 상태였고 개화 여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어느 편이 먼저 우월한 서구식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가였다. 반막부 세력은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고 막부는 정식 정부라는 명분을 쥐고 있으므로 시간은 막부 측에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 때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와 사쓰마는 비밀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나가무기 사건으로 인해 영국과 전쟁을 치뤘지만 도리어 이를 통해 사쓰마는 영국과 접촉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비밀동맹 후 조슈에게 서양식 무기를 공급하게 된다.
조슈는 힘을 축적해 가고 결국 반막부 세력이 번주를 잡아 가두는 쿠데타가 벌어지는 상황에 이른다. 이에 막부 정권은 조슈에 대해 토벌을 시도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이 와중에 이에모치 막부가 사망하는 바람에 철군하게 된다.
이이 나오스케가 개항을 감행하던 시절, 이에 반대했던 미토 번주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모리가 새로운 막부 자리에 오른다. 양이를 외쳤던 세력이 막부가 되었으나 예전에 양이를 외쳤던 사쓰마,조슈로 대표되는 반막부 세력과 한판 전쟁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새로운 막부는 반막부 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권력을 천황에게 반납하고 막부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신 기존의 경제력 및 군사력을 유지하기로 합의를 본다. 막부 입장에서는 내란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당시로는 최선의 방편이였다고 한다. 이에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서 돌린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되니 이를 대정봉환이라 한다.
8. 메이지 유신
대정봉환이 발표되었으나 막부세력이 온전하게 유지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일었고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축으로 한 반막부 세력은 무력으로 교토를 접수하는 쿠데타를 감행하게 된다. 쿠데타는 성공했으며 이를 일본말로는 메이지 이신,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명치유신, 우리들은 보통 메이지 유신이라 부른다.
천황은 막부를 역적으로 선포하게 되고 반막부 세력은 교토에서 에도로 진군한다. 가는 곳마다 번들은 저항의사 없이 그들에게 따랐고 책의 표현을 빌자면 진군이 아니라 그냥 행진이였다고 한다. 졸지에 관군에서 역도의 무리가 된 에도는 결전을 앞두고 있었지만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에 막부는 항복을 선언하게 되니 이로써 250년간의 에도시대는 끝난다.
흔히들 메이지 유신을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하는데 좀 어려워 보이는 한자어인 유신은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을 영어로는 Maiji-Restoration 이라 한다. Restoration은 개혁의 의미가 아닌 복고/복귀의 의미가 있다. 실제 벌어진 일은 쿠데타이고 이를 통해 옛날에 있었던 천황의 권위가 회복된 것이니 Restoration이란 단어는 그럴 듯 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하였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근대화는 천황의 왕정복고로 시작된 것이였다. 왕정을 강화하면서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이야기를 나는 처음 들었다. 왕권강화와 근대화가 같이 병행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메이지 유신 후 후속 조치로 기존의 번이 현으로 대치되는 폐번치현이 실행된다. 현은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관료가 행정을 수행하며 번주는 기존을 권한을 상실하게 되었다. 대신 번주는 이에 상응 하는 연금을 국가로부터 받게 되었고 이는 세습 귀족제를 인정하는 셈이 되었다. 이러한 세습 귀족에는 기존 번주 세력 외에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도 포함되었으며 세습 귀족은 공작, 백작, 남작등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이런 세습귀족들을 화족이라 부르는데 태평양 전쟁 후 맥아더가 폐지할 때까지 이 제도는 유지되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제정하는 등 근대국가로서의 외형을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헌법 및 국회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기 보다 귀족이나 왕이 자신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내 놓은 것에 대한 결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권력을 기존 세력이 스스로 내 놓았다는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일본은 대중이 각성하여 권력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상위 권력 계층이 변동하면서 외양을 근대국가 형태로 바꿨을 뿐이다.
