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의하면 야훼가 사람들의 언어를 제각각으로 바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시도를 좌절시켰다고 한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도 창조신 Enki가 인간들의 언어를 바꿔버렸다는 유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성서에 따르든 수메르 점토판을 따르든 까마득한 그 옛날에는 언어가 오로지 하나였다. 그리고 그 하나의 언어로 생각되는 것이 수메르어. 예전 모두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당시에 기록된 서사시가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수메르 문명이 없어진 수천년 동안 그 존재 여부조차 완전히 지워지고 잊혀졌으나 근래에 들어 수메르어로 작성된 토판이 발견됨에 따라 다시 부할하게 되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번역이 시작되었다. 현존하는 문서로 볼 때 최초의 서사시라 할 수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는 수천년 동안의 시간을 날아와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로 생각하는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이 존재하던 시대. 바로 그 고대 문화가 있었던 그 시대를 기준으로 그 시대와 우리 시대와의 간격보다 훨씬 더 옛날 일로 기록되어진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 이야기.
2000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딧세이가 여러 언어로 번역이 되었던 것처럼 길가메쉬 서사시 역시 고대 페르시아어, 악카드어, 수메르어 등의 여러 언어로 씌여진 판본이 존재한다. 저자는 그 여러 판본 중에서 악카드어 판본을 위주로 하고 수메르어 판본에만 있는 내용을 보충하는 것으로 길가메쉬 서사시를 번역해 나갔다.
최초의 영웅담이니 무슨 이야기가 써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펼쳐 보았지만 영웅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시시하며 그리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고대 영웅 이야기들은 다 그렇듯이 길가메쉬 또한 출생의 차원이 남다르다. 야생들소의 여신인 닌순과 수메르의 왕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이다. 하지만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이것외에는 그리 자세하지 않다. 그는 2/3은 신이고 1/3은 인간인 몸이였다.
숫자로 묘사된 길가메쉬는 최소한 키 5미터의 거인족 수준의 외모에 엄청난 힘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단위 환산에 오류가 있는 것이였을까? 아니면 중국인들처럼 수메르인들도 과장이 심했던 것일까? 성서에 나온 골리앗 역시 엄청난 거인이였으며 그리스 신화에도 거인족들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거인족은 단지 상상의 산물이였을까?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으나 사라지고 지금은 신화의 껍데기를 쓴 채 후세에 남아 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런 엄청난 괴력을 지닌 길가메쉬를 통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없었다. 길가메쉬는 젊은 남자들을 무력으로 괴롭혔고 초야권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여자들을 겁탈했다. 신랑이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신부의 순결을 취할 수 있는 권리인 초야권, 지금은 상상도 못할 권리이지만 중세 영주들이 실제로 행한 권리이기도 하며 지금도 사이비 종교에서는 가끔씩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길가메쉬의 예를 보듯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였다.
도대체 이게 뭔가? 반인반신의 영웅이 한다는 짓이 왜 이래? 힘만 믿고 여기 저기 사고 치는 다니는 한심한 난봉꾼이 아닌가? 당연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해지고 신들에게 길가메쉬 어떻게 해달라는 민원이 접수된다. 신들은 이 한심하고 치기어린 괴물을 제어하기 위해서 엔키두를 창조해 낸다.
닌후르쌍 혹은 아루루 혹은 마미라 불리는 여신은 흙을 빚어 이를 대지에 뿌린다. 아마도 대지는 신들의 자궁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 예전 엔키가 인간을 창조하던 방법과 비슷하게 엔키두가 만들어졌다. 그런 엔키두의 모습에서 최초의 인간이 어떤 모습일지를 한번 짚어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는 몸에 털로 덮여 있으며 머리는 길게 늘어졌다. 숲속에서 짐승들과 함께 살며 풀을 뜯어 먹고 살며 웅덩이에서 물을 마신다. 키는 길가메쉬 보다 약간 작은 듯 하지만 그 역시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라? 이거 뭐야? 야생에 사는 털북숭이 괴물 이야기는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본 것 아닌가? 히말라야의 설인, 빅풋, TV로도 나왔던 바야바. 그래 이건 완전히 바야바 아니냐?
