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제목대로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주변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의외로 여기에 동감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하긴 관공서나 각종 기관에서 종이조각에 쓰인 문구나 글자의 위치, 색상 같은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사항으로 얼마나 유새를 떨었던가? 더군다나 요즘은 세상이 하도 빨리 돌아가는지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빠른 시간내에 문서를 작성하는 것을 권하는 시대가 되었다. 닷컴 열풍이 한창이던 때 미국에서는 자신의 사업구상을 별다방의 냅킨에 적어 상대방에게 설명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형식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는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 형식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고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형식을 어떤 것이 되어도 좋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어떠한 내용도 형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구분은 사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개념일 뿐이다. 이 세상에 어떤 내용도 형식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형식 때문에 내용이 왜곡된다고? 천만에 그 형식 덕분에 내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용이 혼자 독야청청 있는데 형식이란 것 때문에 왜곡되는 것이 아니다. 그 왜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의 핵심이 된다.
그릇과 내용물은 분리되지 않는다. 밥은 밥그릇에 있을 때에나 밥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밥, 대지라는 그릇에 있는 밥은 먹을거리가 아니라 버려야 할 오물로 전락한다. 밥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솥단지를 안고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솥단지도 그 때는 그릇으로 작동하며 솥단지 밥과 밥그릇 밥은 같은 밥이라도 먹는 이의 입장에서는 분명 내용이 다르다. 같은 밥이라도 그릇에 따라 다른 밥이 되어 버린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형식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다르면 사고도 달라지는가? 난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해외 교포 1.5세대나 2세대를 만나보면 영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 같은 사람임에도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활성화 되는 뇌의 영역이 다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담을 그릇 없이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릇에 따라 내용의 모습이 결정된다. 그래서 형식이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형식 자체가 내용이다. 다만 형식이 그 안의 내용과 다른 것은 형식은 그 안의 내용을 규정하는 내용, 즉 내용의 내용, Meta-내용이다.
그래서 형식에 따라 내용이 바뀐다. 같은 시라도 종이에 인쇄된 시와 노래로 불려지는 시는 형식만 다른 것이 아니라 내용 그 자체가 다르다. 같은 내용이라지만 라틴어로 씌어진 책과 영어로 씌어진 책은 분명히 다른 내용이다. 그래서 번역은 분명한 창작 작업이다. 심지어 같은 내용에 같은 언어, 같은 문자이라고 해도 필사본과 인쇄본은 내용이 다르다. 그래서 누구는 Media가 Message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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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형식에 매달리는 것을 고리타분하거나 권위적인 것으로 여긴다. 내용이 우선이고 형식은 그 다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 사람들이 진짜로 우려하는 것은 형식의 독점이다.
형식을 장악하면 세상의 모든 내용을 장악할 수 있다. 역으로 형식을 바꾸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성경을 필사본이나 구술이라는 형식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때에 유럽은 교황을 정점으로 한 봉건적인 수직적 세상이였다. 라틴어 성경이 영어와 독일어로 대량 번역되면서 유럽은 사회가 급격하게 변모해 갔다. 제국주의 시절 동양이 서양에게 속절없이 무너진 것은 강력한 군사력도 있었으나 그것 외에 당시 동양에는 없었던 형식이 유입되면서 기존 사회가 유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시기라 생각한다. 모든 형식이 Analog에서 Digital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IBM XT 컴퓨터를 접한 지 20년 정도가 지났는데 그 동안 변모된 것을 생각해 보면 가히 놀랍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많은 것이 폭발적으로 변했다.
Digital에 기반한 많은 형식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형식을 장악한 세력에게 많은 힘이 주어졌다. 개인에게 Desk-top 컴퓨터라는 새로운 Media 형식을 보급하는데 일등공신이였던 빌게이츠는 그런 세력의 대표격이였고 세계 1위로 갑부로 등극하기도 했다.
지금은 Post-PC 시대를 주도하는 아이폰의 스티브 잡스가 선두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보다 더 눈이 가는 것은 구글이다. 구글은 엄청나게 배포가 큰 도둑놈 같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이라는 새로운 Media 기기를 독점하여 물건 팔아 먹을 생각이 보이는 반면 구글은 우리의 생활 그 자체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형식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구글이 중국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할 듯 하다. 구글은 여러 문명권과 많은 충돌을 일으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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