9. 국회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예전의 번주는 그 지위를 상실하였다. 에도 시대가 끝나고 권력층이 변화한 것에 대한 당연한 변화였다고 할 수 있으나 번주들이 권력을 내 놓는 과정에서 별다른 반발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 아무튼 권력은 신흥세력이 장악한다. 그 신흥세력은 존왕반막의 기치를 내 걸었던 지방의 엘리트 관료 세력이였다.
조슈, 사쓰마, 히젠, 도사 4개 현의 엘리트 관료 그룹이 신 정부의 주요 자리를 차지한다. 일본 정치가 파벌로 운영된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메이지 유신 직후의 권력도 4개 지방이 나란히 돌아가며 운영되는 형태를 취한다.
무엇을 위한 존왕반막이였는지 그 지향점이 없었던 상태에서 막부에 대한 안티테제로 연합된 세력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나눠먹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권력 나눠 먹기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세력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했다.
존왕의 기치를 내걸었으나 그렇다고 천황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한 것도 아니였다. 실제 권력은 신흥세력이 장악하였고 천황은 형식적인 최종 재가만 할 뿐이였다. 신흥세력 내에 협의가 이루어진 사안에 대해 천황이 이를 거부하고 단독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신흥세력 내부에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천황은 이를 중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뿐이다.
결국 막부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권력층이 달라졌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막부 이전에 있었던 불만이 사그라질리 만무했다. 신 정부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이러한 불만을 최소화 시키면서 그들이 쥔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였다. 그런 측면에서 진행 된 것이 국회였다.
즉 일본의 국회는 대중이 권력층으로부터 투쟁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라 신흥 권력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당시 최신 유행인 서구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고안된 것이다. 국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고 상원은 세습 귀족으로 구성되며 하원은 선거를 통해 구성된다. 단 일정 재산을 소유한 자만이 선거인이 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먹고 살만한 사람은 기존 체제를 흔드는 세력에게 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결정한 방식이였다.
그나마도 하원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예산에 대한 심의 의결권조차도 변변치 않았다. 국회 제도를 창설한 주요 멤버들이 국회를 만들었던 가장 기본 원칙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회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최소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였다.
외양은 서구의 제도를 따랐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반막부 세력의 소수 엘리트가 천황을 앞세워 꼭 쥐고 있는 형국이였다.
10. 산업화
막부 정권과 메이지 유신 이후 등장한 정권 모두 개화를 하자고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메이지 정부가 막부의 개화 정책을 계승하여 실행한 부분도 꽤 상당했다고 한다. 신 정부의 주요 핵심 권력자들은 이와쿠라의 주도하에 사절단을 결성한다. 사절단은 몇 개월에 걸쳐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여 식견을 쌓고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
견문단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기존에 맺은 불평등 협정을 개정하는 것이였다. 개항 시 맺은 불평등 협정은 일본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였고 이로 인한 일본 국내의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조약으로 인한 불만을 줄이는 것이 필요했으나 현실적인 수단을 갖추지 못한 채 개정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도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견문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은 일본 정부는 이를 정책에 반영해 나간다. 정치 체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많은 정책이 실행되었고 산업부문 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당시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견사, 즉 비단이였고 주요 수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였다. 일본은 무역을 통해 면등의 생필품 및 산업 기자재를 수입하고 정부 주도하에 교통망을 구축해 나갔다.
미쓰비시는 이 당시 정부로부터 해운업에 대한 독점권을 받는 대신 정부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형태를 취한다. 정부 주도의 산업화를 수행하다 보니 당시 기업들은 이러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도 박정희 정권 당시 산업합리화란 이름으로 각 분야별로 특정 기업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방식을 취했던 적이 있다. 예전 일본에서 취했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주력 산업은 생사 산업이였다. 일본 정부는 생사의 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해 정부가 생산 기술을 각 농가에게 전파시켰고 이는 생산량 증대로 이어졌다. 우리의 농촌진흥청은 아마도 이러한 일본의 모델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이 지나고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지며 자동화 설비를 갖춘 대형 견사 공장이 등장한다.
