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숭이 임금님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다른 면이 보인다.
한 때 음악에 대한 궁금증으로 음계에 대해 이것저것을 찾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음계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음들을 모아 놓은 것이란 견해였다. (http://ikipus.tistory.com/entry/Non-Linear-Music) 서로 배타적인 성질을 가진 A와 B가 있을 때 A인 듯 B이고 B인 듯 A인 경지를 다루는 것은 예술이라 불리는 듯 하다.
공학에서 서로 방향이 다른 2개 이상의 목적함수를 절충시키는 것은 최고 전문가의 영역이다. 수식으로 딱 맞아 떨어지게 계산되는 것이 아니기에 전체적인 동작에는 무리가 없게 양쪽을 적당히 절충하는 것은 경험치에 의존한 의사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이율배반적인 목적함수를 적당히 조절하여 2개가 모두 충족되도록 하는 이런 작업은 해당 분야의 꽃으로 불리고 예술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음계가 같은 듯 다르고 같은 듯 다른 음의 집합이듯이 옷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옷은 신체를 감추기 위해 입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울 듯 하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옷이라는 것은 신체를 가리는 동시에 드러나게 한다.
그저 가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거적데기를 둘러도 나쁠 것이 없다. 하지만 옷의 목적은 가리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에도 있다. 아마존 원시부족의 벌거벗은 나신보다는 적당히 옷을 입은 사진이 더 자극적이다. 감추고 가리는 것이 오히려 그 부분을 더 강조하거나 다른 곳을 돋보이게 만든다. 옷은 신체를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성향이나 정체성 또는 신분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내 생각에 최고의 옷은 가린 듯 드러내고 드러낸 듯 가린 옷이다.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2가지의 목적함수를 거짓말처럼 동시에 충족 시키는 옷이야 말로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벌거숭이 임금님의 옷은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야말로 벗은 듯 입었고 입은 듯 벗은 옷이 아닌가? 양립 할 수 없는 것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속임수가 필요하다. 음악은 인간이 가진 감각의 맹점을 파고드는 속임수를 구사한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이 천하의 명품이 되기 위해서는 속임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속임수를 받아들인다면 예술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기가 되고 만다. 임금의 권위에 기댄 속임수는 최고의 명품을 탄생시킬 뻔 했지만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 의해 예술은 사기로 전락하며 임금님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지금의 화폐시스템도 엄청난 속임수가 있는 예술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쓰잘데기도 없는 종이 쪼가리로 많은 것을 주고 받으며 지금은 은행 컴퓨터의 메모리 칩에 있는 조그마한 Capacitor의 충전 여부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것을 보면 어린아이 눈에서 볼 때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은 예술을 할 수 없는가보다. 주어진 재능에 따라 기술을 익히고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속임수를 속임수라고 곧이 곧대로 인식하는 한 평생 예술은 할 수가 없다.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그 지극한 경지를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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