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왜 이리 케이블 티비에서 볼만하다 싶은 것들을 해 주는지...
영화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은 없는 상태에서 베오울프란 이름만 알고 있었던 지라...
예고 보고 기다렸다 봤다.

보는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
보는 사람들마다 다 해석이 다를만한 이야기인데...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까 놓고 하는 이야기들...
내가 보기에는 흥미로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베오울프 원전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원전과 영화와는 다를 것 같아서 한번 찾아 봤더니...
내가 극적으로 본 장면은 원전과는 다르단다.

누군가 베오울프를 읽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코드를 찾아 내어...
나름대로의 소설을 쓴 듯.
하지만 그럴싸 하다.

이런 이야기를 평해 보라고 할 때..
길게 쓰려면 한도 없이 길고 짧게 쓰려면 한마디로 끝나기도 한다.

우선 짧게 써 보려고 하자면...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말을 인용하면 된다.
"네 자신을 알라"
뜬금없지만 이 말은 어디 갖다 붙여도 다 통하는 말이다.

빈약하지만 내가 아는 것들은 덧붙여...
내가 읽어낸 것을 조금 풀어서 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일러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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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참고로 서사시 베오울프의 원전과 영화 베오울프는 차이는 알아 보면...

베오울프는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로...
언어학 분야에서는 8세기 고대영어로 씌여진 귀중한 문학 작품이라고 한다.

아직 베오울프 원전을 읽어 보지 못했으므로...
우선 누군가의 말에 따른 원전과 영화의 차이를 대략 짚어보면...

베오울프는 예이츠 출신으로 갖은 명성을 쌓은 영웅이다.
그는 덴마크에 나타난 털북숭이 괴물 그렌델과 그의 어미를 처치하고...
그 후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고국에서 왕이 된다.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왕 노릇 잘 하다가...
말년에 베오울프의 노예가 화룡의 금 술잔을 훔치는 바람에...
화룡이 베오울프를 공격하고 이 싸움에서 화룡과 베오울프는 모두 죽는다.

영화에서처럼 그렌델의 어미와 계약을 맺은 것은 없으며...
화룡이 베오울프의 자식이라는 이야기도 전혀 없다.
호로스가왕이 죽고 베오울프가 덴마크 왕인 된다는 것은 사실무근.

그런데 내가 베오울프 원전을 먼저 읽어 봤다면...
영화의 내용에 오히려 무릎을 치며 더 공감했을 것이다.
괜찮은 상상력, 괜찮은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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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눈에 걸리는 것은....
그렌델의 어미에게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였다.

이름만 없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그렌델의 어미는 그의 실체를 한번도 보여 준 적이 없다.
이름도 없고 실체를 그릴 수도 없는 존재.
그저 물에 사는 괴물로만 치부될 뿐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범상치 않다.
진짜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야훼는 그저 가명에 불과할 뿐.
그 누구도 신의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이 세상을 벗어나 세상 안에서 포용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전에서도 베오울프가 그렌델의 어미를 처치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이름도 없고 죽은 증거도 없는 존재,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영화에서 베오울프는 그렌델의 어미를 왕비의 모습으로 접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가 그렌델의 어미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명확하다.
영화는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그렌델의 어미를 해석했다.
그렌델의 어미는 베오울프 자신의 무의식이다.

덴마크 왕비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베오울프의 마음은 그녀의 남편을 제거하고 그녀를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는다고 베오울프가 천하의 나쁜 놈은 아니다.
여자를 보는 이 세상 남자들의 마음은 모두 다 똑같다.
이건 본인이 그렇게 마음 먹겠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그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이다.

B급 냄새 풍기는 SF영화 "솔져"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반복된다.

"솔져"에서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성에게 반하지만 그녀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
마음 속으로는 당장 그 남편을 제거하고 그녀를 취하고 싶지만...
선한 역을 해야하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럴 수가 있겠는가?

악당이 알아서 남편을 죽여주면...
그제서야 마음 편안하게 악당을 죽여주고...
악당으로부터 그녀를 구해 자신의 가슴에 그녀를 품는다.

무의식의 욕망은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의식을 조정하며 굉장히 순화된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결과적인 면에서는 "솔져"처럼 다르지 않다.

영화 베오울프 역시 이런 입장에 서 있다.
결국 덴마크의 호로스가 왕이 알아서 죽어주고 알아서 왕비를 넘기지 않는가.
모든 것은 결국 베오울프의 무의식이 원한대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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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델의 어미에게 무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지만...
그 괴물은 또한 다른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원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괴물은 물에 사는 것으로 나오고...
그 괴물은 다른 괴물을 낳는 여성성을 가진다.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졌으나 왕비로 재탄생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물 속에 빠져 죽을 뻔 하다가 살게 되면...
주인공은 변화를 일으키고 상황이 변한다.
이건 공식이다. 물은 탄생 혹은 재생의 상징이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물 위에 둥둥 떠 본 적이 있는데...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물 속을 들여다 보면 두려움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적막함과 광활함.
그 물이 제공하는 부력으로 난 둥둥 떠 있을 수 있으나...
조금만 실수해도 그 심연은 날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릴 것 같았다.