신 정부의 정책은 부국강병에 초점이 있었다. 강병을 위한 각종 조치들이 취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해 서술은 그리 많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강병에 필요한 중공업에 대한 진척은 그리 높은 성과를 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생사산업 외에 석탄을 캐는 광산업이 주요한 산업이였는데 채굴된 석탄의 주요 고객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운행되는 서구국가의 선박이였다.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은 군사비로 지출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노령으로 물러나고 그 다음 세대가 정권을 운영하던 시기에 대한 책의 서술을 보면 정부 예산의 국방비 비중을 40%에서 30%로 낮췄다는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의 살인적인 국방비 예산이고 산업화 초기에는 아마도 더 높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든다.
러일 전쟁 중 대마도 부근에서 발틱함대를 물리쳤을 때 일본 군함 중 상당수는 독일이나 영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 일본은 서구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능력에 부치는 예산을 쏟아 부었을 것 같다.
11. 조선 진출
책에서는 그리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내 입장에서는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대정봉환으로 천황이 복권 된 후 일본은 조선과 외교 관계를 새로 맺으려고 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천황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이 때 만약 일본이 그대로 정한론을 수행하였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조슈와 사쓰마는 막부에 대항해서 서구화 된 군대를 운용했을 때이지만 대원군이 정권을 꽉 쥐고 있었던 그 때 붙었다면 운요호 사건 때처럼 조선이 어이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정한론은 결국 채택되지 못했는데 조선과 전쟁을 하는 경우 일본은 국력을 비축하지도 못한 채 서국 열강의 밥이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였다. 내 생각에도 이건 합당하다. 그 당시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조선과 전쟁을 한다고 해도 얻을 것이라고는 천황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문서 외에 개항장을 얻는 정도일 텐데 당시 일본이 그런 개항장 얻어서 무슨 실익을 찾을 수 있었을까? 득보다 실이 큰 것은 자명해 보인다.
뭔가 꼬투리 잡혔다 싶으면 '존왕양이' 같은 실체 없는 슬로건 걸고 배역 소화하기 좋아하는 세력들이 일본에는 꽤 있었다. 천황을 모욕했다는 중대한 이유가 걸린 '정한론'을 신봉하지 않을 세력이 없을리가 없다. 그리고 일본의 중앙 권력은 그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한다.
갑신정변의 뒤에는 일본이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정부 주도하에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그 일을 지원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정부 관리가 한국에서 일종의 사고를 친 것이라 생각된다. 갑신정변은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불리한 형세가 되어 버린다. 갑신정변의 결과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이였고 이로 인해 일본은 한 동안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세할 수 없게 된다.
일본은 나중에 동학혁명으로 청나라가 군대를 개입시키자 이 때 큰 마음 먹고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관여하면서 중국과 정면대결을 택하여 승리한다. 갑신정변으로 잃었던 주도권을 전쟁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로 일본은 다시 주도권을 러시아에 잃게 된다.
갑신정변과 명성황후 시해는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하나도 좋을 것이 없는 사건이였다. 더군다나 명성황후 시해는 엄청난 무리수였고 도대체 상식적인 선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악수였다. 명성황후 시해를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고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희석시키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 일본의 중앙 정부는 조선을 다루는데 있어 하부 조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그 결과 굉장히 미숙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측면이 있다.
도대체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여 무슨 이익을 보고자 했을까? 내가 일본인이라면 '을사보호조약'까지는 수긍할 수 있겠으나 '한일합방'은 무리라고 느꼈을 듯 하다. 역사가 짧지도 않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강제 병합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무리를 무릅쓰고까지 강제 병합을 정도로 조선이 일본에게 중요한 이익을 가져다 준 존재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조선을 강제 병합하지 않고 괴뢰 정부를 세워 동맹국 형태로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은 한일 동맹군의 형태로 벌어졌을지도 모르고 2차 세계 대전에서 우리는 일본과 나란히 패전국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한일간 감정의 골이 이렇게 깊게 패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문화적으로도 일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같은 문명권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망상도 든다.
