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Qook TV를 통해 보게 된 영화. 보는 중에 좀 지루한 감은 있었지만 마지막 부분은 꽤 흥미진진 했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읽혔는데 다른 이들의 리뷰를 읽어 보니 의외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는 내내 사람을 집중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후반부의 짜릿함은 중간의 지루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몰입도가 낮은 것은 아쉽다. 몇몇 기차 칸의 상황은 너무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뻔한 장면이라 그냥 시간 때우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막판의 내용만으로도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감독의 전작인 "괴물"의 결말이 나에게는 영 마뜩치 않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나에게는 명백하게 짜릿한 해피엔딩이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읽히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래 글은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 보실 생각 있으신 분들은 그냥 지나 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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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계의 한계에 대해 논하는 영화로 생각나는 최근작은 "클라우드 아틀라스"이다. 닫힌 계의 한계는 영화에서 보여주듯 명백하다. 길리엄이 커티스에게 윌포드를 만나면 그의 혀를 자르는 한이 있어도 절대 말할 기회를 주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월포드의 논리가 닫힌 계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월포드의 말대로 머리칸에 있든 꼬리칸에 있든 그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닫힌 계인 기차의 노예일 뿐이다. 커티스는 월포드가 장악한 엔진을 차지하여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지고자 했으나 기차의 머리칸에 있다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것에 커티스의 그 모든 노력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커티스는 꼬리칸에 당한 지랄 같은 상황이 싫어서 세상을 바꿔 보고자 갖은 고생을 해 가며 머리칸에 와 닿았는데 막상 와 보니 그가 가장 타도하고자 했던 월포드와 똑같은 입장이 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쳐 버린다. 윌포드가 싫어서 그렇게 죽자고 고생했더니 그 결과가 월포드 같은 놈이 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죽자고 고생했더니 그 끝이 자기 부정이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기차에 탑승한 모든 이들은 기차라는 닫힌 계의 속성에 지배 받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월포드가 꼬리칸에 탑승했다면 커티스와 똑같은 입장이 되었을 것이고 커티스가 머리칸에 탑승했다면 월포드와 동일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그 사회가 가지는 물리적인 속성을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그 속성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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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의 세상은 특정 이념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봉건주의든 왕정이든 뭐든 자원이 한정된 닫힌 계를 의미한다. 영토가 무한히 넓고 자원도 무한히 많다면 생산과 분배에 관련된 체계가 뭐든 상관 없다.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다면 왕정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닫힌 계가 되면서 발생한다.
닫힌 계 내에서 죽으라고 노력해 봐야 닫힌 계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없다. 커티스는 아무리 노력해 봐야 기대할 수 있는 최대 성과는 또 하나의 윌포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닫힌 계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성과만을 기대할 수 있다. 때로는 심지어 그 성과가 자기 부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그런 삶을 살아 왔다.
기차 안의 세상은 그런 닫힌 세상에 대한 은유이다. 기차 안에 설치된 수족관은 닫힌 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닫힌 계로 그 메시지가 명확하다. 1월과 7월에만 한정된 양에 대해서 스시를 먹을 수 있다는 영화 내용에서 기차가 수족관이며 커티스가 주도하는 반란이 사실은 수족관을 유지하기 위한 스시 파티 임을 알아차려야 했다.
어디로 도망갈 곳이 없고 닫힌 계에서의 돌발 행동이 전체 공멸을 부를 수 밖에 없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이 취할 방법은 정해진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내 위 칸의 누군가를 끌어 내리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닫힌 계에서는 결국 어느 순간 자신이 살려고 남을 죽여 먹는 식인종이 되는 순간이 오고 만다.
닫힌 계에서 살고 있다면 그 시험의 순간이 왔을 때 커티스처럼 남을 잡아 먹든가 길리엄처럼 자신의 팔을 베어 주는 먹이감이 될지 선택해야 한다. 한 집으로 몰아 줄지 여러 집으로 고통 분담을 해야 할지의 선택이다. 전자는 무한 경쟁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이고 후자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 닫힌 계에서 적정 숫자가 유지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제약은 마찬가지다.
우파냐 좌파냐 치고 받아 봐야 닫힌 계의 한계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침3/저녁4, 아침4/저녁3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선택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짜 해결책은 하루 7개가 아니라 하루 10개를 확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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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는 윌포드가 전하는 말을 듣고 혼란에 휩싸인다. 시스템의 최상부를 차지하고 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바로 그 직전의 상황. 길리엄과 월포드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닫힌 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커티스의 가치관은 우루루 무너지고 있었다.
