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지성사에서 출간된 북유럽 신화에 관련된 책을 읽으니 많은 생각이 들어 글을 한번 적어 봅니다. 다만 제가 좋게 느꼈던 책에 대한 리뷰는 보통 다른 카테고리에 적어 두는데 이 책은 책 자체로는 별로 좋다는 느낌이 안 드는군요. 매번 읽을 때마다 눈꺼풀이 내려가고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오타로 보이는 것들도 많고 남미의 작물인 옥수수가 버젓이 북유럽 신화에 몇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니 번역자의 역량에 많은 의심이 가는군요. 그래서 책 리뷰 관련 카테고리에는 못 적고 제 생각을 위주로 글을 적으려고 합니다. 북유럽 신화에 대한 백과 사전식 나열은 인터넷에 많이 올라 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따로 찾아 보시던가 아니면 직접 책을 찾아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창세기 . . .


북유럽 신화에도 창세기는 있군요. 무스펠헤임의 불과 니플헤임의 얼음의 접경 지역에서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거인 이미르가 생겨 났다고 합니다. 동양의 음양론과 비슷한 대목이군요. 신화의 내용을 보니 물에 독이 축적되어 이미르라는 생명체가 생겨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맹물을 생명체로 격상시킬 수는 없으니 독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생겨난 생명체는 독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애초부터 사악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고 신화에서는 단정지어 버리는군요.


물이 녹고 어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또 다른 생명체가 생겨 났는데 이게 "아움두라"라는 암소입니다. 이미르는 암소의 젖을 먹고 자라는데 암소가 얼음을 햝은 곳에서 "부르"라는 인간이 생겨 납니다. 그 부르의 아들이 "보르"이고 그 보르는 오딘을 포함한 3명의 아들을 가지게 되지요.


이게 도대체 번역의 오류인지 정말로 원문이 그런 것인지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딘은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왕 노릇을 하는데 그 오딘의 할아버지인 부르가 도대체 인간이라니요? 몇번을 다시 봤지만 분명히 부르는 "인간"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원문에는 도대체 뭐라고 써 있었기에 인간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었을까요?


암튼 모든 존재는 얼음, 즉 물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변화가 지속되면서 거기에 뭔가가 첨가되어 물에서 생명체가 나타난 것이지요. 흐음...오래전의 신화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그럴싸해 보이지 않나요?


세월이 흘러 보르의 세 아들은 이미르를 죽이고 그 몸으로 세상을 만듭니다. 두개골로 하늘을 만들고 그의 피로 바다를 만들고 그의 뼈로 바위와 산을 만드는 식이죠. 이건 수메르 신화의 왜곡된 버젼이라 할 수 있는 바빌로니아의 창세기와 거의 판박이입니다.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마루둑이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티아마르를 갈갈이 찢어 발겨 세상을 만들어 낸 것과 거의 같은 방식이네요.


그 이후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바다의 신 이름은 아에기르(Aegir) 입니다. 수메르 신화에서 인간을 창조하였으나 권력 싸움에 패배하여 바다의 신으로 밀려난 에아 (또는 엔키)의 이름과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나요? 북유럽 신화에서도 바다의 신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천상의 신들에게 밀려 그 들이 마실 술이나 만들어 내야 하는 수모를 당하는군요.


북유럽 신화에서 수메르 신화의 흔적을 간간히 볼 수 있습니다.



신과 거인 . . .


거인들의 존재는 그리스 신화나 수메르 신화에도 나타납니다. 거기에서 거인들은 신보다 앞서 존재했고 신들과 힘을 겨룬 뒤 몰락하게 되죠. 북유럽 신화에서도 거인 이미르는 오딘을 비롯한 신들보다 먼저 있었던 존재입니다. 신들이 이미르를 죽이지만 이미르의 자손들은 남아 오딘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살아 남게 되죠.


