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옛날에 본 에반게리온을 요즘 보게 되었다. 이 놈 참 ... 성경과 독일어에서 따온 듯한 단어들, 꽁꽁 숨겨 놓고 야금야금 흘리는 스토리, 뜬금없는 심리극을 보는 듯한 장면들,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하지만 종반을 향해 갈수록 화려한 현란함은 공허하게 느껴지고 엔딩을 보고 난 뒤 느껴지는 짜증. 겨우 이걸 가지고 그렇게 비비 꼬아 놓았단 말인가?
처음에는 거창한 신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신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긴 한다만 거창한 스케일에 비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네 인생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잖은가. 어렵고 심오한 고급 작품이라고? 개풀 뜯어 먹는 소리다. 빈약한 속 내용에 포장은 그럴 듯 하게 하는 섬나라 일본 특유의 사상적 실용주의가 보이는 부분. 남는 것은 오로지 캐릭터 뿐이다.
에반게리온의 주인공은 신지이다. 그리고 비중이 덜하긴 하지만 주연급은 아스카와 레이. 이들은 에바의 파일럿들이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나이는 14세. 일본에서 14세는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새내기 청소년의 나이가 아닐런가 싶다. 14세 얼라들한테 막강한 사도로부터 인간을 수호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긴다는 건 넌센스. 주인공들의 나이는 감독의 설정이다. 캐릭터의 나이는 14세.
주인공들은 나이로 볼 때 성인이 아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로도 남을 수 없는, 성인이 되어야 하는 과정에 들어선 자들이다. 육체는 잘 먹고 잘 자면 유전자가 알아서 성인으로 키워준다. 그러나 정신적인 성인은 잘 먹고 잘 자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에반게리온은 이 얼라들이, 특히 신지가 정신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바램을 담은 이야기다.
레이는 0호기의 파일럿이다. 왜 1호기가 아니고 0호기인가? 레이는 영혼이 있으나 자아가 없는 존재.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아니 그 이전의 존재이다. 자아가 없으므로 타인도 없다. 피아간의 구분이 없는 존재. 신지도 레이일 수 있고 아스카도 레이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레이일 수 있다. 레이는 무수히 많이 존재할 수도 있으며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만화에서 레이는 리리스의 복제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리리스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인 존재, 즉 모든 것은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존재. 자아/타아 개념이 없는 존재로서는 그럴싸한 설정이다. 자타의 개념이 없는 레이는 감정이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지시에 따를 뿐. 레이가 눈물의 의미를 깨달은 이후 0호기는 나타나지 않으며 극장판 엔딩에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겐죠의 지시를 거부한다.
신지는 1호기의 파일럿이다. 0호기와는 다른 존재. 1호기는 신지의 나이인 14세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신지는 실제 평범한 14살의 중학생으로 묘사된 캐릭터이며 이것이 신지가 주인공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인 듯. 신지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얼라다. 모든 것을 부모를 비롯한 남으로부터 의존받던 시기에서 홀로 서기를 시작하는 단계. 홀로서기로 대면하기 싫은 일이 많다. 그저 도망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도 못한다. 도망쳤을 때 나타날 결과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에 타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버림 받는 것이 더 두려워 에바에 오른다. 그는 카오루를 좋아한다. 그러나 카오루를 죽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겨 날지 두렵다. 신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신지는 아예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더 큰 두려움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신지를 움직이는 것은 신지가 아니라 오로지 두려움 뿐이였다.
