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7권인가 8권까지 읽은 적이 있다.
서점에 가 보니 그 뒤 시리즈가 꽤 많이 나왔더군.
이제 완결이 나왔나?
못 봤던 나머지 부분 챙겨 보겠다는 그런 이야기 하려는 건 아니고...

예전에 그거 보면서 꽤 부아가 났었다.
여태껏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학생 때 읽어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그야말로 "까만건 글자요 흰 건 종이로다" 수준이였다.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린지 알 수가 없었고...
정신 건강을 위해 책을 덮었다. 결국 안 읽어 본 거다.

그 동안 이것 저것 알아가면서...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섬찟할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뭐든지 시작 할 때 그것의 역사부터 살펴 본다.
그냥 구색을 갖추기 위한 흝어 보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나름대로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감이 생겼다.
지금 E.H Carr의 저서를 보면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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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를 읽어갈 때 느꼈던 배신감은...
몇 천년 전 로마 제국의 이야기에서...
대한민국을 봤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미국을 보고 북한을 봤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이 만들어진 기점 중 하나가...
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아닌 로마 제국과 꽤 많이 닿아 있었다.

내가 국사에서 배웠던 과거의 사실들 중...
나에게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고대 로마에서 벌어졌던 일이 나에게 끼치는 것이 더 많았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단절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던 순간이였다.
뭔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까지 내가 배운 국사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 졌다.
내가 여태까지 배운 국사에서는 느끼지 못한 시발점을...
왜 엉뚱하게 일본인이 쓴 로마사에서 봐야 하는가?

근대사에 관한 책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때문이였다.
나에게 연결된 가장 가까운 과거 사실부터 찾아 봐야 했다.

하지만 가까운 과거가 오히려 파악하기 어려웠다.
달랑 한 권 읽고 난 후 근대사 읽기는 진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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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지평" 이란 말이 있다.
먹물 냄새 풀풀 풍기는 말이긴 하나...
누가 지어낸 말인지 몰라도 꽤 유용하다.

국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든...
대운하를 파든 말든...
쓰나미로 몇몇 죽었든 아니든...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하든 말든...
도대체 그런 일들이 나랑 무슨 상관이랴.

내 가족, 내 수입, 내 생활...
이것만 별 탈 없으면 그저 만고 땡이다.
이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다른 것에는 눈과 귀를 막는다.

내 소원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건 다 니가 가져라.
하지만 제발 나만 건드리지 말아다오.

딴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난 세상과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왜 그랬냐고?
그래야 편하니까...
"인식의 지평"이라는게 지독하게도 좁았다.
그저 밥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삼는 난 그저 "똥개"였다.

내 자신도 어찌할지 몰라 허덕이는 넘이...
세상 고민을 껴안는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세상을 대면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세상이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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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는 국사고 세계사는 세계사다.
국사가 세계사와 연관이 없을리 없다마는...
내가 배운 기억에서는 그렇다.
세계사와 국사는 별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리그를 만든 것이였다.
세계가 어떻게 흘러 왔던 그건 그 쪽 사정이였을 뿐...
"세계는 세계고 우리는 우리다"라는 강요를 암묵적으로 받았다.
우리 스스로 세상과는 담 쌓고 사는...
아무 상관 없는 변방임을 자처한 것이였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렇지 않음을 보았다.
칭기스칸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디세우스가 신의 뜻에 반항했던 것도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거기에 끼어 있지 않았던 것 뿐...
나와 상관 없는 일은 전혀 아니였다.

남극의 폭풍으로 생긴 너울이 하와이의 파도를 만들어 내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 : "보스턴 차 사건"이 나에게 미친 영향 중 하나를 대시오
 답  : 오늘 점심 때 동료에게 "아메리칸 커피"를 얻어 마시게 됨

점심에 "아메리칸 커피" 먹은 것과 "보스턴 차 사건"...
그 둘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생뚱 맞아 보인다.
하지만 상호 관계를 %로 따지면 분명히 0는 아니다.

유대인이 로마인들에게 쫓겨난 것도...
알렉산더의 동방 정복에 나선 것도...
피타고라스가 정수를 신봉한 것도...
보어가 원자 모형을 만든 것도...
지미 핸드릭스가 군악대에 들어갔던 것도...
사마천이 궁형을 당했던 것도...
중국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었던 것도...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들었던 것도...

어느 곳이든 어느 시간이든...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지금의 내가 처한 환경이 만들어진 연유를 따져보니...
국사와 세계사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세계의 일이 결국 나의 일이였다.
눈 닫고 귀 막을 일이 아니였다.

이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편하게 산다는 것의 댓가가 어떤 것인지 조금 느꼈다.
그저 밥 주는 주인만 바라 볼 일이 아니였다.

뜬금 없이 들릴지 몰라도...
난 아우슈비츠의 평범한 학살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똥개였던거다. 똥개는 언제든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는 유죄라는 판단이 들었다.
곧 그것은 나 자신에게 유죄를 판결하는 것이기도 했다.

먹고 사는 일에 쫓기는 일상이야 여전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 것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
내가 지구에 발을 딛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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