다른 신화에서는 거인들이 완전히 제압 당하고 유폐나 죽음으로 신화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대부분은 살아남은 거인들과 신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이 신화에서의 신들은 결코 초월적인 힘을 가지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들 역시 불멸의 존재가 아니기에 마법의 사과에 의지하여 젊음을 유지하며 앞으로 거인과의 전쟁에서 죽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신들과 거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기가 차지도 않더군요. 신들은 거인들에 비해 월등하게 우월한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들이 못하는 일을 거인들이 해 내는 경우도 있고 궁지에 몰린 신들이 교묘한 속임수로 위기를 비켜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들과 거인들 사이에 족보가 서로 얽혀 있더군요.  신과 거인들은 상대방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자식을 낳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경우에 따라 신들의 일원이 되거나 거인들의 일원이 됩니다. 최후의 전쟁에서 신들에게 최대 위험 요소를 제공하는 로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인이지만 그는 오딘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며 신들의 일원으로 살아 갑니다. 전쟁의 신 토르의 부모 역시 모두 거인이군요. 프레그는 거인의 딸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하려고 자신의 소중한 검을 시종에게 줘 버리기까지 합니다. 뇨르드는 역시 거인의 딸과 결혼을 하죠. 거인들 역시 별 다르지 않아서 아름다운 여신인 프리이야와 결혼하기 위해 위험한 짓을 하다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리고 최후의 전쟁인 라그나뢰크에서 신과 거인이 모두 전멸한다는 것으로 보아 능력 면에서도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즉 주류/비주류라는 이미지 외에는 신과 거인을 구별할만한 본질적인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리스 신화에서도 거인신들과 올림푸스의 신들을 본질적인 면에서 구별한다는 건 웃기는 일입니다. 크로노스가 거인신이였으니 그 아들인 제우스도 거인신인게 당연하겠죠. 하지만 올림푸스의 신들은 그 이전의 신들과 차별화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우스는 아버지인 크라노스를 제거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거인족의 아들이지만 그는 아버지와는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죠. 거인신들과 올림푸스 신들간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거인신들이 차지했던 위치를 올림푸스 신들이 고스란히 물려 받을 수 있었겠지요. 헬리오스에서 아폴로로 태양의 주인만 바뀌었듯 말입니다.


어쩌면 이미르는 최초의 인간 부르의 아버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르는 아움두라의 젖을 먹었던 것이 아니라 암소와 거시기를 치렀던 것이 아닐까요? 아움두라가 숫소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북유럽 신화는 신화의 세계에서 늦둥이에 속하기에 인간의 도덕률이 어느 정도 배여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애써 이미르와 오딘의 촌수 관계를 제거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자매신인 프레이와 프레이야는 아버지 뇨르드가 그의 누이를 취해서 생겨난 신들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근친혼이야 아주 흔했던 일이지만 로키는 이를 들춰 내면서 뇨르드를 비난하는군요. 비난꺼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북유럽 신화에서는 이미 근친혼이 금기시 된 것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본 오딘의 에시르족 신들에게서는 근친혼을 찾아 볼 수 없더군요. 오이디푸스 컴플랙스를 북유럽 신화에서도 살짝 볼 수 있습니다.



오딘과 로키 . . .


신과 거인의 다툼이 대부분이지만 전적으로 볼 때 거인들은 거의 완패하고 있습니다. 즉 위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실제 거인들은 신들에게 밀리는 존재들이였죠. 신들에게 실제적인 위협이 된 존재는 바로 그들의 일원인 로키였습니다.


로키는 신들의 일원으로 살아갔지만 그는 거인의 아들이였고 그 역시 거인족 여인 사이에서 신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괴물인 펜리르, 요르문간드, 헬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거인과 신들의 분쟁에는 거의 항상 로키가 있었습니다. 로키는 영리하고 간교하여 거짓말을 잘했고 온갖 말썽의 시작이였죠. 그는 신의 세계와 거인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는 라그나뢰크 때 신들을 멸망시키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죠. 북유럽 신화에서 악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로키입니다.


오딘은 전쟁의 신이기도 했지만 시인들의 신이기도 했고 신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딘은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하기도 했죠. (그리스 신화에서도 최고의 예언자는 그 댓가로 시력을 모두 잃어야 했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왜 하필 시력이 희생되어야 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종류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로키 역시 신들 중에서 가장 좋은 잔머리를 가졌습니다. 그 좋은 잔머리로 온갖 말썽을 부리고 다녀서 문제였죠. 로키가 말썽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좋은 잔머리 외에 변신술도 한 몫 합니다. 그런데 자주 보여주지는 않지만 오딘 역시 변신술에 꽤 강한 모습을 보여 주죠. 게다가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은 오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로키 역시 그가 신들에게 붙들려 족쇄에 묶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로키가 거인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는 오딘과 의형제까지 맺은 신들의 일원이였습니다. 주류의 대표와 비주류의 대표가 서로 의형제 사이라니요? 앞날을 예지하는 오딘이 어찌해서 로키와 의형제를 맺었던 것일까요?


