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YouTube 주소에서 봤던 동영상 내용에 대한 리뷰이다. 러일 전쟁 후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변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Qon_2beP74&list=PLoB3gj5gCeL_FSrEkYl4YcJwKpbcLiJWx&index=4 

 

원래 독후감은 책을 읽고 써야 하는 것인데, 동영상의 내용이 워낙 좋고 왠만한 서적보다 훨씬 깊은 내용을 제공하기에 독후감 형식으로 영상 리뷰를 써 본다. 2.26 쿠데타의 내막은 그 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2019년 일본 해군의 1급 기밀 문서가 발견되면서 반란과 진압에 이르는 4일 간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적으로는 이에 대한 내용을 아직 접해 본 적이 없다.

 

영상 제작자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닌 일본 군부의 사정을 나름 긴 호흡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본이 군군주의로 내달려 했던 나름대로의 사정을 이렇게 잘 전달한 내용은 아직 접해 보지 못했다. 영상 내용들을 내 자신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여 요약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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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정변 (1913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전국이 되어 당시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던 만주지역의 이권 및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였으나 전쟁배상금은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된다. 조선을 병합하고 요동의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은 없었고 전쟁 이후 전쟁 특수도 없어지자 경제불황에 시달리게 된다. 이 와중에 1912년 육군대신이 조선에 2개 사단 증원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사이온지 내각에서 경제 상황으로 볼 때 무리라며 이를 거부하게 된다. 이에 육군 대신은 후임자 없이 사퇴하는 방법으로 사이온지 내각을 실각하게 한다.

육군대신 사임으로 내각이 실각한다는 것이 뭔 소리인가 싶을 것인데, 당시 일본 내각은 법적으로 육군대신이 없으면 내각이 성립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육군대신은 오로지 현역군인만 될 수 있었기에 군부에서 작심 하면 이런 방법으로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사이온지 내각 실각 후 가쓰라 다로가 3번째로 내각을 꾸리게 되고 당연히 육군 증강을 실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문민정치인들이 이에 반발하였고 당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던 대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폭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결국 가쓰라 다로의 3차 내각은 1913년 2월 20일, 집권 62일 차에 총사퇴 하는데 이를 "다이쇼 정변"이라 한다.

다이쇼 천황 시대에 각 방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자유주의적 풍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데 그 기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소피니언 디데아"는 가쓰라 다로  3차 내각이 총 사퇴한 1913년의 "다이쇼 정변"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점으로 보는 듯 하다. 실제로 "다이쇼 정변" 이후의 일본 내각의 집권 정당을 살펴보면 군부세력은 1916년-1918년 동안 집권한 데라우치 내각 뿐이고 나머지는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이 번갈아가면서 집권하게 된다. 즉 평민 중산층이 포함된 문민정치로 권력 중심이 이동한 시발점이 "다이쇼 정변"이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 의회는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이었고 사실상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주축이 된 화족이라는 귀족 계층이 국가 권력을 독점해 왔었다. 이들 화족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을 주도한 세력이며 외교 정책과 고위 관료 임명 권한은 이들 화족으로 구성된 일본의 상원인 추밀원에 있었다. 반면 하원은 선거로 구성되는 중의원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정부 예산에 대한 권한은 있었으나 초기 중의원은 화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상류층 계층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암살한 이토 히로부미는 의회의 권한을 크게 제한시킨 무늬만 의회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긴 했지만 어쨌든 영국 유학파 출신답게 의회주의자였고 절충과 연대를 중시하는 성향이었으며 입헌 정우회라는 문민정당을 창당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의 대척점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었는데 그는 프로이센 군제를 도입해 일본 육군을 창설한 인물이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장본인이며 청일전쟁 때 육군대신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비교적 온건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 된 후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계자인 가쓰라 다로의 1차 내각이 집권하게 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주인공이 바로 이 가쓰라 다로이다. 가쓰라 다로 1차 내각의 집권 기간은 1901년-1906년인데 기간에서 알 수 있듯 러일전쟁과 조선병합이 가쓰라 다로 1차 내각에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역으로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 시켰다는 의견은 나름 일리는 있는 셈이 된다.

