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한 포스팅을 2개 정도 올려 놓았었는데 그 2개 모두 덧글이 달렸다. 그저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적어 놓는 블로그이기에 사람들이 별로 많이 찾지 않고 왠만하면 덧글도 달리지 않는데 아날로그와 디저털에 대한 글에 달린 덧글의 공통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내용.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는 명확한데 어렵다는 호소가 덧글로 매번 달리는 것을 보고 네이버에서 "아날로그 디지털", "Analog Digital"로 한번 검색을 해 봤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좋다는 감상적인 글이 눈에 많이 띄고 디지털 기기에 대한 Review들도 꽤 있으며 공학개론 수준의 이야기들 내지는 Converter에 대한 공학적인 지식이 대부분이였다.
전자공학이나 신호처리 관련 이론을 접하는 공학 관련 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중들은 Analog와 Digital을 구식/첨단의 구도로 이해하는 듯 보였다. Digital은 서비스나 제품에 관련된 수식어의 성격이 강했고 Digital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막상 Digital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고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익숙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다들 모르고 있었다. 이러니 Analog와 Digital에 대한 내 생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Analog와 Digital이 무엇인지 한번 풀어서 써 보려고 한다.
사전적 의미
사전에서 Analog와 Digital을 뭐라고 써 놓았으까 궁금해서 한번 찾아 봤다. 네이버와 야후 사전 두 군데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네이버 사전]
analog
명사 전자】
아날로그
, 계량형(計量型) . . .
형용사 유사물의;아날로그의;유추의[에 의한]
[야후 사전]
analog
형용사
아날로그(표시)의
(어떤 양의 연속적인 물리량을 표시할 때 쓰는 말).
. . .
뭐 이래? 찾고 보니 어이가 없다. Analog 그냥 아날로그란다.
그래 그럼 Digital은 어떨까?
[네이버 사전]
digital
형용사 <통신·정보·녹음 등이>
디지털(방식)
의(opp. analogue),
. . .
명사 《익살》 손가락
. . .
[네이버 영영사전]
digital
showing numerical information in the form of a set of DIGITs, rather than by means of a pointer on a dial, eg as on a digital watch.
[야후 사전]
digital
형용사 (통신·신호·녹음이)
디지털[계수]식의
( analog).
. . .
명사 익살》손가락.
[야후 영영사전]
digit
1. any of the ten figures 0 to 9.
2. [technical]a finger or toe.
Analog는 아날로그이듯이 Digital은 디지털이란다. 이게 무슨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성철스님스러운 짓인가? 사전이 엉터리이니 일반 대중이 Analog와 Digital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야후사전이 네이버 보다는 그나마 낫다. 야후 사전에 나온대로 Analog는 연속적인 물리량을 의미한다.
Digital은 사전적 의미에서 숫자로 표현되는 표기 형식이다. DIGIT는 손가락이란 뜻이고 손가락은 10개이므로 10진법의 숫자를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 ~al이 붙이면 그러한 숫자로 보이는 형식을 의미하는 형용사가 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Analog는 연속적인 물리량이고 Digital은 숫자로 표시하는 형식을 의미한다. 전자는 물리량이고 후자는 표현 형식이다. Analog와 Digital이 반대말이라 할 근거는 사전적 의미로 봤을 때 전혀 없어 보인다. (사전에서 버젓히 Digital의 반대말은 Analog라고 써 놓은 건 무슨 배짱일까)
연속량과 숫자
사전에서 본대로 Analog는 연속적인 물리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에 연속적이지 않은 물리량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물리량을 모두 숫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은가? 학교 다닐 때 뭔 소리 하는지 전혀 모를 물리 배울 때 보면 숫자로 계산 잘도 하더만.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연속적인 양을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중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기억해 보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무리수는 분명 수이지만 숫자로 온전하게 표기할 수 없다. 그래서 무리수는 숫자로 표시하지 못하고 별도의 기호로 표시한다. 원주율 파이, 루트 2, 루트 3 등이 그렇다.
