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이리저리 글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접했다.
내 멋대로 앞 뒤 자르고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글이라는 놈이 하나의 귀신이며 악마라고 생각한다. 그와 계약을 맺고 그 힘을 빌리는 즉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그놈에게 저당잡힌다. 그래서 글의 논리와 수많은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connotation과 association 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맘에도 없는 소리 생전 느껴보지도 못한 정서를 마구 쏟아내게 된다.

고대인들이 옳다. 단어 하나 하나는 모두 귀신이다. 그것을 발설하는 것도 그렇지만 게다가 글로 적기까지 하는 순간 나타나는 것은 그가 아니고 그 귀신이다. 이집트 상형문자 하나하나를 1분만 응시하면, 또 갑골문이나 전서체를 몇 번 따라 그려보면, 이 말이 얼마나 맞는가를 몸서리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파피루스는 또 거북이 등뼈와 세발 솥은 수 많은 귀신들을 가두어놓은 일종의 나비 수집 표본 같은 것이다. 읽는 사람은 물론 쓰는 사람은 그래서 귀신 사냥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력과 배짱과 자기 줏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대부분의 글에는 그 사람은 없다. 그에게 빙의들린 온갖 귀신들이 설치고 나간 자욱만 요란할 뿐이다. 이걸 그 겉멋 든 문인들은 "文勢에 이끌렸다"고 대충 뭉개고 넘어간다.

요즘 내 머리의 기본 Setting이 조금씩 변하는 느낌을 받는데...
이 양반의 글에서도 비슷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단어 하나 하나는 모두 귀신이다" 라는 선언은 생각해 보니 실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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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에 써 놓았던 글을 우연히 읽어 보았을 때...
정말 이런 글을 내가 썼는지 의심이 들 때가 다들 한두번씩 있지 않으셨는지.

기호를 나열한다는 의미에서...
글을 쓰는 것이나 프로그램 Code를 작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Coding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모습이 나타나고 라인 수가 늘어나다 보면...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에 내가 압사 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분명 저건 내가 만들어 놓은 Code들이건만...
내 자신이 정의해 놓은 기호들의 체계에 갇혀...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그런 막막한 느낌.

오류를 고치거나 성능을 높이는 작업을 하다 보면...
거기에는 내 의지가 더더욱 개입될 여지가 작다.
내 스스로 정의한 산물들 사이에서 내 자신이 헤메는 때가 대부분이다.
어떤 때에는 이렇게 만든 그 당시의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 질 때도 있고...


인용글에서 단어들의 connotation과 association에 휘둘린다는게...
똑같지는 않겠지만 맥락상 내 경험과 비슷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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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지향 프로그래밍 공부하면서 읽었던 Booch의 책을 보면...
Object라면 가져야 할 것들로 기억나는게 대략 5가지 정도 된다.

그 중 첫번째가 Abstraction, 두번째가 Behavior였는데...
생각해 보면 기존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단어"라는 것은 주로 Abstraction이 강조된 것이였다.

그런데 그 단어라는 놈이 자신의 Abstraction에 맞는 Behavior를 할 수 있다면...
단어들은 종이에서 귀신처럼 튀어 나와 제멋대로 돌아 다닐 것이고...
세상은 당장 지옥 아니면 천국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가령 "김태희"를 종이에 적어 놓았더니 펑 소리와 함께 종이에서 김태희가 튀어 나온다든가...
개똥이에 대한 원망을 담아 "개똥이 죽어라!!!" 는 글귀를 적으면 실제 개똥이가 죽는다든가...

허무맹랑한 소리 같지만 분명히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사람들도 이런 걸 믿었으며...
지금도 이런 거 믿는 사람들이 분명히 꽤 있다.

단어에 Behavior가 있다는 믿음 중 대표적인 것은 부적일 것이다.
미신 취급을 받지만 여전히 부적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마법을 부릴 때 사용되는 룬 문자.
부적 그리는 것이나 룬 문자 사용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일까?

이게 미신이고 믿을 수 없는 거라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것을 갈구하고 있다.
다만 부적과 룬 문자라는 구현 수단을 지금은 믿지 않고 있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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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간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구현 수단을 바꾸었다.
부적과 룬 문자와 같은 미신이란 이름이 붙은 것에서 첨단 기술이란 것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중에서도 IT란 기술이 많은 활약을 한다.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Hyper Text는 이런 면에서 가히 혁명적이다.
단어를 클릭하면 그 단어의 의미에 맞는 다른 글이 뿅~하고 나타나지 않는가?
네이버 블로그 글에서 "접기"를 누르면 글이 접히고...
"설치하시겠습니까?"란 질문에 "예"를 누르면 실제로 프로그램이 설치된다.

컴퓨터 안에서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실물과 연결되면 실제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ATM에서 "인출"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진짜로 돈이 생긴다.
"발사"를 누르면 미사일이 실제로 날라가고...
영화 쉬리에서 보듯이 "투입"을 누르면 개폐기가 실제로 투입된다.

상징이나 기호에 실체적인 Behavior가 부여된거다.
유비쿼터스로 인해 기호에 부여된 실체적 Behavior는 더욱 강화 될 것이다.

아마도 옛날 북유럽의 바이킹이 현재로 날라와서...
프로그래머가 Code를 나열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본다면...
Code에 사용되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곧 룬 문자다.
구현 방법의 문제일 뿐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의미는 결국 같다.

최첨단 과학으로 결국 한다는 짓이 주술이다.
단어가 귀신이라는 것을 최첨단 과학으로 구현하고 있단 말이다.

힘들게 과학 지식 쌓아서 왜 이런 짓을 하겠는가?
인간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거다.
단어가 귀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는 바대로..
정말 단어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석판이나 종이에 갇혀 있는 귀신에 대한 봉인을 어떻게든 풀어 내려 한다.

"개똥이 죽어라!!!"는 글을 썼다고 개똥이 살인범이 되지는 않지만...
이렇게 단어의 봉인이 풀린다면 그 글을 썼다는 것 이유만으로 살인범이 될 수도 있다.
사극에서 종종 보이는 인형에 바늘 꽂아 사람 죽이는 주술이 들키면 유죄판결을 받았듯이...
상징과 실체는 별개라는 이중적인 접근이 점점 힘을 잃어 갈 것이다.

말이 곧 행동이고 행동이 곧 말이 되는 시대가 점점 오고 있는 듯.

PS : 데쓰노트가 딱 이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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