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보긴 했는데 최근 들어 넷플릭스에서 다시 봤다. 처음 봤을 때 기억을 떠올려 보면 영화가 감각적이긴 한데 어딘가 서운하고 찜찜하다는 느낌만 남아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 냈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영화로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괜찮은 영화이긴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본 영화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는 불편한 점이 보인다.

젊은 남녀가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진다는 내용이다. 이혼도 넘쳐나는 세상인데 20대 젊은 시절의 남녀가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이겠는가. 지금까지 닳고 닳도록 써 먹었던 내용이다 보니 거기에 코미디도 넣고 판타지도 넣고 별의별 장치들을 다 동원하는데 이 영화는 일절 그런 것 없다. 심심하고 담백하게 그냥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으로 끝이다.

장치가 없는 건 아니다. 여주인공이 하반신 불구라는 장애를 가졌다는 강력한 설정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감독이라면 이런 배경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온갖 논란을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메시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한국에서는 이런 장치를 쓰기 어렵다. 내가 제작자라면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뜯어 말렸을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본 일본영화들은 사회적 시선을 담지 않으며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사랑이 있지만 그 모든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뇌과학으로 사랑의 메커니즘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콩깍지가 씌면 곰보 자국도 사랑스러운 보조개로 보이고 사랑이 식으면 사랑스럽던 보조개가 곰보 자국으로 보인다. 그녀의 장애는 곰보도 될 수 있고 보조개도 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사용될 뿐 이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담지 않는다.

그래서 남주인공의 가족이 여주인공과 대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랬다면 일본 사회가 하반신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영상으로 노출시킬 수 밖에 없고 그 시선에서 남녀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여주인공의 보호자인 할머니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대변했지만 여주인공의 보호자였기에 티가 나지 않았고 그 외 주변인들의 대사를 통해 사회적 시선이 살짝 드러나긴 했지만 그들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타인에 불과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남주인공이 장애를 가진 여주인공을 가지고 놀다가 헤어진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남주인공은 그녀의 존재를 다른 이에게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주인공은 당당하게 학교 후배를 동원해서 여주인공의 집을 정리하였으며 자신의 남동생에게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남주인공을 좋아하는 여성(우에노 주리)도 질투심에 여주인공을 찾아가 여느 치정극처럼 뺨을 후려 갈긴다. 남녀는 숨어서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떳떳하게 공개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많은 남녀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만났고 사랑을 했고 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대사처럼 그게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이야기를 하반신 장애라는 극적인 장치를 통해 덤덤하게 풀어간다. 꽤 재주 좋은 연출이긴 하다. 평론가들이 좋아하지 싶다. 김치싸다구를 날리는 극적 연출은 멸균 수준으로 없지만 심심한 이야기를 볼만한 영상으로 전달하며 심지어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볼품 없는 이야기로도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구나 싶다.

말을 빙빙 돌리듯 영화도 빙빙 돌린다. "조제"가 주인공인 사강의 소설에서도 조제는 일년 후 연인과 헤어졌던 모양이다. 그녀에게는 쿠미코라는 본명이 있었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을 "조제"라 했다. 소설의 조제처럼 일년 정도 지난 후 그들은 헤어진다. 영화 초반부 부터 헤어짐을 깔아 놓았다. 꼬마가 고치면 되지 않냐는 물음에 여주인공이 못 고친다고 말했던 유모차는 남주인공에 대한 은유였고 결국 남녀는 헤어진다. 그런 식으로 계속 밑밥을 깔아 놓는다.

훨체어를 구하자는 남자의 제안을 여자가 거부한 것은 그녀에게 연인은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고장난 유모차 대신 그녀는 자신의 일부인 남자에게 업혀다니며 결국 남자도 유모차처럼 고장나고 만다.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에서 몸이 힘든 남자는 오히려 웃고 있고 남자의 고장을 알아챈 그녀의 표정은 뾰루퉁하다. 개인적으로 연인 사이는 너와 나의 구분을 뛰어 넘는 관계라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선은 지켜야 한다. 그러기에 대개 사랑은 어렵고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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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나 선악 따위는 배제하고 남녀상렬지사를 담담하게 보여주긴 하는데 영화는 딱 거기까지다. 한국영화는 사회적 발언을 내는 것에 강박이 있는데 일본영화는 정반대로 사회에 대한 견해를 내 놓지 않으려는 강박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일본 영화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상황을 개인 수준으로 제한해  놓거나 아니면 아예 현실과는 전혀 상관 없는 판타지 세상을 배경으로 삼아 허황된 소리들을 무제한으로 늘어 놓는다.

영화는 대개 제목에 시선을 담는다. 그런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라는 제목에는 시선이 없다. 영화 진행의 변곡지점을 제목에 그대로 나열한 것 뿐이다. 왜 "물고기"가 아니라 복수형을 붙인 "물고기들"인가 싶었는데 모텔에서 물고기들이 나왔으니 "물고기들"로 이름은 붙인 것일 뿐이다.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그냥 이야기의 흐름만 따서 붙인 것이다. 뭐라도 이름이 있어야 하니까 이름을 붙인 수준이다.

 

예쁘게 포장되긴 했지만 지향하는 시선이 없으니 공허하다. 영화는 여성의 입장을 그리 고려하지 않는다. 남녀가 처음 만리장성을 쌓던 순간은 여성이 주도한 듯 보이지만 대낮에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본인이 스스로 훌훌 옷을 벗어 던지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 이건 그녀의 나신에 입을 헤벌레 벌린 남자의 판타지이다. 물고기 여관에서 그녀가 눈가리개를 하고 있던 것로 봐서 그녀에게 가장 야한 성관계라는 것은 고작 남자 고등학생이 꿈꾸던 변태적인 SM 플레이였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만으로 따지자면 원래 사랑은 이런 것이니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인식이 정당화 될 수 있는데 그 전제 조건은 남녀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조건을 가질 수 있을 때다. 영화는 그런 사회적 전제 조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 쿨해 보이는 이별 장면도 남자 입장만 생각한 것이다. 헤어진 후 조제가 전동차량을 타고 태연하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남자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남자 주인공의 대사처럼 도망간 것은 남자지만 그럼에도 조제는 별 일 없이 씩씩하게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고 도망간 남자는 눈물을 펑펑 쏟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여자 친구 앞에서 전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눈물을 펑펑 쏟는 남주인공은 조제의 말대로 자기만 아는 뻔뻔한 놈이다. 이 영화를 만든 주된 세력은 분명 찌찔하고 뻔뻔한 남자들이다.

 

이러니 일본에서 미투운동이 일어날 리가 없다. 그냥 개인이 알아서 씩씩하게 살아가면 될 것을 뭐 그리 난리를 치나 싶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위안부 문제나 과거사에 대한 사죄에도 그대로 연장된다. 자신들은 핵무기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것이 괜찮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냥 씩씩하게 살아가면 될 것을 뭐 이리 난리를 치나 싶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제작된지 꽤 되었지만 일본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뻔뻔하다.

 

 

PS ) 이 글 적어 놓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봤나 싶어서 찾아보니 대부분이 찬양 일색이다. 평론가들도 좋아할꺼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대체로 그런 편인 듯. 그런데 아직까지 내가 느낀 불편한 점을 토로한 건 못 봤다. 이게 나만 그렇게 보이는건가? 전문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평론가들에게는 이런게 안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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