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지만 이하 스포일러. 영화 이미 보셨거나 안 보실 분만 이하 내용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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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고 극장문을 나설 때 왠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안개꽃, 꼴랑 안개꽃이라니...
여러분들 주변에도 젊은 여자에게 대 놓고 관심을 표하는 나이 든 남자가 하나 쯤은 있을 것이다. 어릴 때에는 그런 남자들이 그저 주책바가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화 "드래곤 볼"에서 여자 팬티만 보면 코피를 쏟는 무천도사가 딱 그런 캐릭터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을 비웃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조금은 이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욕망을 추하게 그리는 것은 아주 쉽다. 아니 그럴 필요도 거의 없을 만큼 공인된 저질 욕망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 봐야 무천도사 같은 희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던 것을 영화에서는 안타까운 그 어떤 것으로 그려 놓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거기에 어느 정도 설득을 당한 듯한 눈치였다.
문학적 재능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쩔 수 없는 공대생 출신의 "서지우"와 마찬가지로 나도 공대 출신이고 나에게 영화는 흡사 늙은 사자 이야기를 다루는 동물의 왕국을 보는 듯 했다. 뭔가 아련하고 찜찜함을 주는 영화가 나에게는 아주 원초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읽히는 것에도 웃음이 나온다. 영화에서 비웃는 그 공대생이 바로 나다. 별 수 있나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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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그 이야기의 다른 버젼들이 자꾸 생각이 난다. 특히 "서지우"의 죽음은 히폴리토스가 연상된다. 아버지 테세우스의 두번째 아내 페드라를 범했다는 죄로 전차를 몰고가다가 죽었다는 히폴리토스 이야기와 서지우의 상황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원작자든 영화감독이든 "은교"를 만든 창조자는 분명 히폴리토스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듯.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참으로 애매모호해 보인다. 난 처음에 그 둘의 관계가 동성애적인 관계이고 은교가 등장하면서 삼각 관계를 형성할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동성애 관계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더 강해 보인다. 사제지간이란 것은 종종 부자관계처럼 동작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스승에게 생물학적 아들이 없을 때에는 묘하게 그런 속성이 더 강해진다.
초반 서지우가 이적요의 집에서 궂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풍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이적요가 서지우의 소설을 대신 써 준 것은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일종의 분신이며 자신의 연장이다. 이적요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서지우를 통해 실현하며 서지우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이적요의 재능을 전수 받기 원한다. 그 둘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부자지간 같은 사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은교" 원고를 훔쳐간 서지우를 이적요는 도둑놈이라고 내치지만 본질적으로 아들은 아버지에게 도둑놈일 수 밖에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후계자이고 후계자의 다른 이름은 도둑놈. 시간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가졌던 권능을 부여하고 다시 그들의 아들들에게 이를 반복한다. 이적요가 어느 날 자신의 생일에 불쑥 찾아온 서지우에게 다시 술 한잔을 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빼았을 수는 없다. 그 중 가장 금기되는 것은 아버지의 여자. "은교"라는 원고를 강탈해 간 것으로 그치면 좋았을 것을 경험 없고 미숙한 아들은 아버지의 여자인 "은교"를 실제로 강탈해 버린다. 테세우스가 포세이돈에게 아들의 죽음을 빌었듯 이적요는 자동차에서 조향장치를 풀어버린다. 결국 서지우는 분노에 차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인 중앙선, 즉 넘어서는 안될 금기를 넘으려다가 죽음에 이른다.
젊은 수컷 사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늙은 수컷 사자의 모습이 보였다. 현실에서는 결국 늙은 수컷이 싸움에 패배하고 무리를 떠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이적요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젊은 사자를 죽여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후계자를 죽이는 것이고 자신의 분신을 죽이는 일. 분노에 차 후계자를 죽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취하고자 했던 은교를 취할 수도 없다. 안개꽃 한다발을 남기고 떠날 수 밖에 없는 결말로 끝난다.