이 세상이 수로 이루졌다고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의 존재는 그야말로 난제였다. 루트 2는 분명 선분 위에 존재하는 수이지만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무리한 수, 무리수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연속량이라는 Analog와 표현 양식인 Digital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숫자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다른 형식을 사용해서 사용하면 될 것인가? 1시 root(2)초는 숫자를 표현하는 Digital 시계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초침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아날로그 시계라면 표현 가능하다. 사물은 연속으로 이루어졌고 다만 표현 방식이 이에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닌가?
사전에서 Analog는 연속량일 뿐이고 Digital은 표현 방식 중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들 인식하고 있는 Analog와 Digital의 대립관계는 근거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Digital이 Analog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사전에는 Digital의 반대말이 Analog라고 나오는가?
Continuous
나는 Analog와 Digital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Analog와 Digital은 서로에게 상반되는 반대 개념이 맞다.
Analog적 관점에서 세상은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면 존재하는 거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철물점이나 지물포에 가서 전선을 사 구입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가서 전선 주세요 그러면 몇 미터나 필요하냐고 물어 볼 것이다. 1미터 달라고 하면 전선이 칭칭 감긴 롤에서 1m만큼 전선을 잘라서 준다. 커다란 롤에 감긴 전선이나 내 손에 있는 1m 전선이나 모두 전선이다. 1cm 달라고 하면 주인이 짜증은 내겠지만 1m짜리나 1cm짜리나 전선은 전선이다.
그렇다면 0.000000000001mm 짜리 전선은 전선인가?
Analog적인 관점을 고수해 보자면 전선은 길이에 대해 연속적으로 존재하므로 아무리 길거나 아무리 짧아도 전선은 전선이다. 따라서 0.000000000001mm 짜리 전선은 전선이다.
세상의 물리량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Analog적인 관점이다. 영어로는 Continuous, 끊임 없이 빈틈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사전상의 의미에서 Analog는 연속적인 물리량을 의미한다. 연속적인 물리량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들어 있다. 즉 Analog라는 것에는 세상이 연속되어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녹아있다.
Discrete
세상이 Continuous하다는 관점이 Analog라면 그와 반대로 세상은 Discrete 하다는 관점이 Digital이다.
Continuous는 빈틈 없이 빽빽한 것이니 그 반대라면 빈틈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연속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불연속이라고도 하고 수학에서는 이산이라고 한다. (정조의 이름이 아니다. 이산-離散- 이다) 무리수의 예에서 보았듯이 숫자는 표기되는 자리수 만큼만 표시된다. 즉 표기되는 자리수만큼의 해상도만을 제공한다.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연속성을 포기한 것이다. 직선을 점의 연속으로 보는데에서 나오는 수는 그 전체가 숫자로 표시될 수 없다. 수식에 숫자 외에 기호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다. 이것은 표현 방식의 한계라고 치자. 그런데 세상이 Discrete 하다는 관점은 타당한 것인가?
아까의 전선 이야기를 해 보자. 1cm 전선이나 1m 전선이나 다 전선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0.000000000001mm의 전선은 과연 전선인가?
0.000000000001mm는 구리 원자의 폭보다 작다. 구리 원자의 폭보다 작은 전선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전선을 잘게 잘라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전선은 전선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전선은 길이에 대해 연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구리 덩어리를 잘게 잘라나가다 보면 구리는 구리가 아니게 된다. 구리라는 물질의 성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
데모클리토스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원자론을 주장했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Atom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Continuous하지 않고 Discrete 하다는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근대에 들어 돌턴이 이 원자론을 부활시켰고 톰슨이니 러더퍼드니 보어니 하는 사람들이 원자를 연구해 왔다. 원자도 양성자/중성자로 나뉘어 질 수 있으며 이것도 모자라서 소립자니 쿼크니 하는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쨌든 분자 단위를 넘어서 물질이 쪼개어지면 고유한 물성은 상실된다.