무너져 내린 신들의 방벽을 어느 힘 좋은 거인이 복구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거인과 신은 적대적 관계이니 공짜로 그 일을 해 주었을리 없죠. 그들은 엄청난 조건을 걸고 내기를 하던 중이였습니다. 신들이 그 내기에서 거의 지게 생겨 절망에 빠지게 되자 로키는 암말로 변신하여 거인이 부리던 숫말을 꼬셔 냅니다. 말이 발정이 나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돌을 나르지 못해서 거인은 방벽을 완전히 보수하지 못하고 결국 내기에서 지고 말지요.


그런데 암말로 변한 로키는 실제로 숫말과 교미를 가지게 되고 발이 8개 달린 망아지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발 8개 달린 말, 슬레입니르를 오딘에게 바치게 되며 이로써 오딘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말을 얻게 됩니다. 뜨아 이게 왠 경악스러운 장면입니까. 치명적인 세 괴물의 아버지이기도 한 로키가 암말로 변신하여 숫말과 교미를 하고 게다가 망아지까지 낳는다니요. 로키는 남성인가요? 여성인가요?


로키는 무력의 힘은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의 주력 무기는 재빠른 두뇌 회전과 말빨이지요. 로키에게는 부정적인 여성 이미지가 살짝 엿보입니다. 오딘은 두말할 필요 없이 강인하고 단호한 남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비슷해 보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한쪽은 남성, 어느 한쪽은 여성적인 이미지가 느껴 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 신화를 읽어가면서 어딘지 모르게 오딘과 로키가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때에는 로키가 오딘과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을 착각이 들 때도 있더군요. 영화 메트릭스에서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건 결국 아키텍트와 오라클이였죠. 그 둘은 서로 정반대의 상극적인 존재이지만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상생적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오딘과 로키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북유럽 신화는 이 오딘과 로키를 합쳐 놓은 아수라 백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인도에서도 파괴의 신과 창조의 신은 결국 같은 존재라지요?



안드바리의 저주와 지크프리드 왕자 그리고 반지의 제왕 . . .


마지막으로는 제 생각이 아닌 단순한 소개 입니다. 북유럽 신화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에 모티브를 제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딘과 로키 그리고 또 한 명의 신(이름이 기억 안 납니다)이 인간 세상에 놀러 갔다가 어이 없이 인간에게 사로 잡히고 맙니다. 인간에게 신이 사로 잡히다니요!!! 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랍니까. 오딘의 할아버지 부르는 정말 인간인게 맞는건지.


암튼 이 신들도 잡힐만한 짓을 했기에 엄청난 분량의 금을 배상으로 내고 풀려 나오기로 합니다. 신들의 왕인 오딘은 졸지에 볼모 신세가 되었고 로키는 난쟁이를 찾아서 금을 강탈해 오게 되지요. 난쟁이는 어쩔 수 없이 로키에게 금을 털리면서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는 않았지만 로키가 난쟁이의 손에 끼워져 있던 금반지를 빼앗으려고 하자 격렬하게 반항합니다. 결국 로키는 금반지를 빼았음로써 배상금을 간신히 채울 수 있었지만 난쟁이는 그 반지의 주인에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걸어 놓습니다. 그리고 신들은 그 보물을 인간에 주고 풀려 나오게 됩니다. 북유럽 신화의 주요한 출처가 되는 Edda에서는 여기까지만 서술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 이후 반지가 포함된 금을 차지한 인간에게는 원래의 주인이였던 난쟁이 안드바리의 저주가 계속 따라 다니게 됩니다. 결국 그 보물의 주인은 사악한 용이 되어 보물을 지키게 됩니다. 후에 지크프리드가 그 용을 죽이고 거의 불사의 몸이 되지만 반지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지요. 그러나 지크프리드를 죽인 자들도 결국 다 죽게 되었고 반지는 라인강에 잠겨 잠자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벨룽겐의 반지" 설화이고 바그너가 오페라 소재로 갖다 썼죠. 그리고 판타지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반지의 제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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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ki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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