아스카는 2호기의 파일럿. 2호기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녀의 나이는 14세이지만 대학을 졸업했다.풋사랑처럼 보이기는 하나 카지에게 반하기도 한다. 신지보다는 더 어른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홀로 서기를 못하고 남들에게 자신을 구하며 헤메는 얼라일 뿐이다. 아스카는 욕심과 질투가 많다. 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고 자신을 최고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깨졌을 때 그녀는 2호기를 움직일 수 조차 없게 된다. 그녀가 알고 있던 그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스카는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2호기를 타고 멋지게 적들을 제압하여 남들에게 칭찬 받고 인정 받는 것이 아스카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아스카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이유 역시 두려움이다. 남들에게 버림 받고 싶지 않다. 남들이 자신을 버릴 수 없도록 자신은 휼륭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각종 테스트에 신지에게 밀리고 실전에서도 비참하게 패배했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구하던 아스카로서는 자아가 없어졌다. 그녀는 2호기를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
극 중에서 에바는 각 파일럿의 자아를 나타낸다. 파일럿이 에바의 중추신경에 해당하는 부분에 들어가 에바의 두뇌 역할을 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그럴 듯해 보인다. 그들은 홀로 서기를 못하는 존재이기에 에너지를 외부의 케이블에 의지하고 있으며 외부 도움 없이 홀로서기는 단시간만 가능할 뿐이다. 레이가 눈물을 흘림으로서 0호기가 더 이상 0호기로 존재할 수 없을 때 0호기는 전투 중 자폭하게 되며 아스카가 자아를 완전히 잃어 버렸을 때 2호기는 터럭조차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에바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사도의 복제품인 생명체다. 홀로 서기가 가능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잠재력이 유효한 14세 신지의 1호기는 가끔 이런 잠재력이 재현되면서 외부 플러그의 힘이 아닌 자신만의 힘으로 괴물 같은 전투력을 과시한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신에 가까운 복제품. 내부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19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끔찍한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영화판에서처럼 어쩌면 신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
신지는 내향적, 아스카는 외향적이기는 하지만 그 둘은 두려움에 움직인다는 점에서 결국 동일하다. 장자의 내물편과 외물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연유한 것이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그들이지만 그들은 타인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다. 타인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이 아직 얼라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파일럿들에게, 관객에게 어른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감독은 14세 얼라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우선 '나'라는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만화는 '나'는 무엇인지 그것부터 건드리고 그 때부터 만화는 선문답 내지 사이코극이 된다. '나'에 대한 의문 제기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숱한 사람들이 던져 왔던 화두이지만 명쾌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어려운 문제. 감독의 의도가 참 가상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굳이 만화로 건드리고 싶었는지 원 . . .
TV판이나 영화판이나 결론은 신지의 '나'를 찾는 여정이다. 다만 TV판은 관객의 특성상 19세 이하 관람가로 제작된 것이고 영화판은 19세 이상 관람가로 제작된 것 뿐이다. 비록 껍데기일망정 에반게리온은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신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금기를 건드릴 수 밖에 없는 것. TV에서 근친상간이나 엄마와 딸이 한 남자를 두고 삼각 관계를 벌이는 것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더 어린 층을 대상으로 한 TV판이 영화판 보다 친절하다. 감독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친절하게 일일히 답을 달아주고 있다. 하지만 질문 자체가 워낙 난해한 것들. 인간의 언어로 그 뜻을 온전히 전하기에는 어렵다.
TV판 결론을 보면 나를 잃고 망상에 빠져 현실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감독의 '오타쿠 보완 계획'이라는 발언이 나오면서 만화의 모든 내용을 오타쿠의 기준에 맞춰 해석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이거야 말로 오타쿠 스러운 짓이다. 감독은 보완 대상으로 삼았던 오타구적인 행태를 자신 스스로 저질러 오타쿠들을 오타쿠 짓하게 하도록 내몰아낸 셈 아닌가? 그런 해석은 그럴듯해 보이고 설령 그것이 감독의 실제 의도라 해도 내 입장에서는 너무 오버스러운 해석이다. 그렇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정도의 차이일 뿐, '나'를 잃고 헤메이는 사람들은 많다. 현대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은 그랬다. 공자가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에도 '나'를 잃고 헤멘 사람들은 많아 보인다. 굳이 오타쿠로 한정해서 에반게리온을 해석하는 것은 너무 좁은 시야다.