어떤 물질의 물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분명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이 세상이 쪼개어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 되어 있다면 질량은 쪼개어지지 않는 것의 질량에 대한 정수의 배수값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정수가 완전한 수라는 피타고라스의 교리(?)에는 이러한 사상이 숨어 있다. 원자론이 사실이라면 질량은 Continuous한 양이 아닌 Discrete한 양이다.
Analog의 시대
유럽이 근대를 벗어나고 과학문명을 만들어 내면서 취했던 입장은 Analog적 세계관이다. 고전물리학에서 거의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 미적분은 Analog적 관점을 전제로 한다. 머리가 아플 것 같지만 여기에서 미분이란 놈을 살짝 건드려보자.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을 함수에 한번 적용해 보자. y=f(x)는 X이면 Y라는 뜻이고 그 관계가 결정되는 것은 f에 따른다. 어떠한 X에 대해서도 이에 대응하는 Y가 존재한다면 이 함수는 연속 함수라고 한다. 빈틈없이 빽빽한, 즉 Continuous한 X의 집합에 대응하는 Y의 집합이 있는 것이다.
임의의 x에 대응하는 y가 존재한다면...
따라서 길이가 아무리 짧더라도 x의 폭에 대응하는 y의 폭이 있다. x 폭의 길이를 거의 점에 가깝게 짧게 하면 거기에 대응하는 y의 폭도 점에 가깝게 짧아진다. x의 폭을 거의 0에 가까운 dx로 적용할 때 이에 따른 y의 변화를 나타내는 함수를 도함수라고 부른다. 흔히 기호로 y'=f'(x)로 나타낸다.
다루는 대상이 빈틈 없이 꽉 차 있다는 Analog적 관점에서 선분은 아무리 짧아도 선분일 뿐 점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x와 y의 폭이 짧더라도 그건 선이지 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길이에 0에 가깝다는 것은 점 같은 선이 된다는 의미와 다름 아니다.
음냐, 이게 도대체 무슨 알쏭달쏭한 이야기인가? 선이란거냐 점이란거냐? 점 같은 선은 또 뭐야? 세상이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에서는 이런 말도 안되는 말이 나온다. 고딩 때 처음 미분의 개념을 접할 때 헤메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 하지만 뭐든 그렇듯이 알고나면 별 것 아니다.
사진을 보라. 이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가 정지하고 있는가?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들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사진에서는 정지되어 있지만 분명 움직이고 있다. 靜적으로 보이지만 사진에서 인물은 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진에서 정지되어 있는 인물의 속도는 얼마일까?
잉?. . . . . . 움직이지 않는 걸로 보이는데 속도가 얼마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점 같은 선이라는 것이나 정지한 것 같지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나 황당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진이 찍힌 저 순간 육상선수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분은 이러한 순간의 변화량을 다루기 위한 수학적인 논리체계이다.
그냥 서 있는 사람과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사진은 눈에 보이기에는 똑같지만 분명히 다른 성격을 가진 존재들이다. 눈에 보이기에는 정적이기는 하나 분명 속성이 다르다. 저 사진에서 선수와 허들은 땅을 향해 움직이고 있지만 옆의 허들은 정지해 있다. 정지한 듯 보이지만 넘어지고 있는 허들이 저 순간에 초당 몇 미터로 땅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저 상황을 모델링한 수식의 방정식을 풀며 되며 이런 상황에 대한 방정식은 미분 수식이 포함된 미분 방정식이 된다.
역동적인 물리량이 가진 순간적인 동적 성격을 사진 찍듯이 캡쳐하여 수식화 한 것이 y'이다. 그 순간의 역동성에 따라 다른 물리량이 함수 관계로 연결되어 결정된다면 그러한 미분 함수간의 관계를 이용하여 미지수를 구해 볼 수 있다. 공대생이 2학년 때 피터지게 배우는 공업수업은 대개 그런 미분 방정식을 다룬다.
