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이면 집에서 술 한잔 하면서 느긋하게 탑 밴드를 보는 것이 몇 안 되는 생활의 낙이였는데 그 방송이 나오지 않는 어제 저녁은 웬지 허전한 느낌.

맨토 선발이 끝났을 때 내 눈에 들어온 팀은 4팀. 토너먼트 대진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뽑은 탑 4가 모두 4강에 들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분은 톡식과 브로큰발렌타인의 16강 대전. 방송만을 생각하면 그 때가 진짜 결승 같은 분위기였다.

브로큰발렌타인이 분명 잘하는 밴드이긴 하다. 그들이 멘토로 삼은 노브레인이 과연 그들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그러나 애초부터 내 탑 4에는 그들이 없었다.

브로큰발렌타인의 16강 방송 및 이전 곡을 다운 받아 들어 봤더니...
뜨아!!! 드림씨어터가 그런지 락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사운드. 듣는 나를 완전히 미치게 만든다. 사운드가 빡세면서도 세련되고 딱 떨어진다. 방송에서 그들이 부른 포커페이스도 마찬가지. 완성도의 끝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탑4에 그들은 없다. 16강 방송이 내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브로큰발렌타인이 출중한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여 준 완성도와 관계없이 나는 톡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톡식이 연주를 시작했을 때 난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방송을 보면서 자세를 고쳐앉아 앉아서 보게 되고 그들이 노래를 마쳤을 때 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브로큰발렌타인은 비장했고 정말 열심이였다. 그들은 무대에서 압도적이였고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톡식과 달리 난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전문 평가단의 평가는 브로큰발렌타인의 압도적 우세. 그럴 수도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나도 압도적이였다 그러나 나는 직접 음악을 만들어 본 심사위원들의 입장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봤다. 내 생각대로 심사위원들은 다른 선택을 보여줬고 김종서의 최종 선택으로 톡식의 올랐갔다.

===============================================================================

브로큰발렌타인은 분명 완성도 면에서 탑밴드에 출연한 모든 밴드를 통틀어 최강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을텐데도 이런 완성도를 갖춘 밴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인지는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의 무대는 눈물나게 아름다웠고 봐도 봐도 역시 아름답다. 완성도를 기준으로 하자면 탑밴드의 우승은 브로큰발렌타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내가 브로큰발렌타인을 탑 4에 올려 놓지 않았던 것은 방향성 때문이였다. 외국의 일류 밴드를 보는 듯한 그 완성도는 높이 평가 받을만하고 듣고 즐기기에는 귀를 호강하게 해 주는 입장이지만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영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평가단의 평가에서 브로큰발렌타인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전문평가단의 시선이 어디에 향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의 평가 기준은 외부에 있었고 그 외부에 기준에 맞춰 완성도가 높은 팀을 선택한 것이다. 창작을 하는 입장이 아니기에 취할 수 있는 입장이다.

톡식의 완성도는 브로큰발렌타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너 어떻게"를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그 아이디어는 그 완성도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소름끼치는 것이였다. 그 어디에서도 이런 음악을 본 적은 없었다. 정원영이 톡식을 아이디어가 넘치는 팀이라고 한 것에 난 100% 동의 한다.

비유를 하자면 브로큰발렌타인은 명품 수입품이고 톡식은 자체 생산품이다. 음악적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외부의 것을 받아 들여 보급해야 하는 상황이였다면 브로큰발렌타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고 평론가들은 이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런 평론가의 입장은 탑밴드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특정 분야의 상위 전문가라는 집단은 외부의 것을 들여와 이를 기준으로 삼고 내부를 통제해 왔다.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자생적인 목소리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외부에 보여 줄 것을 아예 차단했다.

기준은 외부에 두고 있었지만 사실 진짜 시선은 내부의 통제에 있었던 것이다. 외부의 것을 끌여들여 내부를 장악했다. 대표적으로 학계는 이런 시스템에 의해 돌아간다. 외국 명문대 박사의 상대적인 선호는 이런 배경 탓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탑밴드를 선발하는데 있어 기준을 이런 외부에 둬야 하는가?

완성도가 문제가 아니다. 그 이전에 완성도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의 문제다. 이런 면이라면 브로크발렌타인이 아닌 톡식이 선택되어야 했고 그래서 나의 기준은 톡식이였다. 평론가들과 달리 창작의 입장에 서 있는 심사위원들의 선택은 다를 것이라 봤고 역시 그들의 선택은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브로큰발렌타인은 요소투입을 극대화 한 팀이다. 각 요소 요소의 품질이 아주 좋다. 그러나 그 요소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외국의 누군가가 이미 시도한 것이였다. 브로큰발렌타인에게 거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는 보이지 않는다. 처절한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만 타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 넣어 주지는 못한다.

톡식과 브로큰발렌타인은 포지션이 다른 팀이다. 아무리 완성도를 높인다 한들 상위 포지션을 이기기는 어렵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와의 관계 같다고나 할까.

===============================================================================

탑밴드 결승은 생각보다 싱거웠는데 구도는 참 희안했다. 두 팀이 모두 2인조 밴드가 되어 버렸고 하나는 기타, 하나는 건반.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참으로 상징적인 대결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난 톡식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TOXIC의 드럼치는 슬옹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걸 어떻게 이기냐 싶었는데...그런데 말이다...

그 다음의 뮬렝겐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 이전의 톡식 무대가 싹 잊혀 지더라. 밴드 음악이고 뭐가 다 닥치고 그냥 빠져 들게 되던걸. 난 POE라는 밴드가 뮬렝겐 개인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봤고 뮬렝겐 개인이 식상해지면 POE는 그 지점이 한계라고 봤는데 방송을 볼 수록 식상해 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 매력이 더 빛난다. 심지어 베이스 멤버가 탈퇴하는 일이 벌어져니 오히려 그 개인의 매력이 더 살아나는 그야말로 마력을 가진 그녀.

그냥 탑밴드라는 제목을 치우고 순전히 그냥 내 맘대로 하라고 하면 내 선택은 POE나 TOXIC이 아닌 뮬렝겐. 물론 방송 결과는 톡식의 우승이였지만 내 눈은 톡식이 아닌 뮬렝겐에게 간다. 그녀 다시 볼 수 있을까?

'자작 > 잡다한_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탑밴드2 16강전  (0) 2012.07.01
[영화 리뷰] 은교 (스포일러)  (1) 2012.05.14
Red Riding Hood (스포일러)  (0) 2011.08.23
누들로드  (0) 2011.07.23
인셉션  (0) 2011.02.08
Posted by ikipus
: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290)
자작 (222)
(19)
지극히_개인적인 (49)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달력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