군부세력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진영에 가쓰라 다로가 있었다면 문민의회를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 진영에는 프랑스 유학을 경험했던 사이온지 긴모치가 있었다. 이들 진영은 번갈아가며 내각을 운영해 왔었는데 "다이쇼 정변"으로 가쓰라 다로가 53일만에 사퇴하게 되면서 군부세력이 문민의회에게 밀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문민의회는 다시 귀족 및 지주 계급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입헌정우회와 도시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입헌민정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하게 되며 최초의 평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가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1918년~1921년 동안 총리대신으로 집권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절정을 맞는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1922년)

입헌정우회의 하라 다카시가 집권하던 일본 내각은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파리강화조약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동반도와 남양군도 (팔라우/마샬/트럭 제도)에 대한 영토 주권을 인정 받는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던 일본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호황을 누렸고 만성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화를 겪는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함대를 지중해에 파견하기도 했지만 유럽 지역의 전면적인 군사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 및 태평양 일대의 거점을 손쉽게 차지하면서 경제적인 성과도 같이 올린다.

1913년의 다이쇼 정변으로 시작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1차 세계 대전의 호황을 맞아 절정으로 흘러간 것이다. 1919년의 3.1 운동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 것도 이러한 일본의 당시 분위기와 분명 관련이 있으며 이후 1920년대에 경성에서 모던보이/모던걸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류의 단편임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시류 속에 군부세력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는데 그 결정타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다. 지금까지는 밀덕들이나 관심 있을 조약인 줄 알았으나 영상을 통해 전해진 내용을 보니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정치사 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약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전쟁에서는 승전국이 식민지 획득 및 전쟁 배상금을 받게 되면서 전쟁 승리가 경제적 이익으로 직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열강들끼리 모든 자원을 총동해야 했던 1차 세계 대전은 경제적 이익이라고는 전무했고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후유증만 있을 뿐이었다.

독일은 패전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승전한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게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부과 했지만 경제 파탄 상태에 있던 바이에른 공화국에게 배상금 지불 능력은 없었다. 사정이 이러니 승전국들은 받지도 못할 배상금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무슨 수를 내야 했는데 그 와중에 군비에 대한 부담감이 영국은 짓누르게 된다. 육군은 병력 숫자로 규모를 논하고 해군은 함선 배수량으로 규모를 논하는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국은 해군력에 대한 경쟁 우위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이를 감당할 형편이 도저히 되지 않았다.

한편 미국은 우드로 윌슨의 뒤를 이어 웨런 하딩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고 그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상 회복을 호소하는 고립주의적 대선 공약으로 당선 되었다. 이런 형편에 해군력 강화를 위한 군비 지출은 당연히 줄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한편 일본은 1921년 기준으로 국가 예산의 30% 이상을 해군의 함선 건조 비용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이 당시 내각인 문민정권인 하라 다카시 내각이었음에도 해군의 건함 비용은 지금 기준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내각 입장에서는 군부의 무리한 요구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각자의 사정에 따라 배수량 기준으로 영국과 미국이 각각 100, 일본인 60,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약 30의 비율로 주력함의 배수량이 제한을 받게 되었고 그 외 함포 구경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 또한 주력함의 신규 건조는 10년 동안 중지하고 건조 중인 주력함은 모조리 건조 중단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10년 동안 해군력은 아예 증강하지 말라는 규정이었다. 이런 군축 조항은 군사적인 면 뿐만 아니라 정치 지형에도 큰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우선 일본 문민정부 내각의 의도대로 해군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의 30%를 건함비용으로 쏟아 붓고 있었으니 그 비용을 집행하는 해군의 영향력 또한 대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10년 동안 주력함의 건조 비용이 0원이 되었으니 영향력이 쪼그라 들 수 밖에 없다. 해군력이 위축됨에 따라 덩달아 육군의 규모가 줄어드는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섬나라 일본은 해군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일정 수준 이상의 육군 규모는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에 군부는 계속 예산이 줄어들고 규모가 축소되어 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군부의 불만을 누적 시켰고 결국 터져 나오면서 갑작스럽게 군국주의로 돌아서게 된다.