이런 분야에서 다루는 대상은 연속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힘/질량/중력/자속/전류/전압/길이 등은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학창 시절 배웠던 대부분의 이론은 Analog적인 시각을 깔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 역시 Continous한 입장을 고수한다. 고대 영장류에서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은 Continuous하여야 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미씽링크를 찾아 온 지구를 헤멘다.
모든 것은 계측되고 계측 된 것은 이 세상이 연속적이라는 믿음하에 수학적으로 모델링 된다. 미분 방정식을 이용하여 여러 물리량과의 상관 관계가 규명되었고 인간은 태양과 지구, 그리고 별들의 움직임을 이전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예측하기 이른다. 모든 것이 수치적으로 정합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예측 가능하다고 큰 소리 치기에 이른다.
신의 영역이었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예측 가능한 미래, 즉 미래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믿었던 적이 한 때 있었다.
부분으로 전체를 취하다.
Analog는 세상이 연속되어 있다는 시각이다. 도대체 연속이란 무엇인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전혀 끊어짐이 없는 것이 연속이다.
수학에서는 점이 모인 것이 선이라고 한다. 점이 빈틈없이 끊임없이 모여야 선이 된다. 가장 엄정해야 할 수학의 가장 밑바닥 기본 정의는 이렇게 엉성하다. 점으로 선을 정의하고 선으로 점을 정의하다. 서로가 서로를 정의하는 것은 사실 정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튼 각설하고 빈틈이 없이 빽빽하려면 무한히 작은 것이 무한하게 모여야 한다. 1cm 선분이나 1km 선분이나 내부에 점이 무한히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미분은 이렇게 내부가 무한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함수가 미분 가능하기 위해서는 해당 함수는 반드시 연속 함수이여야 한다. Analog는 무한한 내부구조를 가지는 양을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대상은 부분과 전체의 구분이 없다. 부분이 전체고 전체가 부분이다.
0.00001초 뒤의 일을 알 수 있다면 그와 동시에 억만년 뒤의 일도 알 수 있다. 탁구공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다면 동일한 방법으로 지구의 움직임 역시 예측할 수 있다.
쌀 한가마의 무게를 정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온 세상의 쌀에 대한 무게는 확정된다.
1m를 정하는 순간 지구의 길이는 확정되며 우주의 길이도 확정된다.
1초를 정하는 순간 영겁의 시간 역시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확정된다.
측정할 수 있다면 이미 알려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예측 할 수 있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상어라면 공포의 대상이지만 20m의 백상어라고 하면 이미 정복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 크기에 맞는 작살과 배를 타고 나가 잡으면 그만이다. 상어의 크기를 모른다면 항공모함을 타고 나간다고 해도 공포에 질릴 것이다.
무엇이든 계측하여 수식화 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예상 가능한 존재가 된다. 부분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계측만 가능하다면 상대를 알게 된 것이며 대응책을 세울 수가 있으니 무섭지가 않다. 계측된 대상은 이미 정복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Analog적인 입장에서 장미빛 미래를 낙관했던 근대는 결국 예언에 실패하고 만다. 제국주의와 산업화의 과정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몰고 왔으며 또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두번의 세계 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예언은 가능하지 않다
어느날 양자 역학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고야 만다. 원자의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다던데 도대체 이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측정 할 수가 없단다. 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불가능 하단다.
세상에나...어머나...어머나...포탄의 궤적도 측정하고 예측하는데 판에 그깟 열라 작은 전자의 궤도는 예측은 커녕 계측조차 불가능하다니.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였던 Analog 관점에서 전자의 움직임을 계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두가 계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모든 비밀을 다 알아 내어 예언이 가능할 것이라고 봤는데 그 조그마한 전자, 그까짓 작은 것조차 계측을 할 수 없다니? 모든 것이 우루루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충격이였을 것이다.