신지는 同而不和하는 小人이다. 신지가 에바의 파일롯이 되는 것은 '나'와 '타인'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나'와 '타인'을 구분 할 수 없는 것, 이것이 同이다. 그러나 신지는 즐겁지 않다. 큰 두려움에서 작은 두려움을 택한 것 뿐이기 때문이고 에바의 파일럿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작은 두려움을 선택하는 것 뿐이다. 신지에게는 두려움만 있을 뿐 신지 본인은 없다. 따라서 신지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들과 사이 좋게 지낼 수 있겠는가?
남들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맞출 경우 일이 잘못되면 남 탓을 한다. 그 집이 좋으니 사라고 권유한 부동산 가계를 원망한다. 주식시장에서 어떤 종목이 좋다는 소문을 퍼뜨린 세력을 원망한다. 정작 최종 결정은 자신이 했음에도 자신을 망각한다. 자신이 아니라 남이 결정했다고 믿는다.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했던 사람들. 그들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한다. 오직 상부의 명령만 따랐으며 상부에 죄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비겁한 짓이다. 나를 버리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동화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아이들이라면 모를까 어른이라면 보편타당한 가치판단을 스스로 해야 한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는 유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和而不同이다. 타인과 화합하면서 지낸다. 그러나 남들에게 휩쓸려 동화되지도 않는다. 공자가 말하는 君子는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아니 남 탓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신지처럼 카오루를 죽여 놓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아스카처럼 신지를 질투하다가 몇 번의 실패로 아예 추락하는 일도 없다. 자기는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 바깥의 상황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남들과는 화합한다. 홀로 서는 인간만이 타인과 상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결국 TV판은 선문답만 잔뜩 늘어 놓고 "나는 나"라는 다소 상투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하긴 언어로 어떻게 그 이상을 설명하겠는가? Recursive한 의미 없는 문장으로 맺을 수 밖에 없다. 이를 받아 들이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전달 의미는 각각 달라질 것이다. 아무튼 TV판에서 신지는 '나'를 알게 된다. 성인으로 첫발을 내 디딘 것에 사람들은 축하해 마지 않는다.
내 인생 아무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는 너무나도 평범하고도 당연한 말을 너무나도 친절하게 그러고도 어렵게 설명해 놓은 것이 TV판 26부이며 에바 TV 시리즈의 결론이다. 똑같은 결론을 영화판 엔드 오브 에바에서는 모든 인간이 同한 상태를 신지가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영화판이나 TV판이나 결론은 마찬가지인 듯.
은하수는 별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은하수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별은 혼자서 빛나야 한다. 혼자서 빛나는 별이 은하수에 들어가면 별은 다른 별의 영향을 받는다. 서로의 인력으로 상대를 구속하며 움직인다.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별이 혼자 빛나는 존재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간다. 사회에 들어온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영향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은하수의 별은 혼자 빛나는 존재이듯 사회 속의 인간은 홀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타인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선형적인 사고에서 1+1=2 이다. 인간은 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가? (1+1)>2 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개별적인 결과의 합보다 집단의 결과가 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너지 효과에 혹해서 개별적인 1을 우습게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오류를 저질러 (1+1)<2 가 되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홀로 설 수 있는 인간들끼리 상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상생이 어려운 것이다. 어설픈 상생은 타협이나 종속으로 귀결된다. 타인과의 관계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마라. 타인의 관계도 자신이 짊어 질 부분인 것은 틀림 없으나 그 중압감에 자신을 잃어 버리면 결국 타인과의 관계도 없다.
느낀바를 주저리 주저리 써 봤다. 언제 시간 되면 감독이 말하는 바 말고 공허한 껍데기에 대해서도 한번 주저리 해 보고 싶기도 하다. 공허하지만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거든.
PS: 주인공들 중에서 레이가 제일 인기가 좋은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 사실이 왠지 느낌이 좋아 보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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