동굴에서 괴물들을 낳는 그녀를 보면서...
성경과는 다른 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 리리스가 생각났다.
세상을 낳는 여성의 위대한 창조성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다.
낳기는 낳으나 인간에게 반하는 괴물들을 낳는 것이다.

세상에 영웅이 존재하려면 괴물도 있어야 한다.
즉 영웅에게 괴물은 존재의 이유가 된다.
이 세상에 괴물이 정말로 없다면 영웅도 필요 없다.
뭐가 들어 있을지 모를 그 깊은 심연은 모든 것을 낳는다.

세상을 낳는 위대한 여신의 부정적인 모습.
이것은 또한 의식을 삼키는 무의식의 부정적 모습이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의 여신으로 섹시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안젤리나 졸리는...
또한 파괴적인 것도 낳을 수 있는 치명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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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울프가 그녀의 유혹에 굴복해 키스를 하려던 그 짜릿한 순간...
난 이브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취하려는 아담이 생각났다.
이런 구도에서 그렌델이나 용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말하는 원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렌델과 용의 존재는 조셉 캠벨이 논했던 것에 더 가깝다.
조셉캠벨의 논지는 미국 영화에서 거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이런 영웅을 대상으로 한 내용에는 거의 100%다.

조셉캠벨이 지적한 바에 따른 영웅신화의 구조는...
영웅이 자신의 소명 받아 들이고,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며 모험을 하고,
영웅으로 재생하여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능력을 받고 세상에 귀환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베어울프의 이야기를 조셉캠벨이 논한 구조에 맞춘 모습을 보인다.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재생 뿐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오로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재생만이 문제를 해결한다.
영웅으로 재생했다고 해도 어느 시점에 되면 다시 재생이 필요하다.
 

영웅들은 첫번째 재생에는 성공하지만 두번째는 대개 실패한다.
인간이 무한히 재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결코 허락되지 않은 영생의 길을 걷는 것.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성령 앞에서 거듭 난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이러한 재생이 실패한 예로 조셉캠벨은 미노타우루스의 예를 드는데...
그렌델과 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르스와 본질적으로 같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은 한 때 잘 나가는 영웅이였다.
그는 포세이돈 신에게 잘 생긴 황소를 받는다.
그는 신의 선물을 마땅히 다시 신에게 돌려야 했으나...
욕심이 난 그는 완벽한 황소를 따로 챙기고 대신에 다른 소를 재물로 바친다.

신에게 돌릴 것을 자신이 취했으니 탈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가 그 황소를 보고 욕정을 느낀 것이다.
결국 파시파에는 암소의 탈 속에 숨어 그 황소와 교접을 하고...
소 대가리의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을 낳고 만다.

즉 미노타우르스는 미노스왕의 잘못된 욕심으로 인한 형벌이였고...
미노스는 그 자신이 저지른 죄로 영웅의 빛을 잃고 몰락한 왕이 되고 만다.

베어울프는 그렌델을 제거할 소명을 받아 이를 수행하였고,
그의 충실한 부하의 조력을 받아 그렌델을 제거한다.
그리고 다시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그렌델 어미 제거의 임무를 받아 들인다.

그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길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그 종착지는 어두운 동굴 속의 물가이다.
말하자면 영웅을 낳는 자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른다.

그 곳에서 그는 물속에서 솟아 오른 무의식을 대면한다.
거기에서 그는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영웅으로 완성된다.
동굴 같이 어두운 자신의 깊은 심연에서 재생한 것이다.
그는 위대한 창조 여신과의 대면과 화해를 통해 강력한 왕으로 재탄생한다.

하지만 미노스가 포세이돈의 황소를 빼냈듯이 그도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
영화에서는 왕비에 대한 욕정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아무튼 그 깊은 심연에서 영웅이 태어났다면 그 반대도 생겨난다.

미노스의 죄는 젊은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해결되었듯이...
늙은 영웅 호로스가의 죄는 젊은 영웅 베어울프가 해결한다.
개인의 재생은 어렵지만 사회적 재생은 지속되는 것이다.

역시 베오울프가 늙고 쇠약해지며 그의 죄가 표면에 드러난다.
베오울프가 재탄생한 근원과 동일한 곳에서 태어난 불을 뿜는 용이다.