12. 러일 전쟁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조선은 러시아 세력이 득세한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러시아는 분명 힘에 부치는 상대였다. 일본은 전쟁이라는 정면 대결 상황은 피하고 줄거 주고 받을 거 받는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다 한다.
당시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였으나 도리어 각축장이기에 각 세력간의 견제가 벌어져 어느 한쪽이 득세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였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각종 이권을 청나라에게서 획득했으나 서구 열강 입장에서는 일본이 중국이라는 밥상에 숟가락 올려 놓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거둔 노획물을 스스로 반납해야 했다. 아직 일본의 힘은 미약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서구 열강에 대해 힘의 열세를 절감하고 있던 일본이 러시아에 대해 처음부터 강경한 자세를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영국은 러시아 세력이 남하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를 견제하기 원했으므로 일본과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다. 각종 외교 채널을 동원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는 협상이 결렬되었고 결국 일본은 대 놓고 러시아를 공격한다. 러일 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져 만주의 뤼순항까지 일본군이 쳐 올라가는 양상이 된다. 1년여 동안의 전쟁 끝에 결국 뤼순항은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포위된 뤼순항을 구원하기 위해 흑해에서 출발한 발틱함대는 대한해협에서 도고 제독에게 격파된다.
이 때 미국이 중재에 나서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을 연다.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사할린 북방 영토 및 조선과 만주에서의 각종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챙겼다. 그러나 책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정작 일본 국내에서는 강화회담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폭동이 일어나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구 열강을 상대로 따낸 최초의 승리에 너무 들떠 있었던 것이다. 청일 전쟁에서 보였던 서구 열강에 대한 저자세를 이번에는 극복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나 일본은 승전을 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영국과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책에 언급 되지는 않았지만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는 러시아의 두 배에 이른다고 한다. 전쟁에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무력으로 보면 러시아에 오히려 밀리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일본이 강화회담을 받아 들인 것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였다. 만약 이 당시 노마노프 왕조가 건재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 할 수 있었다면 일본의 승리는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였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였으나 이를 일본의 실력으로 이루어낸 성과로 보는 것은 착시의 소지가 다분하다.
13. 만주 사변
러일전쟁까지만, 딱 거기까지만하고 내적인 안정을 추구했다면 일본은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결코 내적인 안정을 구축할 수 없었고 그 불안정함은 외부로 발산되었다.
내적 안정을 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볼 때 메이지 유신 이전과 이후의 일본 사회는 권력의 이동 외에는 근원적인 변화가 없던 상태였고 서구의 문화를 받아 들이면서 벌어지는 충돌을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다만 일본은 섬나라로 고립되어 있고 좁다. 천황을 앞세운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문제들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 권력에 맞서는 다른 세력들은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천황을 우러렀고 애국을 앞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행동에서 천차만별의 행동을 취했다.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천황이라는 존재로 충분했지만 각 구성원들의 행동에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통합적 사회적 가치로써 천황은 부족했다. 그리고 일본은 천황 이상의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일본의 중앙 권력은 다른 세력을 통제하는데 실패한다. 통제되지 않은 세력은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실제로 이를 구체적인 행위로 표출했다. 국가의 중대사인 전쟁에서도 그러했다. 중앙 정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던 일본은 연쇄적으로 전쟁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만주 사변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의 중앙 정부는 개화 이후 서양적 가치에 익숙한 정치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 유신 세력의 권력을 이어 받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권력에 접근하는데 있어 메이지 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기존의 정치 구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선을 지키는 것으로 적당한 자유주의와 적당한 일본적 가치를 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의 자본주의 세력은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였다고 한다. 일본의 주요 시장은 중국이였는데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 반일 감정을 촉발하여 사업이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었다. 또한 전쟁 비용 및 점령 후 유지 비용으로 인한 재정 증가는 감당키 어려운 수준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중국 진출은 외교적으로는 다른 열강의 견제가 무릅써야 하는 일이였다. 당시 미국은 각국의 특혜를 동등하게 유지하자는 Open-Door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이 당시 일본에는 다른 견해가 있었는데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철강, 석탄과 같은 자원이 필요한데 그 수준에 필요한 자원은 일본 국내에 없으므로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 당시 이런 자원을 조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곳은 만주였다.