역시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펑펑 터진다. 1차 세계 대전 펑, 대공황 펑, 2차 세계 대전 펑, 인종청소, 대량 살상, 장미빛 미래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끔찍한 일만 난무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문제지? 뭐가 잘못 되었나? 근대과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무너져 내렸다. Analog적인 세계관도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엄청난 권위를 가진 예언자가 하는 말이 모두 뻥이였다면? 뭔 말을 해도 먹히지가 않는다. 각자 플레이가 벌어지고 혼란에 빠진다.
Digital 시대
계측하면 예상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계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산산조각 나 버렸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믿음은 아날로그적이다. 부분적인 시간을 전체 시간으로 확장하는 것은 내부가 무한하다는 관점에 의거하여 부분으로 전체를 얻는 아날로그적 시각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부분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부분은 그저 부분일 뿐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다.
부분은 부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모든 것은 특정한 순간, 특정한 공간에서만 유효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변덕스러워졌다. 악보를 보면 무슨 음악이 나올지 예측 가능했던 기존의 음악 방식은 퇴조하고 연주 중 어디로 튈지 모르는 즉흥성이 강조된 음악이 득세한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결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모든 것이 변덕스러워지는 시대의 커다란 흐름의 일부일 수도 있다.
세상은 연속적이라는 Analog적 시각은 세상이 불연속적이라는 Digital적 시각으로 대체되기 이른다. 예전의 아날로그적 매체는 디지탈적 매체에게 자리를 내 주게 된다. 세상은 점점 더 즉흥적이고 즉각적이 되었다. 바로 이 순간 이 장소에서만 이 세상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것이 더 좋은 것으로 바뀌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탈 사진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아날로그 사진이 더 좋아져서 디지탈 사진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아예 다른 존재인 것이다.
Digital 회로 덩어리인 컴퓨터가 주도적인 Media로 떠오르면서 Digital적 성격은 점점 더 강해진다. 예전보다 사람들이 끈기도 없고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이 Event Driven 화 되어 가고 Case by case로 해석되어 나간다. 장기적인 계획으로 차분히 진행되는 것들은 많이 줄어들고 e-mail로 날아들어온 내용을 하루 하루 처리해 나가기 바쁜 세상이 되었다.
엔키의 시대
수메르 신화에는 엔릴과 엔키라는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신들이 등장한다.
엔릴은 바람의 신이다. 바람, 입에서 나오는 바람, 즉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주워 담지 못하는 신이며 엄격하고 남성적인 신이다. 엔릴이 까라고 하면 무조건 까야 했던 거다. 엔릴은 시간과 상황에 관계없는 절대성의 상징이다. 아날로그적 관점은 엔릴의 성격과 맞닿아 있다. 부분에서 전체를 구하고 절대성을 취한다.
남성적이고 엄격한 엔릴에 비하면 엔키는 여성스럽다. 인간을 창조한 장본인으로 등장하며 그의 지적 능력은 그 어떤 신보다 우수하다. 애초에 지구를 개척하여 신들을 끌어 들인 것도 엔키였다. 엔키는 지적 능력이 발달한 탓인지 엔키는 사기와 협잡에도 능했고 남을 설득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리고 디지털 관점은 엔키와도 맞닿아 있다.
지금은 엔릴이 지고 엔키가 세상을 지배해 가는 시대다. 엔릴의 시대가 비교적 간단하고 정직한 규모의 경제였다면 엔키의 시대는 복잡하고 예상하기 어려운 지식 경제가 필요한 때가 된다. 지식이 중시되면서 사기와 협잡 역시 판을 칠 것이다. 오션스 11 같은 영화가 히트 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도 이러한 점이 있지 않았을까?
디지털은 엔키의 속성을 가졌다. 또한 여성적인 속성을 가졌다. 아날로그적이냐 디지털적이냐의 차이는 대략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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