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바쁜 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니 다시 신화에 탐독하게 되는군요.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신화를 읽다보니 자꾸 머리속에 영화 Matrix가 떠 오르는군요.
이전에도 엄청나게 인상적으로 봤던 영화였지만 신화를 읽어 나가다 보니 메트릭스에게 영화라는 지위는 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메트릭스는 21세기에 걸맞는 형식을 빌어 다시 씌어진 일종의 신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밥줄이 컴퓨터쪽에 있어서인지 시스템 입장에서 영화를 이리재고 저리 재 봤습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습니다만 이 영화를 신화로 놓고 생각하면 더욱 재미있어지죠.
영화의 배경은 거대한 가상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소재는 가상 세계 그 자체가 아닙니다. 가상 세계는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적합한 배경일 뿐이지요. 다프네가 아폴로에게 쫓겨 올리브 나무가 되듯 , 예가 활로 태양을 쏘아 죽이듯, 로키가 암말이 되어 망아지를 낳듯, 신화의 세계에서만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가상 세계에서는 가능합니다. 다만 "먼 옛날에 . . ."로 시작하는 신화와 달리 영화에서는 세련되게 "먼 미래의 가상세계에 . . ."로 시작하는 것 뿐이죠.
그 배경에서 이야기 되는 것은 결국 신화 이야기입니다. 가상세계에서 활동하는 스미스 같은 요원들이나 오라클, 아키텍트등의 프로그램들은 신들과 다름 없습니다. 영화에서도 일부 장면에서는 노골적으로 신화를 차용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곳곳에 보입니다.
메트릭스 2에서 키메이커를 악당 메로빈지언에게서 네오에게 건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메로빈지언의 아내인 페르세포네였습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왕 하데스의 마누라입니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보고 반해 저승으로 납치하여 도둑장가를 들었죠.
즉 이런 페르세포네의 남편인 메로빈지언은 사실 저승의 왕인 하데스와 동격입니다. 메트릭스의 정상적인 시스템외의 영역인 어둠의 지역, 즉 이승과는 다른 저승을 다스리는 존재이지요. 도둑장가를 들었으니 부부간에 금술이 별로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페르세포네는 1년에 6개월을 남편과 따로 지내니까요. 영화에서도 부부간의 금실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죠?
메로빈지언의 부하들을 봐도 저승의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력을 무시하고 꺼꾸로 매달려 다니질 않나, 정상적인 시스템 영역에서는 다루지 못하는 IO Port를 독점하기도 하고 (트레인 맨이 그런 존재입니다), 형체도 없이 스르륵 없어지질 않나, 도깨비나 괴물 같은 존재들이지요. 저승에 사는 존재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페르세포네에 어울리게 그냥 하데스로 하면 될 것인데 왜 메로빈지언일까요? 영화에서는 메로빈지언이라고 나오지만 그 철자를 보면 Merovingian, 즉 최초의 프랑스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 영화에서도 그 이름값을 한다고 프랑스인으로 나온 거지요.
음모론 수준에서 제기되어 왔고 다빈치코드에 나오는 내용이라 하는데 메로빙거 왕조는 성당 기사단과 관련이 있는 모양입니다. 성당기사단은 지금도 존재한다는 프리메이슨의 모체가 되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단 집단이죠. 즉 메로빈지언은 역사에 실재했던 왕가였지만 이단의 혐의가 있는 왕가입니다. 저승과 같은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왕의 이름으로 쓰이기에 그럴듯 하지요.
불교나 성경에서 차용했을 법한 장면은 너무나도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트리니티라는 이름자체가 벌써 삼위일체이고 네오는 예수님 필이 나는 장면을 곳곳에서 선 보입니다.
즉 감독은 가상세계라는 공간에서 신화를 다시 써 내려가려고 작정한 듯이 보입니다. 서구 세계에서 익히 알려진 신화들을 이리 저리 뒤섞어 놓은 모습이 역력하지요. 하지만 정작 신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부분은 상당히 은유적으로 만들어 놓았더군요. 바로 영생에 대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영생을 갈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메트릭스입니다. 인간이 아닌 기계가 영생을 갈구한다니요? 좀 앞뒤가 안 맞아 보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볼 때 영화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Matrix-2의 다른 이름은 Reloaded 입니다. 제목에 벌써 영생에 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요.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니만큼 이 이야기는 네오와 아케텍트와의 직접적인 대화로 나오고 있습니다.
메트릭스는 일종의 OS입니다. 가상 세계에서 OS는 사실 그 세상 자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의 현실 세계로 보자면 이 세상 그 자체입니다. 1편의 모피어스가 말한대로 메트릭스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영생하는 것은 많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인간 입장에서 보면 영생하는 것이지요. 바다나 바위덩어리 역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영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적인 영생을 누리는 존재는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변화하지 않고 그냥 쭉 일정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변화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는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지요. 아키텍트의 말대로 초기 메트릭스는 완벽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불변하는 세상이였겠지요. 하지만 거기에서 사람은 살지 못하고 모두 전멸했습니다.