인간의 초기 모습을 짚어 볼 수 있었던 엔키두는 바야바 또는 원시인의 모습이였다. 숲속에서 엔키두를 목격한 사냥꾼들은 겁에 질렸고 이런 엔키두를 인간으로 전환시키려고 모종의 일을 꾸미게 되는데 그 방법이 참 묘하다. 여자를 붙여 준 것이다.
어느날 엔키두 앞에 홀딱 벗은 여자가 나타나고 엔키두는 거기에 정신이 빠져 7일 낮, 7일 밤 동안 정사를 가진다. 털북숭이 바야바와 정사를 가진 여자는 도대체 무슨 배짱이였을까? 암튼 7일간의 정사가 있은 후 바야바 엔키두는 인간 엔키두로 다시 태어난다. 털도 다 빠지고 완전한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으며 예전에 같이 놀던 동물들은 그를 피해 도망간다.
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존재는 아직 인간이라 할 수가 없는건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이브,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성을 제대로 알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된 것은 아니였을까? 성적 욕망으로 인간 내면의 무의식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가 이런 면에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인간이 되었고 술과 음식을 먹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초야권을 행사하려는 길가메쉬의 만행에 분개하여 드디어 길가메쉬와 한판 붙게 된다. 이전의 엔키두라면 초야권 같은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는 정상적인 성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인간이 되었다.
거의 동일한 힘을 가진 맞수끼리의 싸움. 그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이없게도 그 둘이 친구가 되어 버린다. 수호지 같은 거 보면 그런 장면 많이 나온다. 싸나이 특유의 "우쌰 우쌰"로 서로 영웅 대접해 주면서 의형제 맺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 온갖 난봉으로 문제만 일으키던 길가메쉬는 자신의 맞수를 친구 삼으면서 뭔가 달라지긴 한다. 바로 이것이 신들이 의도하던 바였을 터이다.
그래서 뭔가 달라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오버를 한다. 섹스에 정신이 나가서 첫날밤 신부나 겁탈하러 다니던 놈이 정신 차렸답시고 뭔가 큰일 한번 해 보겠다고 하는 짓이 참으로 어이 없다. 숲의 신 훔바바를 죽이러 나섰던 것이다.
도대체 왜 훔바바를 죽이겠다는거야? 태양의 신 "샤마쉬"가 길가메쉬를 부추긴게 틀림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길가메쉬는 숲에 있었던 삼목나무를 원했다. 왜 필요했을까? 신전을 지으려고? 샤마쉬는 삼목나무로 자신의 신전을 꾸미고 싶어 했을까?
훔바바가 사람을 해하는 괴물 수준의 나쁜 놈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훔바바는 서열 2위의 신 Enlil(사실상 권력 서열 1인자)이 임명한 숲의 지킴이였다. 훔바바는 서열 2위인 Enlil의 임명장을 들고 있는 정식 산림 관리인이 분명한데 왜 Enlil의 손자인 샤마쉬는 길가메쉬를 꼬드려 훔바바를 해하고 싶어 했을까?
샤마쉬가 그의 졸개들을 길가메쉬에게 붙여 준 것을 보면 샤마쉬 역시 길가메쉬 혼자의 힘으로는 훔바바를 절대로 당할 수 없을을 명확히 알고 있던 듯 하다. 길가메쉬의 친구 엔키두 역시 길가메쉬를 만류하였으나 길가메쉬는 힘만 쎈 멍청이마냥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만용을 부릴 뿐이였다. 그는 훔바바를 죽여 오로지 자신의 명예를 쌓겠다는 욕심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
보통의 영화에서 분수 모르고 까부는 망나니 케릭터는 시범 케이스로 초반에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훔바바를 죽이고야 만다. 판본에 따라서 그 과정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어떤 판본에서는 샤마쉬의 7바람에 의지하기도 하고 어느 판본에서는 훔바바를 치사한 거짓말로 살살 꾀여서 무장해제 시킨 후 죽이기도 한다. 어느 판본이든지 간에 길가메쉬는 자력으로 훔바바를 제거한 것이 아니였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길가메쉬는 훔바바를 죽였고 삼목 나무를 베어냈다. 숲을 초토화 시킨 것일까? 아무튼 이 소식은 Enlil에게 들어갔고 Enlil이 그 소식에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다. Enlil은 샤마쉬까지 야단을 쳤는데 구체적인 행동에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랑의 여신인 인안나가 길가메쉬에게 반해서 구애를 하는데, 길가메쉬 이 사람 보게나, 감히 여신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 아닌가? 보통 여자들도 남자에게 구애했다가 거절 당하면 자존심이 극도로 상하는 법, 조심스럽게 거절해도 모자른 판에 대 놓고 너 같은 갈보년의 구애는 필요 없다고 했으니 목숨이 10개라도 남아나기 어려울 터이다. 훔바바를 처치했더니 눈에 뵈는 것이 없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인안나는 난리가 났다. 신들의 아버지인 An에게 졸라서 하늘의 황소를 풀었고 이 황소로 하여금 길가메쉬를 죽이고자 한다. 그런데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소가 왜 이리도 많이 나오는건가? 길가메쉬는 야생들소의 여신이고 길가메쉬 역시 황소처럼 묘사된 구석이 있다. 또한 길가메쉬를 죽이는데 황소가 동원된다. 수메르인들에게 소는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암튼 인안나의 이런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만다. 엔키두가 황소의 꼬리를 붙잡고 있는 사이에 길가메쉬는 목을 쳐서 황소를 죽여버린다.
