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몇 일만에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문서를 혼자 작성하고 있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컴퓨터가 없이 예전 방식대로 종이와 필기 도구를 이용해 문서를 작성하는 시대라면 이런 작업은 꿈도 꾸지 못할테니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였을 것이고 그래서 일감이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문서를 쓴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지금이야 컴퓨터를 이용해서 갈겨 내려 써도 삭제와 복사를 통해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니 수백 페이지의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한번 쓰면 지울 수 없는 환경이라면 글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겠는가? 중세에 종이가 아닌 양피지와 같은 귀한 재료를 쓴다면 글자 하나 하나 쓰는 것이 후덜덜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관공서의 문서가 엄격하게 정해진 규격에 맞추어 작성되었던 것은 이런 면에서 이해가 갈 듯 하다. 어느 위치에 무슨 내용의 글자가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 도장의 위치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다 정해 놓고 있기에 문서의 자유도는 엄격하게 제한되고 문서의 양식 그 자체가 사실상 대부분의 내용을 결정하게 되니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방식이였을 것이다. 단 그것이 오랜 훈련을 쌓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란 점이 문제가 될 터이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 물론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것이지만 어쨌든 컴퓨터로 분석을 해도 버거울 정도로 글들은 시시각각 넘쳐 흐를 정도로 생산된다.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도가 높아졌다는 것과 많이 이들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사진도 전문가들의 영역이였으나 점차 너도 나도 사진사 행세를 하는 시절이 되어 버렸다. 날씨 좋은 날 경치 좋은 곳을 가면 출사 나온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은칠을 한 비싼 필름을 더 이상 소모하지 않아도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의 문서 편집 기능은 맥락이 같다.

 

디지털 기술은 많은 것을 쉽게 만들어 버렸고 그래서 진입 장벽을 낮추어 전문가의 영역을 점차 허물어 왔다. 앞으로도 많은 영역들이 허물어질 것이며 형식을 엄격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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