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중후기 당쟁사를 조금 알아가다 보니 기존에 내가 알던 것과 뭔가 다른 것이 있어 보인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정조 사후 김조순의 집권으로 갑자기 당쟁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없다. 뭔가 중요한 알맹이를 말하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영/정조 시대를 괜찮은 시대로 알고들 있지만 알아 볼수록 과연 그러했는지 의문이 든다. 특히 정조의 집권 과정에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있기에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정조 이야기를 다루었고 그 스토리에서 노론 벽파는 강력하고 사악한 악역을 맡는다. 그런데 노론 벽파가 정말 그렇게 강한 집단이였는지도 의문스러워진다.

 

노론의 학문적 계보는 "이이 --> 김장생 --> 김집 --> 송시열"로 이어지는데 숙종이 송시열을 사사한 이후 노론의 계보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권상하가 송시열의 적통을 잇는 제자라고 하는데 권상하가 배출한 제자들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이름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노론 벽파의 주요 인사를 보면 계보상 송시열과 관련성을 찾기가 어렵다.

 

사도사자가 죽은 임오화변에서 활약한 홍계희가 서인 계열이였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 홍우전이 송시열 제자 출신의 관료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인 홍우전은 39세 진사시에 합격했고 홍계희도 34세에 급제한 것을 보면 학문적으로 출중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중앙 관료로 활발히 활동했고 홍계희 손자 홍상범은 정조 시해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로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환지의 이력도 고개갸 갸웃거려진다. 그는 32세에 진사 합격 후 41세에 급제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그러고도 16년을 지나 57세에 대사성으로 고위직에 오르고 65세에 판서, 69세에 좌의정이 된다.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23세에 급제하고 38세에 도승지가 된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이력이다.

 

이제 보니 심환지는 학문적인 능력이 출중하여 노론 벽파의 영수가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오래 살면서 버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노론 벽파의 주요 인물인 김귀주도 정순왕후의 오라비였고 정후겸도 화완옹주의 양자였을 뿐이다. 송시열의 학통을 잇는 영민한 인재를 노론 벽파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다.

 

노론 벽파 주요인사들의 면면을 막상 살펴 보면 뭔가 허접하다. 흡사 뭘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꼴통 집단 같은 느낌을 받는다. 소론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 이후로 거의 폐족이 되다시피 했고 남인 계열은 채제공을 비롯한 이익의 제자들이 등용되긴 했으나 비주류에 불과했다. 즉 관료 사회의 토양이 황폐화 되어 있었다. 이러니 정조가 문체반정으로 신하들에게 잔소리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노론 시파라고 상황이 별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상황에서 시파 김조순이 외척으로 정권을 휘어 잡게 되자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권력의 독점이 이루어지고 수십년간의 세도정치가 가능해진 것이다. 세도정치를 시작한 것은 김조순이지만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은 영/정조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신하들을 바보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허목이 팽팽히 맞섰던 예송 논쟁 시절이라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사방팔방에서 외척의 비리와 권력농단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김조순은 험한 꼴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정조 시절 동안 그런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되어 있었다. 탕평으로 당파 싸움을 해소하려고 했다지만 결과를 보면 아예 토양 자체를 말려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 격이였다.

 

개화기에 노론 계열의 지배 계층이 처참하게 무기력했던 배경에 대해 이제야 조금 느낌이 오는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이렇게 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없다. 뭔가 큰 맥락을 놓치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영/정조가 조선을 망국의 길로 올려 놓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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