육군 군부 내 파벌

 1차 세계 대전를 통해 일본은 경제적 실익과 승전국 지위를 이용한 영토의 확장을 같이 이뤄내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1920년대 인구 증가수는 매년 100만명 수준이었고 일본 본토 4개섬의 인구는 모두 8000만에 달했다고 한다. (한반도는 해방 당시 인구가 2000만 이었다) 하지만 당시 초기 자본주의 사회가 그러했던 산업화의 혜택은 소수 자본가 및 권력자들에게 돌아갔고 일반 대중은 여전히 궁핍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 와중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농산물 가격이 자주 폭등하는 양상이 벌어졌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교육 수준이 높아져 각성한 일부 대중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소동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당시 일본 경제 규모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이에 더해 부의 집중까지 이루어지니 사회적인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했고 이에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좌익 세력이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다. 무산 계급의 젊은이가 시궁창 같은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학비가 싼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되면서 노동력이 감소한 고향집에서는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딸을 사창가에 팔아 넘기는 일도 제법 빈번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젊은 장교들은 가슴 속에 한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고생하여 임관하였지만 워싱턴 군축 조약의 영향으로 처우는 신통치 않았고 군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보직 숫자마저도 줄어드는 위기를 맞게 된다. 거기에 더해 군대의 규모는 줄어 들었지만 러일 전쟁 시대의 고참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영관급 장성급 인사 적체가 심해졌고 이에 파급되어 위관급에서도 인사적체가 발생하는지라 계급 정년에 걸려 강제 전역을 해야 하는 일도 생기게 된다. 즉 세대 내 경쟁이 아닌 세대간 경쟁 구도가 성립하게 되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위관급 장교들은 군의 수뇌부들을 높은 봉급만 축내는 무능한 기득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위관급 장교들이 "황도파"라는 파벌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들 파벌의 정신적 지주는 엉뚱하게도 수정주의 사회주의자인 "기타 잇키"라는 민간인 이었다. 기타 잇키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천황을 중심으로 나찌정부를 운영하자는 이야기이다. 강력한 왕권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완성하자는 것처럼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이야기이지만 암튼 이런 소리를 하는 "국가개조론"이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게 먹혔다. 황도파는 폭력적인 군사혁명으로 의회를 갈아 엎고 자본가를 타도할 것과 일본의 가장 큰 적을 소련으로 보고 중국 및 만주국과 연대하여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지면의 낭비이지만 또라이 기타 잇키의 신박한 사상을 일부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천황이라는 유일하고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사회주의 이상이 강제되는 전체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의회를 통한 변혁에는 한계가 있으니 반드시 군사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동서양의 역사는 내전이 막을 내린 봉건국가의 통일에 대한 기록이다. 이 시대의 국제 전쟁이 끝난 뒤에나 올 수 있는 평화는 반드시 봉건적인 평화여야 하다.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일본의 보호와 지도가 없으면 독립 할 수 없으며 봉건적인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세계 만방이 모두 천황의 품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천황이 존재하는 대일본 제국의 출현으로만 가능할 것이며 일본 제국이 세계의 모든 국가를 지배했을 때에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100만엔 이상 모으는 것을 금지하고 주요 산업은 국유화 해야 하며 여자는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해야 한다.

 

국뽕에 취한 일베 회원의 Z급 망상글을 읽어 보는 듯 하다. 잇키 본인은 본인이 설파한 이러한 국가의 모습을 "전체주의적 국가사회주의"라고 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사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 체계에 대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을 뒤집어 엎고 일본이 지구 전체를 봉건질서로 통일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하자는 이런 헛소리에 20대 초반의 위관급 장교들의 피가 끓어 오른 것이다. 그들은 뭐가 되었던  들끓어 오르는 에너지를 해소할 명분이 필요했다.