뜬 구름 잡는 허구의 이야기 같지만 우리의 실제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가장 최근에 벌어지는 양상을 한번 예를 들어 보자면...

화석연료라는 영웅의 탄생으로 인간은 많은 괴물을 잡아 냈지만..
그와 동시에 온실가스로 인한 온난화라는 괴물도 잉태했다.
화석연료라는 영웅이 쇠퇴하고 온실가스라는 괴물이 창궐하는 요즘이다.
화석연료를 대신할 새로운 영웅을 탄생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지만...
그 새로운 영웅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기존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변화는 필연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다시 그 자체의 한계에 다다르는 것 또한 필연이다.
신화 속 영웅들의 이야기 또한 다르지 않다.
그저 엉터리 이야기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다.
신화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보물덩어리다.

보통의 영웅담이라면 이 지점에서 늙은 베오울프가 좌절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웅의 출현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 것이다.
이 영웅담이 다른 것은 베오울프 자신이 자신의 죄를 셀프로 해결한다는 것.

그 사악한 용이 베오울프의 아들이건 뭐건 아무래도 좋다.
용은 어쨌든 영웅 베오울프의 드러나지 않은 그의 부정적인 모습이다.
용과 베오울프는 결국 한 목숨으로 연결 된다.
그 둘은 결국 다른 모습을 한 동일한 존재이고 결국 같이 죽고 만다.

난 북유럽 신화를 보면서 오딘과 로키는 서로 상반된 동일한 존재로 보였다.
그들의 능력이나 생명주기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면 그런 암시가 굉장히 강했다.

영화 메트릭스의 영웅 네오와 반영웅인 스미스의 생명주기는 결국 같았다.
네오가 완성되면서 같이 잉태된 것이 바로 스미스였고...
네오와 스미스는 생명 주기를 같이하는 동일한 존재였다.
다만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뿐이였다.

원전에서도 베오울프는 용과 사투를 벌여 용을 죽이지만 심각한 부상으로 그 자신도 죽는다고 한다.
작가도 아마 그 부분에서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용은 다른 모습을 한 베오울프 그 자신이라는 원작의 암시를 느낀 것 아닐까 싶다.
다만 베오울프 그 자신이 그것을 부정했을 정도로 그것을 차마 대면하지 못한 것 뿐.

영화의 장례식에서 보여주듯이...
죽음을 맞이한 베오울프는 그를 영웅으로 낳아 준 존재에게 돌아간다.
자궁이자 무덤이기도 한 심연으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새롭게 왕이 된 자는...
전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깊은 심연의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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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지만...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결론 따위를 낼 수가 없다.
그저 주저리 주저리 내가 본 것을 떠드는 정도 밖에...

그리고 내가 다른 것들을 알아가면서...
지금 보이지 않았던 다른 것들이 계속 보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차피 신화란 것이 그런 것. 평생을 봐도 계속 달라 보일 거다.

영화에서는 어두운 동굴 속의 강력한 심연의 존재를 잘 표현해 줬다.
그저 경외롭고 존경스러우며 무서울 뿐이다.
언제 쯤이면 그 심연 속에서 솟아 오른 존재를 똑바로 대면할 수 있을까?

보는 내내 자궁이자 무덤인 그 이중적인 심연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인간을 보며...
내가 어릴 적 심연 위에서 느꼈던 그런 섬뜩함을 느꼈다.
진짜 영웅들은 벗어 날 수 없는 그 심연에 몸을 던지고 편안히 흘러간다고 한다.
몸을 맡기지 않고 계속 허우적 대다가는 결국 잠겨 삼켜진다.

허우적대든 흘러가든...
결국 인간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그렌델의 팔을 자른 베오울프였으나...
댓가를 치를 것이라는 여신의 예언대로...
결국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낼 수 밖에 없는 운명.
 
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신과 마귀, 삶과 죽음이 백지장 한장 차이로 갈리는 곳이 세상이다.
신이 악마고 악마가 신인 이중적이고 애매모호함.

결국 결론은 "내 자신을 알라"다.
그 용이 결국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내가 아무리 뛰어봐야 결국은 신의 손바닥 위에 있을 뿐이라는 것.
그래도 계속 날 뛰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조차도 받아 들이라는 것.

대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나더러 어쩌라는 것인지.
그런데 그 무력감 마저도 다 받아 들이란다.
그저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풍덩 빠져 있으라는 것.

나는 섬뜩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서...
난 아직도 그 존재를 똑바로 맞대고 몸을 내 맡길 수준은 아직 안 되는가보다 싶었다.
아직도 아침에 도를 보고 저녁에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듯.

그나저나 마치 게임을 보는 듯한 그래픽은 좀 짜증이 났다.
아무래도 실사로 표현하기는 어려워서 그랬을까?

Posted by iki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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