러일 전쟁에서 획득한 만주의 이권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해 있던 관동군에서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장교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여러 군벌로 분열되어 있었고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장쭤린이 만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 중앙 정부의 입장은 장쭤린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만주에서 경제적 이득을 획득한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장쭤린이 장제스와의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발생한다. 일본 정부는 장쭤린을 지원하여 만주에서의 이권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입장이였으나 어이없게도 관동군의 일개 장교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장쭤린이 탄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장쭤린을 앞세우는 것보다 직접 관동군이 나서 만주를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일은 워낙 엄청난 일이라 쉬쉬 하고 넘어갔으나 관동군은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결국 남만주 철도 폭파 사건을 계기로 관동군은 만주에서 중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중앙 정부와 군 고위층은 전쟁을 막아보려 했으나 일단 일이 벌어지자 수습할 여지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관동군은 승리를 거두고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주요 정치 요직에는 관동군 고위층이 임명되기에 이른다. 흡사 사쓰마가 막부 정권과는 상관없이 자체 결정에 따라 오키나와를 정복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일본이 애초에 의도했던 자원 확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까?
14. 중일 전쟁
만주국 성립 이후 일본의 철강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필요한 양에 비해서는 모자란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주국 성립으로 인해 관동군의 방어선은 넓어졌고 만주에서 일본에 저항하는 전투는 계속 벌어졌다. 그 이전보다 자원이 더 필요해졌다.
만주에는 분명 자원이 있었으나 일본이 필요한만큼 자원을 구할 수 있는 인프라는 아직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은 여기에 자본을 투입해야 했으나 당장 필요한 군비를 확보하느라 만주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만주가 모든 자원을 제공해 주지는 않았다. 고무, 원유등의 자원도 필요했고 만주사변으로 그 수요는 더 늘었으나 그 자원들을 쥐고 있는 것은 서구 열강들이였다. 중국에서 세력을 넓히는 일본을 서구 열강들이 견제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했고 일본은 자원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쟁 목적 중 하나는 자원 확보였으나 오히려 자원이 부족해지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소화하지도 못할 것을 욕심에 집어 삼킨 꼴이였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전쟁이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말았다. 일본 사회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방향을 수정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거듭 말하지만 일본은 각 세력이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여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추를 잘못 꿰었으면 풀어서 다시 맞춰야 하나 단추를 푸는 것에 반대하는 세력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벌어진 현실이 가는 방향으로 그냥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자원이 부족하니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전선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선이 확대 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자원부족을 심화시키고 다시 전쟁을 벌이는 패턴으로 반복된다. 결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역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주사변 이후 다른 전쟁이 벌어질 것이란 것은 뻔한 문제였다. 일본은 중국의 장제스를 만주국 안보에 있어 크나큰 위협으로 인식하였고 중앙 정부의 입장이 어찌 되었든 전쟁이 벌어질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였다.
중국과의 전쟁을 원하는 일본의 배후지에는 소련이 있었다. 일본은 이를 두려워 했고 당시 유럽에서 신나게 연승행진을 벌였던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을 보고는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3국 동맹을 맺는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이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을 침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그러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바람에 일본은 뒷통수를 맞은 셈이 되어 버린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사정 속에 결국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중일전쟁이 촉발되고 일본은 단숨에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한다. 그 과정에서 남경대학살이 벌어지는데 이것 역시 전장에서조차 군인들이 통제 불가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점령 지역에 친일 정부를 세우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선호하는 현지 친일세력이 서로 달라 꽤 많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점점 통제불능의 상태로 치달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괴멸되지 않은 채 중경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공산당과 합작하여 대일 항전을 계속하였다. 주요 도시는 일본 손에 떨어졌으나 전쟁을 계속되었고 자원 부족분은 더욱 커졌다.