"황도파"가 무산계급 군부세력이었다면 이에 대척점에 서 있는 파벌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주축이 된 "통제파"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기존 의회정치를 존중하고 내각의 통제 아래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키워가야 한다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예들이었으며 군 수뇌부 및 엘리트 장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첫번째 주적은 중국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선과 대만을 병합한 후 일본의 이익선을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했었는데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만주북벌을 주장하였으니 "통제파" 입장에서 당시 중국은 만주라는 이익선을 위협하는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 관동군이 주축이 된 만주파도 있기는 했지만 일본 본토에서 육군 파벌 간 갈등은 주로 무산계급 "황도파"와 유산계급 "통제파" 간에 벌어졌다. 1920년대 말미인 1929년에 미국발 대공황이 닥치며 일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개화 때부터 일본적인 가치와 서양적인 가치의 충돌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다가 대공황으로 경제 상황까지 어렵게 되니 반 시장주의, 반 자본주의적 시류가 점점 강화되는 와중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연장으로 이루어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이 이루어지면서 해군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된다. 이렇게 사회가 불안해지니 여기저기에서 일본 의회정부를 곤란하게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첫번째가 1931년 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시와라 간지가 지휘하는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일본 중앙 정부는 이시와라를 통제하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이시와라 간지는 사실상 항명을 하면서 일을 저질렀는데 결과적으로 성과를 만들어 냈고 이에 대해 일본 중앙 정부는 이시와라를 어쩌지 못하고 공적을 어물쩍 인정해 버린다. 일본 중앙 정부와 군 수뇌부의 무능이 만천하에 확인된 것이다.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데 무능한 모습을 보인 내각과 군 수뇌부는 이후 계속 호구 취급을 받는다.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5월 15일, 극우단체 혈맹단 11명이 정당/재벌 타도를 목표롤 쿠데타를 일으키고 여기에는 해군 위관급 장교 10명, 육관 사관생도 11명 등이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해군 소위 구로이와 이사무가 현직 총리 대신인 이누카이 쓰요시를 사살한다. 해군 장교들이 여기에 가담한 건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대한 불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가담자들은 전국적인 구명운동과 35만명의 서명으로 전원이 2년 내에 석방되는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된다. 일본 국민들은 반 지성주의, 반 자본주의. 반 시장주의, 반 의회주의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저 쓸모 없는 의회를 갈아 치우고 뭔가 화끈한 변화를 바라게 된 것이다.

1931년의 이시와라의 하극상을 시작으로 매년 쿠데타 시도와 살인테러가 발생한다. 1932년의 5.15 쿠데타는 해군장교가 가담했지만 이후 3년 동안 매년 "황도파"가 주축된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으며 결국 1936년 2월 26일에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에서 무려 육군 병력 1400명이 동원된 대규모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다.


2.26 쿠데타 (1936년)

"황도파"는 메이지 유신은 끝났고 새로운 쇼와 유신이 필요하다며 쿠데타를 일으킨다. 당시 수도 도쿄의 방어는 육군 1사단에서 맡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1사단의 구리하라 야시히데 중위가 주도하고 25명의 위관급 장교가 가담하여 1400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쿠데타가 2.26 쿠데타이다. 쿠데타 수뇌부들은 1400명 병력을 6개조로 나누어 총리대신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을 암살하고 육군성과 경시청을 점령하였으며 언론사를 장악하는 군사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 히로히토 천황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면서 일이 꼬이면서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