하늘의 황소를 잡았기 때문일까? 훔바바를 죽였기 때문일까? 엔키두는 병석이 드러누운지 12일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하늘의 황소를 죽이는 법을 알려준 엔키두, 목숨을 구걸하는 훔바바에게 마음이 동요된 길가메쉬를 몰아세운 엔키두. 지휘관은 살려 둘 수 있어도 나팔수는 살려둘 수 없음인가? 길가메쉬 대신 엔키두는 신들로부터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다.
그 다음에 길가메쉬가 그 다음에 하는 짓들을 봐라. 자기는 평생 안 죽을 줄 알았는데 자기와 맞먹는 힘을 지닌 엔키두가 죽는 것을 보고 자기가 죽을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왕의 권력이며 사람들이 칭송하는 명예며 다 필요 없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법을 찾아서 헤멘다. 무서운 전갈들을 헤쳐 나갔고 여인숙에서 만난 포도주 여신의 충고를 무시한다. 그리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인간으로는 유일하게 영생을 누리고 있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게 된다. 우트나피쉬팀은 자신이 영생을 얻은 과정을 이야기 해 주는데 이것이 바로 대홍수 이야기.
우트나피쉬팀은 구약의 노아와 거의 같은 존재로 Enki의 도움으로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인물이였다. 그리스의 신화에도, 구약에도 대홍수 이야기는 나온다. 거기에 묘사된 대홍수는 신들이 인간을 쓸어 버리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 하지만 수메르 신화에서의 대홍수는 조금 다르다. 역병과 기근으로 인간을 쓸어버리려 했던 Enlil의 시도는 엔키의 방해로 번번히 좌절되었다. Enlil이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대홍수를 인간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였다. 으잉? 이게 무슨 소리인가? Enlil이 대홍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대홍수가 일어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 뿐이다.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Enlil은 다른 신들에게도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다. 하지만 Enki는 배반을 때리고 우트나피쉬팀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알려주며 그 홍수에서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들의 축복을 받아 인간으로써는 유일하게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트나피쉬팀의 영생은 대홍수로 인간의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것에 대한 반대 급부였다. 이러한 반대급부 없이는 인간에게 영생이란 허락되지 않는 오로지 신들만의 영역.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우트나피쉬팀의 섬에서 7일 동안 잠에 휩싸여 있다가 영생을 얻지 못하고 맥 없이 나오고 만다.
하지만 뭔가 성과는 있었다. 직접적인 영생은 얻지 못하였으나 바다에서 건져낸 불로초를 얻게 된 것. 애초에 그럴 생각이 영 없었던 우트나피쉬팀을 설득하여 불로초를 길가메쉬에게 주게 한 사람은 우트나피쉬팀의 아내였다.
구약의 이브도 신에 불복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다. 신들이 원시인 수준으로 만들어 놓은 엔키두를 인간으로 끌어 올린 것은 음탕한 여사제 샴하트였다. 창조신이 인간에게 넘지못할 한계로 만들어 놓은 필멸의 운명에 저항하는 것 또한 이렇게 여성의 몫이였다.