15. 태평양 전쟁
중국 접수로 인해 일본은 서구열강과 정면으로 맞서는 입장이 됐다. 그들이 쥐고 있던 자원이 일본에게 들어갈 리 만무했다. 인도네시아를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는 원유량을 늘려달라는 일본의 요구에 무력적 수단 외에는 원하는 바를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당시 일본의 최대 원유 수입국은 미국이였으나 미국 역시 일본에 호의적인 입장은 아니였다.
일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자원을 취하기 위해 서구 열강과 전쟁을 벌여 동남아를 접수할 것이냐 아니면 중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일을 되돌릴 것이냐였다. 동남아 접수는 필리핀도 포함되었고 이는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일이였다.
남아 있는 자원이 계속 떨어져 가던 상황이였으므로 의사결정은 촉박한 시간 내에 이루어져야 했다. 외교 관료 및 일부 군 고위층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였다.
남은 자원으로 전쟁 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군부는 기어코 전쟁을 벌이고 만다. 동시다발적으로 진주만과 동남아에 공격을 감행하여 단기간에 승리를 챙긴다. 점령한 동남아 지역에는 역시 친일 성향의 괴뢰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 한 방이 전부였다.
점령 지역에서 자원을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더 넓어진 전선으로 인해 자원의 수요는 늘어났고 자원의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였나 일본은 이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동남아 점령지의 현지인들의 생활은 더 고달파졌다. 기존의 고객(?)이였던 서구 열강과의 교역은 끝장 난 상태였고 일본은 이전 시장을 대체할만큼 거대한 시장이 아니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못된 전쟁이였다. 책을 읽다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일본이 왜 전쟁을 해야 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진작 끝내야 하는 전쟁임에도 계속 내달렸다. 도대체 왜 내달린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해야 하니까 계속 한 것 뿐이다. 되돌아 가는 길을 택하지 못하고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앞으로만 간 느낌이다. 믿는 것은 그저 한 방이였다.
그 한 방으로 미국을 완전히 보내 버릴 수 있었다면 몰랐을까 일본은 중국도 한 방에 눕히지 못했고 미국 역시 그러지 못했다. 중국과 미국은 군사적 행동으로 한 방에 눕히기에는 너무 큰 나라들이였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주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일본의 사필귀정이였다.
16. 군사 점령
태평양 전쟁의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뒤늦게 협상을 통해 최악의 상황은 피해보려 하였으나 연합군 수뇌들이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함으로써 이마저도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조서 발표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한다. 항복 조서 발표에 이어 동경 앞바다의 미주리호에서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은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일본 역사상 최초로 군사적 점령을 당한 것이였다.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는 다 아시다시피 맥아더 장군이였다. 그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우리에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아마도 천황의 처리 문제일 것이다. 쇼와 천황을 주요 전범으로 취급하여 그를 재판정에 세웠으면 어땠을까? 이는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일 중 아쉬워 하는 것 중 하나였을 것이다. 독일은 전후 청산을 했는데 일본은 하지 못했고 일본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변한 것이 없다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의미가 없다지만 만약 쇼와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고 일본의 천황제를 폐지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원복씨는 한일합방이 대외경험이 없었던 일본의 미숙함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을 그의 책에서 피력한 바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나는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미군정이 천황제를 폐지한다면 그것 또한 미숙한 결정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까?
미국은 일본을 51번째 주로 삼는 그런 일은 행하지 않았다. 과거 막부와 메이지 세력이 그러했듯이 천황을 끼고 권력을 행사했다. 천황의 존재는 인정한 채 새롭게 신 내각을 꾸리고 내각을 통해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미 군정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를 일본의 정치 체제로 정착시키는 것이였다. 당연히 헌법부터 손을 댔다. 메이지 유신 때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작성되었던 일본의 헌법은 미국의 주도하에 새롭게 태어났다. 이것이 지금도 일본의 헌법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른바 평화 헌법이다.