황궁 수비대까지 쿠데타에는 가담하였으나 실제 실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황궁 출입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쿠데타 발발 후 여러 대신들이 히로히토 천황을 만나고 어전 회의까지 열리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가 쿠데타 세력을 부정하면서 쿠데타는 진압된다. 쿠데타 군은 고위 관료 암살을 진행하였으나 엉뚱한 사람을 총리대신으로 오인하여 사살한 덕에 총리대신은 살아 남게 된다. 그렇게 쿠데타 군은 온갖 분탕을 친 후 도쿄 시내 거점을 점거한 채 히로히토 천황만의 응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간신배들을 척결하고 천황을 위한 대의를 위해 행동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천황이 자신들의 뜻을 따라 줄 것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육군 수뇌부 측에서도 대세가 결정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그들을 반란군이라 하지  않고 결기군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 입장에서 걸렸던 문제는 자신의 동생 야스히토의 존재였다. 유약한 이미지의 히로히토와 달리 야스히토는 활발한 성격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국민적인 인기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그가 황도파의 사상에 동조하여 히로히토에게 직접 "친정을 펼치고 헌법을 정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고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야스히토는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직위에서 해제되어 참모본부 작전과로 보직을 옮긴 상태였다.

히로히토 입장에서는 국민적인 인기가 있는 동생의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잠재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고 본 모양이다. 그런데 동생과 동일한 주장을 펼치며 도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히로히토는 제일 먼저 황족 중에서 해군제독을 지냈던 고위인사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단독 면담을 했고 해군이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지 않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아마 해군제독 출신의 황족도 면담을 하면서 히로히토의 눈치를 엄청 보면서 대응을 했을 것이다. 이에 히로히토는 해군에게 도쿄와 오사카에 해군 함대를 출동시킬 것과 해상 육전대를 도쿄 시내로 출병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육군 수뇌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히로히토 천황의 눈치만 보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어전회의까지 열리게 되는데 여기에서 히로히토는 반란군 진압을 위한 계엄령에 손을 들어주며 "만약 육군이 자신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짐이 나가서 직접 막을 것이요"라는 직설적인 입장표명을 하게 된다. 혹시라도 육군이 쿠데타 반군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해군 전력을 도쿄 앞바다에 배치를 해 놓기도 했다. 잘못하면 육군과 해군과의 내전으로도 번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까지 히로히토는 각오했던 것이다.

반란 3일째 쿠데타 군에게 원대복귀를 명하는 히로히토의 명령서가 전달되고 4일째에는 육군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도쿄 시내에 진입하게 된다. 이에 반란군과 계엄군이 도쿄 시내에서 서로 대치하였고 해상에서는 해군의 함포가 반란군 거점을 정조준하는 상황이 되었다. 반란군 장교들은 쿠데타가 실패했음을 깨닫고 히로히토 천황에게 할복 허가라도 받기를 원했으나 히로히토 천황은 이를 거부하고 원색적으로 반란군을 비난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반란군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입궁한 동생 야스히로도 히로히토에게 엄청난 질책을 듣게 된다.

결국 일본 스타일 답게 격렬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반란군 사병들은 원대 복귀 하였으며 반란군 수뇌부들은 산노호텔에서 계속 대치하다가 할복자살을 하느니 항복 후 재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만천하에 알리기로 한다. 하지만 그 중 2명은 현장에서 권총자살을 시도했고 한명은 사망했으나 한명은 자살시도가 실패했다고 한다. 자살시도가 실패한 이는 안도 테루조 대위였는데 이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나 지금도 일본 극우세력에게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쿠데타 수뇌부들은 군사 재판을 받기는 했으나 자신들의 희망과는 달리 언론과 방청객이 없는 비공개 재판이었고 변호인도 없고 상고도 없는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형식적인 재판이 열렸던 것이다. 그 이전에 총리대신을 살해했던 쿠데타 가담자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것에 비해 2.29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은 전원 사형이 내려졌고 신속하게 형이 집행된다. 그것도 모자라 기타 잇키를 비롯한 쿠데타 비가담 인물들도 체포되어 사형을 받는다. 이렇게 2.29 쿠데타는 실패하게 되고 황군파는 몰락하여 통제파가 군부를 장악하게 된다.

군국주의 시대로 들어가다.