자기 부정을 동반하는 짜릿한 유혹의 순간이다. 닫힌 계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정상의 위치를 부여 받기 직전의 순간. 내가 커티스였다면 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입장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다. 자신에게 손해 날 것이 없는데 그걸 마다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제안을 받아 들이면 커티스는 성공한 인물이 되는가? 그토록 자신이 혐오하던 식인종 노릇을 남에게 강요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 과연 성공일까? 커티스의 실패는 이미 엔진을 차지하겠다는 반란을 계획할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였다. 엔진을 차지 못하면 당연히 실패, 엔진을 차지한다고 해도 결국 실패. 뭘 하든 닫힌 계 안의 한계를 깨지 못하면 실패다.
커티스가 윌포드는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메트릭스2의 장면이 생각났다. 아키텍트와 네오와의 대화는 처음 접했을 때 너무나도 쇼킹했었다. 아키텍트와 오라클이 서로 반대인 듯 하지만 그 두 축이 결국은 상호 보완적인 시스템의 일부이자 본질이였듯이 윌포드와 길리엄은 닫힌 계를 유지하는 한 통속이였던 것. 네오나 커티스는 뛰어봐야 벼룩이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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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가 분한 "남궁민수"는 내가 볼 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한국 배우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니 한국에서 만든 영화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실제 상황은 역사적으로 "남궁민수" 처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남궁민수가 중요한 이유는 영화의 등장 인물 중 유일하게 시선을 열차의 외부로 돌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커티스"는 사실 몸빵으로 죽어라 고생만 하다가 한계에 부딪치지만 "남궁민수"는 상대적으로 유유자적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닫힌 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열어야 할 문은 월포드가 장악한 엔진의 문, 시스템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함을 알고 있었고 그 시기를 계속 탐색해 왔던 것이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 시기가 아니라면 그 동안은 차라리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였으리라.
고래 뱃속에서 탈출한 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요나"는 그 이름에서부터 이미 기차에서 나갈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투시력으로 뭔가 한가닥 해 주나 싶었는데 그냥 장식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성냥을 달라는 요나의 요청에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거부하는 커티스. 기차를 가지라는 월포드의 제안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였으리라. 누구나 궁극적인 성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자리를 목전에 두고 닫힌 계를 파괴할 수 있는 성냥을 건네 줄 이가 있을리 없지 않은가? 진짜 혁명은 커티스가 아니라 남궁민수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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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든 커티스였지만 그는 결국 거부하고 만다.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바닥 아래에 조그마한 아이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한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호랑이에 올라타 있는지를, 자신이 어떤 체계 위에 발 딛고 서 있는지를 다시 자각하게 된 것이다.
뭘해도 실패였는데 성공으로 착각했음을 깨달은 것. 그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기차라는 닫힌 계의 일부로 살아갈 것을 거부한다. 월포드에게 통쾌한 원 펀치를 날리는 것으로 제안에 대한 거부의사를 명확히 한 커티스는 꼬리칸에서 자신이 저지른 원죄에 대한 속죄인 양 자신의 팔을 바쳐 기계의 부속으로 살아가는 소년을 구해낸다.
주인공이 시스템을 부정하면서 폭탄은 터지고 세상은 무질서의 혼란으로 빠진다. 닫힌 계가 열린 계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시스템은 송두리째 파괴되고 그 안에서 존재하던 것들은 송두리째 부정당한다. 보통의 헐리웃 영화라면 꼬리칸 사람들이 총살 당하기 전에 폭탄이 터졌을 것이고 폭탄이 터진 후 기차가 멈춰선 상황에서 다수의 생존자들이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북유럽 신화가 전하는 라그나뢰크처럼, 하나의 세상이 종말을 고하고서야 다른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 현실이다. 독일의 나치가 완전히 청산되고서야 전후 독일은 그 이전의 독일과 달라질 수 있었듯이 말이다. 우리의 봉감독, 이런 면에서 다소 정나미 떨어지게 화면을 잡아 준다. 화면 상으로 생존이 확인된 것은 요나와 소년 뿐이다. 나머지는 죽었든 살았든 의미 없다.
나에게는 분명한 해피엔딩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커티스나 남궁민수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 심지어 월포드까지도 살려 주는, 보는 사람이 마음 편해지는 그런 서비스 좀 해 줬으면 안 됐을라나. 봉감독 영화는 이런 서비스에 대해서는 되게 인색한 경향이 있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적당히 좀 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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