후계자 죽여가며 그 난리를 피웠는데 얻은 것이 꼴랑 안개꽃 한 다발. 이 얼마나 웃기는 결말인가? 엄한 노인네의 욕망은 결국 후계자를 죽여 놓기까지 했는데 그러면서 얻어 낸 것이 꼴랑 안개꽃 한 다발이다. 안개꽃을 생각해 보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김칫국 마신 격이다. 이런 잔인한 코미디가 어디 있겠는가?
이 얼마나 허무하고 안타까운 늙은 사자의 발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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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의 성적 욕망은 대개 추해 보인다. 젊은 남자가 늙은이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경쟁 관계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성적 욕망이 추해 보이는 진짜 이유는 늙고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있으냐 없으냐의 차이에 연유한다. 이적요의 욕망이 그나마 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적요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빼 줄 수 있는 곶감이 있으면 추해 보이지 않는다.
사랑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라는 것이 다 그렇다. "건축학 개론"에서 굳이 옛 사랑을 찾아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이 괜찮게 보이는 것은 결정적인 이유는 주인공들이 나름의 경제력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둘은 추억을 공유할 뿐 추억을 매개로 서로의 현실을 얽어 매지 않는다.
이적요는 은교가 보고 있는 교과서에 자신의 시를 올린 능력자이다. 포도주를 언제부터 마셨느냐는 은교의 질문에 막힘 없이 줄줄 답을 내 놓고 거울을 절벽에 떨어뜨렸을 때 위험을 감수하고 거울을 주워오는 능력을 보인다. 남자의 능력이란 것은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에너지와 거래를 할 수 있는 대상이다.
여자가 요물이란 소리를 듣는 것은 성적 매력을 무기로 남자의 능력을 쏙 뽑아 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적 매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다. 이적요의 집은 두꺼운 철문으로 통제되고 있지만 은교는 집 주인이 그 존재조차 잘 몰랐던 사다리를 통해 어느날 갑자기 이적요의 눈 앞에 나타나 그를 매혹시켜 버리고 만다. 사다리는 이적요에게 통제 불가한 영역이다.
모든 주도권은 은교에게 있었다. 영화에서 은교는 항상 남자들의 공간에 먼저 찾아가 얼굴을 들이민다. 은교는 어느 날 갑자기 이적요에게 나타났고 또한 서지우의 오피스텔을 먼저 찾아간다. 남자들은 선택권도 없이 언제나 문을 열어 줄 수 밖에 없는 무방비 상태이댜. 어찌 은교가 남자들에게 요물이지 않겠는가?
은교는 이적요와의 만남에서 그의 능력을 빼 먹어 서지우에게 써 먹는다. 심지어 서지우의 능력을 빼 먹어 이를 다시 서지우에게 구사한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서지우가 은교를 범하고자 할 때 써 먹은 것인데 그걸 은교가 써 먹어서 서지우를 범한다. 수컷의 어쩔 수 없는 포지셔닝의 허접한 한계가 고스란히 보이지 않는가? ㅋㅋㅋ
외로움? 그건 은교가 서지우를 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로 외로워서가 아니라 "은교"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서지우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은교에게 있어 서지우가 가진 능력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은교의 눈에 비친 이적요가 가진 능력의 다른 이름이 "연필"이듯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은교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안과 삼촌인 엔키에게 자신의 음부를 바쳐 세상의 온갖 권세를 취했던 인안나의 매력이란 것이 어쩌면 이런 것이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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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동안 재미 있었다. 남성의 불안함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능력은 봐 줄만 하다. 마지막 안개꽃은 나에게 실없는 웃음까지도 유발시켰다. 그런데 마누라의 이야기나 주변 관객의 표정을 보니 내가 느끼는 것과는 뭔가 많이 다른 모양이다.
나에게 이 영화의 요약은 이적요와 서지우가 은교에게 완전히 농락 당하는 이야기이다. 언제나 선택 받아야 하는 수컷이 주도적인 암컷에게 휘둘려 김칫국만 거하게 마시다가 꼴랑 안개꽃 하나 받았다는 것이 내용이다.
근데 이런 내 이야기가 여자들 입장에서 듣기에는 좀 불편한가 보다.
쩝...공대 출신이라서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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