황군파의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사상 중 반소련 친중국을 제외한 나머지는 결국 성공적으로 동작하게 된다. 히로히토는 자신의 친정을 요구했던 쿠데타에 대해 친정으로 쿠데타 반란군을 진압했다. 쿠데타 반란군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한 상황이었겠지만 아무튼 일은 그렇게 흘러갔고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자신이 살아 있는 권력임을 만천하에 확인시켰다. 또한 히로히토 천황 입장에서는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권파 보다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부가 천황의 권력을 확장하기에는 더 좋은 상대였다. 역설에 다시 역설이 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히로히토는 해군과 육군의 오랜 반복을 활용하여 갈라치기를 통한 충성 경쟁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황도파가 그렇게 염원했던 쇼와유신이 엉뚱하게도 통제파를 통해 완성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계엄령이 수시로 발동되면서 군부의 무단통치 시대에 들어가게 되고 내각은 정당 정치인이 아닌 군인들로 채워지게 된다. 결국 군부 팽창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일본은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는 군국주의 국가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에 바로 그 이듬해인 1937년 중국을 주적으로 삼고 있었던 통제파가 기어코 노구교 사건을 통해 중국을 침공하는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이 때 만주사변의 주역이었던 이시와라 간지는 중국보다는 소련이 더 큰 적이라 보고 중화민국과 만주국 그리고 일본이 연합하여 소련에 대항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만주를 개발하고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면 1950년대 쯤 소련과의 전쟁이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한다. 아울러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 소련보다 더 강한 미국과 영국을 적으로 돌리게 되고 결국은 동남아까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다. 쓰레기 같은 인물이지만 이 정도면 대단한 혜안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이시와라 간지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동문서주 뛰어 다녔으나 결국 통제파에게 모두 좌절되었고 결국 한직을 떠돌다고 중장으로 예편한 후 대학에서 2년 정도 군사학을 가르쳤지만 그나마도 군부의 압력에 학교에서도 쫓겨난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서 태평양 전쟁 동안은 민간인 신분이 살았기에 전범으로 기소되기는 커녕 도조 히데키의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도조에게 불리한 증언만 잔뜩 했다고 했다. 인간사는 참으로 한치 앞도 모르는 일이다.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이런 사정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모던보이/모던걸이 나타났던 시절이 끝나고 폭압적인 식민지배가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정은 조선에 대해서만 특별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일본 본토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국내의 독립운동 거점들은 가혹한 탄압에 무너졌고 여운형만 유일하게 남게 된다. 힘으로 누르면 더욱 튀어 오르기 마련이라 무장 항일 운동이 대세로 올랐지만 아무도 총을 쥐어 주는 이가 없었고 결국 총 주는 중국 공산당으로 독립 세력들이 붙게 된다. 우리에게는 대단히 불운한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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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 유튜브 영상은 화면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비슷한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멘트나 자막으로 내용을 전달할 수 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영상은 관련 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된 드라마나 일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보이는 것들이 꽤 있다. 한국어 구글 검색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은 보유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건을 개별적으로 서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긴 호흡으로 전체적 시각에서 각 사건들이 가지는 맥락을 부여해 가는 솜씨는 보통 내공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사건들의 세부 내용들을 놓치지 않고 인물들의 이름을 세세히 거론해 가며 풀어 놓는다. 개론서 수준의 일본 근현대사를 읽었을 때 알게 되었던 일본 역사의 맥락이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했으며 이와 더불어 내가 그 동안 모르던 세부 내용들이 잘 서술되어 있어 맥락이 보강된 느낌을 받는다.

 

일본 근대사의 큰 맥락은 외부의 무력에 의한 강압적인 개방의 혼란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타 잇키는 일본의 천황이 전 세계를 품은 봉건질서로 세계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했지만 전 세계는 커녕 일본 그 자신에게 조차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통합적인 보편 타당한 가치 판단 체계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원칙도 없이 물리적인 힘이 작용하는 방향에 따라 흘러갈 뿐이었고 그렇게 흘러가다가 결국 패전을 당하면서 주저 앉았을 뿐이다.