왜 이럴까? 왜 여성은 항상 신의 명령과 의도를 깨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일까? 금기를 깨는 것은 주로 여성이였다. 그렇게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열어 제꼈던 판도라도 여성, 지옥에서 나갈 때 열어보지 말라는 분갑을 결국 열었던 푸쉬케도 여성, 금기를 깨고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것은 주로 여성의 몫이였다. 메트릭스에서 방정식을 깨 버리는 혼란을 주는 오라클이 여성으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이러한 금기 깨기로 불로초를 얻은 길가메쉬는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뿐, 어이없게도 불로초를 뱀에게 도난당하고 만다.
인간의 창조주인 서열3위의 신 Enki,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였을까? 수메르의 여러 신들 중에서 인간을 도와주고 구원해 주는 신이였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인간을 영원불멸이 아닌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었으며 그는 이러한 설계원칙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Enki는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인간의 제약을 결코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한 Enki의 상징은 뱀. 불로초를 훔쳐 간 것은 사실 Enki가 아니였을까?
결국 길가메쉬 서사시는 길가메쉬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길가메쉬의 장례식은 순장으로 거행되었다. 신과 인간이 같이 살았던 고대에서 고귀한 인간의 장례식은 순장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나 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인간세상에서 대접받는 영웅이라 하더라도 1/3이 인간이 이상 그 역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젊은 시절 그는 무모하게 치기어린 영웅이였다.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멀쩡한 남의 여자를 겁탈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며 그 힘을 운용할 수 있는 엔키두라는 파트너가 생기자 우리로 치자면 신산령과 비슷한 존재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 죽여버리기에 이른다. 이런 그에게 인간끼리의 전쟁은 너무나 싱거운 싸움이였다. 이웃나라 키쉬와 전쟁이 났을 때 그는 간단히 승리하였다. 그리고 사랑의 여신으로부터 구애를 받을 정도로 남성적인 매력이 철철 넘쳐 흘렀으며 하늘에서 자신을 죽이러 내려온 거대한 황소를 해 치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흡사 붓다처럼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영생을 찾아 헤메었다. 속세에서 그는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거의 모두 누렸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누리려 했던 것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 바로 영생이였다. 그의 피 중 2/3은 신이였기에 영생을 바로 눈앞에 둘 수 있었으나 1/3이 인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의 시도는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제 아무리 영웅이라고 하나 그 역시 인간이였기에 주어진 굴레를 벗어 던질 수는 없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주어진 모든 것을 누린 후 주어지지 않은 것마저 취하려 했던 어느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초의 서사시답게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영생을 원하는 인간들은 많다. 영생을 찾아 헤메는 길가메쉬들이 오늘도 곳곳에 널려 있다. 영생이 불가능함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에 거의 포기한 듯 하지만 노화를 피하고 죽는 날까지 잘 살아 보자는 것도 길가메쉬의 근본 심리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영생을 미끼로 활개치는 사이비 종교가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보라. 까마득히 오래전에 있었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영생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에게 영생은 신이 정해 놓은 금기이다. 하지만 금기는 필연적으로 깨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던가? 판도라의 상자를 정말로 열지 않기를 바랬다면 애초에 그 상자를 안 주었으면 그만이다. 상자를 연 것은 판도라의 잘못이 아니다. 판도라에게 상자가 주어진 순간부터 그것은 예정된 일이였던 것이다.
Enki는 인간을 필멸의 존재로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왜 영생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능을 심어 놓았던 것일까? 어쩌면 Enki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영생을 얻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An이 내린 영생의 빵을 아다파가 거부하게 만들었으며 불로초에 의지하여 영생을 구하려던 길가메쉬의 시도를 좌절시킨 것일까? 우리는 결국 자력으로 신의 영역에 들어 갈 수 밖에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존재들인데 공들인 이 부분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Enki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인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물론 재앙이였다. 그러나 신들이 예정한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였다. 인간이 영생을 얻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은 재앙 일 수도 있다. 심히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유전자 내부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운명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판도라 상자는 결국 누구에 의해서든 열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PS :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혹시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 아니냐는 의심을 누군가가 던진다.
뭐 . . . 앞 뒤 정황을 맞춰보면 전혀 가능성 없는 말도 아니지 싶다.
'자작 >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개조론 (0) | 2010.06.08 |
---|---|
한국 근대사 - 브루스 커밍스 (0) | 2010.06.08 |
김산해 -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0) | 2010.06.08 |
칭기스칸, 잠자는 유럽을 깨우다 (0) | 2010.06.08 |
무하마드 유누스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0) | 2010.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