기존 일본 헌법은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명시하고 있었으나 당연히 평화 헌법에는 그런거 빠진다. 평화 헌법은 정당한 절차에 의해 운영되는 의회 민주주의를 일본의 정치 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가끔씩 논란이 되는 일본의 평화헌법 9조는 맥아더의 강력한 요청으로 생긴 것으로 일본의 교전권을 부정하고 있다. 헌법에 따르면 일본은 육해공군 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할 수가 없다. 자위대의 전신은 전후 요시다 수상이 치안을 목적으로 결성한 경찰대이다. 분명 자위대는 군대이지만 그러면서도 군대의 지위를 누릴 수가 없는 이상한 위상을 가진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손을 통해 일본을 통치하려 한 이상 기존 관료 세력의 등용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앞서 살펴 본 바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존재만 공유한 스펙트럼이 넓은 세력들이 존재했다. 친미 성향의 정치인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화헌법을 기초한 시데하라 수상이나 전후 일본을 재건한 주역으로 평가받는 요시다 시게루는 전쟁 전부터 친미를 표방했던 외교관 출신들이다. 전쟁 때 보여준 행적이 의심스러운 이들은 공직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중 일부는 다시 복귀하게 된다.
메이지 시절의 국회는 신 정부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한 권력은 절대 밑으로 이양되지 않는 법이다. 일본에서 아래로의 권력 이양은 결국 전쟁의 패배로 인한 외부의 압력에 의해 실행되었다.
군사 점령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끝난다.
17. 전후 현대사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군사 점령이 시작된 시점을 아마도 일본 현대사의 시작으로 봐야 할 듯 싶다. 외부 세력인 맥아더는 현재의 일본을 Setting 해 놓았다. 이 시절 정치계는 친미적 태도를 취했던 전직 외교 관료가 주역이였고 대표적인 이는 전후 복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는 받는 요시다 시게루가 포함된다.
이 책에 의하면 미국은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의 파트너로 중국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그 구상은 좌절되고 일본이 그 대안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본의 전후 복구에 기폭제가 되었고 미국의 입장이 변경되면서 일본은 전후에 빠른 경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후 현대사에 대한 내용은 대충 읽은 탓인지 기억나는 것이 많지가 않다. 사실 내 관심은 일본의 현대사가 아닌 근대사였으니 상대적으로 이 부분에 그리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일방적인 무역 흑자로 인해 서구 국가들로부터 압력을 받았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국제 원조를 많이 했다는 것. 그리고 나카소네 수상 시절에 수출 지향 정책을 변경하여 국내 시장을 키우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일부 수행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18. 맺음말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우리와는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책을 읽으면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 외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고 기껏 이런 세력에게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메이지 유신, 그러나 그 과정을 보면 뭔가 알맹이가 빠졌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무엇을 위한 존왕이였고 무엇을 위한 반막이였나? 책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천황을 일본의 국체로 정의한 헌법으로 근대화를 하려 했다니. 공허한 근대화였다.
섬이라는 지리적인 특색은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격리시켜 주었지만 역으로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조성해 준다. 그저 천황을 인정하고 천황의 이름을 앞세운다면 그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 그러나 천황이라는 존재는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세력들은 통합되지 못했다.
근대화에서 개인의 완성을 경험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할 기회를 아예 가지지 못했다. 그러기는 커녕 대포 한방에 무너져 내린 경험 탓인지 근대 일본을 움직인 주요 동력은 두려움인 듯하다. 일련의 전쟁에 뛰어드는 일본의 모습에서 두려움에 사로 잡혀 한 치 앞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언뜻 언뜻 보인다.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일본은 서구 열강의 눈치를 계속 보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그 자체도 서구 사회에 대한 일본의 열등감이 많이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 역시 미국이나 서방 세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페리의 대포 한 방에 무너져 개항을 했던 그 굴욕감은 어쩌면 지금 현 시점에서도 계속 되고 있을 수 있다.
일본이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견해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 과정을 보면 공허하기 그지 없다. 마땅히 따르고 싶은 어떤 울림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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