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매표소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을 보니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보게 된 '방자전'

늦게 입장한 관계로 남들 다 착석한 후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입장한 탓에...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관객들이 대부분 아저씨, 아줌마들.
아마도 야하다는 입소문이 꽤 작용한 모양이다.

한국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패턴 중 하나가...
전반에는 좀 웃겼다가 후반에는 무겁게 진지해지는 것인데...
그 웃음의 소재가 성에 대한 농담.

그 농담을 듣고 웃는데 느낌이 좀 묘했다.
오달수의 여자 꼬시기 초식을 듣고 있으면...
뭣도 모르던 중고딩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누군지는 모르나...
춘향전을 비틀어 놓은 작가의 상상력이...
나름대로 신선하기는 하나 어딘지 유치하다는 느낌도 같이 받는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방자라는 인물의 계급 투쟁이였다.

보고 난 뒤 본전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니...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해도 될 듯.

그러나 불편하고 아쉬운 점이 있는 영화.

이하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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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까지 맞았는데 뭐하러 그렇게 나섰냐는 질문에 대한 방자의 대답.
"종놈이니까요"

그 한마디가 영화 보는 내내 내 머리속에 남는다.
나에게는 영화 전체를 꿰는 주제로 보였고...
이 영화는 나에게 지극히 계급적으로 읽힌다.

초반 이몽룡은 방자에게 춘향을 꼬셔오라고 시켜 놓고는...
나중에 등장하여 방자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한다.

"이 놈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네" 하면서 싸대기 멋지기 갈겨 놓고...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사죄의 의미로 차 한잔 대접하지요"

행동대장 시켜서 판을 뒤집어 놓아 이슈를 제기해 놓고...
나중에 모르는 척 등장하여 행동대장을 질책하는 것으로 사태를 평정하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주인공으로 행사하면서 주도권을 틀어쥐기.

어디에서 많이 보던 패턴이다.
이심전심, 알아서 나서주면 적당한 시점에 뺨 한대 갈겨주고...
나중에 적당히 챙겨주고 뒤를 봐주는 것.

이몽룡의 수는 현실에서 많이 보이는 꽤 유용한 패다.
현실이라면 이몽룡은 춘향에게 폼나게 접근했을 것이고...
방자는 나중에 고기반찬 특식을 점심으로 먹는 것에 만족했을 것.

외부 개입이 없는 섬 같은 곳이라면 이런 거 잘 통한다.
그러나 외부의 강력한 개입이 있으면 이런 수는 무너지고 만다.
조선 왕조도 결국 외부의 개입으로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이몽룡은 꽤 효율적이고 검증된 초식을 구사하였지만...
예기치 못하게 이몽룡에게 당차게 대드는 제3자가 등장하면서...
이몽룡의 계획은 틀어지고 체면을 구긴다.
그 시점에 다시 당당히 등장하여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자.

방자는 춘향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종놈으로서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한다.

양반이라는 포지션을 점한 몽룡에 비해...
글자도 읽을 수 없는 종놈이라는 포지션을 점한 방자는 여러모로 불리하다.
방자가 몽룡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했다.
힘도 쎄야 하고, 고기도 잘 구워야 하고, 수영도 잘 해야 하고...
게다가 여자 꼬시기도 잘해야 했다.

결국 춘향과 먼저 관계를 가지게 되고...
지방 관아의 형방과의 결탁을 통해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재물을 모으는 등...
방자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게 되지만 포지션의 열세는 결국 극복할 수가 없다.

몽룡의 과거급제 소식에 태도를 싹 바꾸는 춘향.
뺨을 맞아도 참아야 하는 것은 그가 종놈이기 때문.
방자의 불안한 느낌은 그가 속한 계급의 한계 때문이였다.

이몽룡은 방자의 뺨을 후려갈기던 그 수법을 똑같이 이용한다.
다만 이번에는 방자가 아닌 어수룩한 변사또의 뺨을 후려갈긴 것.
변사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몽룡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였고...
결국 몽룡이 만들어 놓은 판에 이용만 당하다가 팽을 당한다.

조작된 미담으로 만들어 낸 몽룡은 출세가도를 달리고...
결국 이용가치가 다한 춘향은 몽룡에게 버림을 받는다.

방자는 끝까지 춘향을 붙잡지만...
사회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버팀목인 계급의 한계에 도전한 이유로...
방자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결국 뒷골목 암흑가의 두목으로 행세한다.

방자는 춘향을 얻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춘향을 얻지 못하였고...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 스스로 기록에서 자신을 삭제하였다.
춘향이 정말로 원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 것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건 내가 볼 때 결국 실패다.

한국영화 특유의 채념이 여기에서도 반복된다.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가 '종놈' 밖에 안 되니 슬플 뿐이라는 거다.
아무리 해도 해피엔딩은 안 되고 그냥 참고 사는거다.
예전에 비해 이런 것 채념이 많이 줄어 들었지만 방자전에서는 또다시 반복된다.

누군가 내 뺨을 후려 갈겼을 때...
영화는 나에게 종놈이냐 아니냐를 계속 묻는다.

재벌 총수가 술집에서 시비 붙은 양아치를 두들겨 패도...
모 기업이 검찰에게 떡값을 돌린 것이 들통이 나도...
종놈임을 인정하고 두둑한 세경이나 챙겨 갈 것인가?
종놈임을 부정하고 깨지는 한이 있어도 부딪쳐 볼 것인가?

실패한 방자를 보여주면서 이런 불편한 질문을 던지다니...
이건 꽤나 잔인하고 가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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