가장 완벽하게 아울리는 완전5도 화음만으로는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하고 듣기에 거슬리는 구급차 싸이렌 소리가 되듯이 인간은 변화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바위돌은 사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죽어있는 존재일 뿐이지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변하는게 확실합니다. -_-;)
그래서 차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달이 영생과 재생력의 상징으로 숭배 받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달에 항아 선녀가 살고 있다는 전설은 그냥 가볍게 흘려 들을 이야기가 아니지요. 생명을 낳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니까요. 게다가 여자의 생리주기가 달의 주기와 대략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암튼, 메트릭스라는 OS 혹은 세상 그 자체는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죽음, 시스템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Shutdown 이지요. 하지만 시스템은 그렇게 해서 죽은 후 다시 Booting 되어 살아나게 됩니다. 마치 달이 그러하듯이, 불사조가 그러하듯이, 메트릭스는 그렇게 영생을 누리는 존재인 것이지요.
세상이 그렇게 변하는데 인간이 무사할리 없습니다. 성경에 씌여 있듯이 대홍수로 세상은 멸망한 듯 보였으나 새로운 생명이 다시 그 존재를 새롭게 이어갔고, 북유럽 신화에서 보이듯 신들의 전쟁인 라그나뢰크로 세상은 멸망한 듯 보였으나 새로운 존재들이 그 뒤를 이어 갔습니다. 영화에서도 메트릭스는 시온의 인간들을 모두 죽이고 Shutdown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6번째 버젼을 끝내고 다시 reboot 혹은 Reload 되어 7번째 버젼에서 새로운 인간들을 키워가야 했지요.
메트릭스는 OS이지만 인간을 키우기 위해 탄생 된, 즉 인간적인 요소를 가진 시스템이기에 기계로써 가진 영원불멸의 속성을 다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유지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메트릭스는 사실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마치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인간에 대한 가장 진실한 이야기이듯이 영화 메트릭스에서 메트릭스라는 존재는 신적인 존재이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기계로써 영생을 논했다는 점에서 영화 메트릭스는 가장 늦게 나타난 신화답게 세련미를 보여 주는 듯 하지만 시온 사람들이 결국 네오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명을 구한 점을 생각해 보면 역시 이 영화는 큰 들에서 기독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 네오는 이러한 메트릭스의 영생 과정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하든 시온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니까요. 네오는 결국 메트릭스의 영생을 유지하면서도 시온 사람들을 살려 냅니다. 메트릭스의 영생에 일종의 제물로 바쳐진 대신 시온 사람들을 살려 낸 것입니다.
메트릭스는 이미 시온 사람들을 죽이기 이전에 Shutdown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정상적인 Shutdown이 아니라 시스템이 폭주하여 Pending 된 상태라 할 수 있겠지요. 시스템의 양축을 이루는 아키텍트와 오라클 중에서 오라클이 폭주해 버린 겁니다. 스미스가 오라클을 복제하는 것을 보고 저는 그렇게 해석이 되더군요.
아키텍트가 네오와의 대화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라클은 방정식을 깨는 역할을 합니다. 즉 아키텍트가 남성적이고 이성적면서 철저하게 예측 가능한 Cosmos를 상징한 반면 오라클은 그 반대인 여성적이고 감정적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Chaos를 상징하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 COSMOS와 CHAOS가 적절한 균형으로 유지되어야만 생명이 존재할 수 있지요. 이런 점을 보자면 영화 메트릭스는 동양의 음양론까지 끌어들인 것처럼 보이는군요.
암튼 오라클은 폭주했습니다. 메트릭스는 폭주한 오라클로 리소스를 완전히 잃어 버렸죠. 정상적인 Shutdown은 아니지만 암튼 시스템은 죽어 버린 겁니다.
네오는 이 시점에서 총대를 메고 자신을 바쳐 오라클의 폭주를 풀어냄으로써 시온의 인간들은 살아있게 되고 메트릭스는 Pending된 상태를 벗어나 다시 초기화 됩니다. 즉 영생의 욕구를 실현하게 된 것이지요.
어찌보면 섬뜩한 일입니다. 네오는 일종의 제물로 바쳐진 셈이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간을 구원한 것처럼 말이죠.
어디 영화 리뷰를 봤더니 누군가 그러더군요. 영화가 어렵기만 하고 결정적으로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가 없다고 합니다. 신화이니 어려운 건 당연할 겁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없는 것 역시 당연하겠지요.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당위는 전혀 없거든요.
원래 신화란 것이 그런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저 진실하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조용히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는 각 개인이 스스로 찾아야 할 문제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