 

보편타당한 원칙을 세울 수 없으니 파벌들이 난립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당연했다. 환경이 바뀌면 이에 따라 끊임없이 파벌이 생겨 났고 파벌들끼리 반목하며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사색당파로 조선이 망한 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진작 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군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면 나름대로의 환경적 요인이 분명히 있었다. 환경이 변화하면 이에 대응해야 했고 파벌간 싸움은 변화된 환경에 대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파벌 싸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보편타당성에는 다들 관심이 없고 천황에 대한 진정성으로만 서로를 이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성 경쟁은 끝이 없다. 진정성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면 무조건 상대가 내 놓는 것보다 더하기 1만 하면 된다. 상대가 할복을 하면 나는 할복 후 장을 꺼내면 된다. 이러면 상대는 장을 꺼내어 줄넘기를 해야 하고 이에 대응해서 나는 줄넘기에 더해서 꺾기를 해야하고 다시 상대방은 꺾기에 씽씽이를 해야 하고 이러면 나는 꺾기 씽씽이를 3번 하면 되고 이런 식으로 무한 반복이다.

 

진정성 경쟁은 무한으로 치닫게 되고 종국에는 힘의 논리로 치닫는다. 하지만 힘의 논리라면 힘을 키워서 상대를 누르면 된다. 결국 패자는 결코 승복하지 않고 힘을 키워 설욕하려고만 한다. 일본의 역사는 이런 패턴의 반복이다. 결국 힘의 논리로 서열을 세우고 그 서열의 최고 정점에 천황을 놓는 것 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이러니 혼란할 수 밖에 없다. 문민정부가 우세를 점했어도 군부세력은 결코 승복하지 않았고 결국은 뒤집어 엎었다.

 

이러니 일본은 무슨 일이 잘못되면 마지막에는 할복으로 진정성을 증명하려 든다. 황군파가 천황에게 할복 칙서를 받겠다는 것도 자신들의 결코 패배를 승복하지 않으며 진정성을 천황이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군파도 나름 천황에 대해 진심이었을 것이다. 히지만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데 진심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황군파는 그 놈의 진심 타령에 목숨을 걸었고 천황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그들을 적절히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천황이 권력을 강화했고 의회정치를 엎었으니 그들은 죽어서도 기뻐했을라나?

 

2.29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의 평균 나이는 25세 이하인 것으로 알고 있다. 주동자가 중위였으니 그럴만 했을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그야말로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들이 겁 없이 설쳐댄 꼴인데 뭘 알고 저랬을까 싶기도 하다. 아마도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들을 그렇게 몰아 갔을 것이다. 이시하라의 항명과 5.15 쿠데타 가담자들의 처벌 수위를 보면 그야말로 피가 끓어 올랐을 것이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눈이 벌겋게 달아 올랐고 누구라도 칼춤을 춰 주기를 원했던 듯 하다.

 

2.29 쿠데타에 대한 서술에서 "소피니언 디데아"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일본의 군국주의에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가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 재판에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과 소련 사이의 이중첩자를 하던 스파이는 천황을 앞세운 일본의 공산화가 가능하다는 신박하지만 은근 설득력 있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맥아더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고 써 먹을 가치가 있는 카드를 버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황군파의 쿠데타 시도를 보면서 자꾸만 박정희와 전두환이 겹쳐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박정희는 황군파의 영향을 받았음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집권 기간 중 보였던 정치 지향점과 황군파의 사상은 반공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사회주의라는 점에서 거의 겹쳐 보인다. "유신 헌법"의 유신은 메이지 유신이 아니라 쇼와 유신이었던 모양이다.

 

요즘에도 저 꼴보기 싫은 정치인들 싹 걷어 치우고 차라리 강력한 왕권에 준하는 지도자를 모시고 개혁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는 헛소리를 종종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런 헛소리를 국가개조론이라고 떠들어 댄 기타 잇키 같은 미친 놈이 이미 있었고 그런 미친 놈의 몽상을 일본은 이미 실행해 본 선진국(?) 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결과를 똑똑히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북쪽에도 아바이 수령님을 모시고 그런 시도를 해본 집단들이 있다. 역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끊임 없이 계속 배워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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