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우 전문 식당을 찾아가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우리 가족 옆 자리에서도 어떤 청년이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고생하고 있을 것이 뻔한 아들이 마련한 좋은 자리에 부모님들은 흐믓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느끼는 눈치였고 아들은 아들대로 뿌듯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부모님들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들은 다소 긴장한 듯 했고 긴장하게 되면 오바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들은 자신의 오바에 머쓱해져서 이를 만회하고 부모님을 안심시키고자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오버를 다음과 같이 한다.
아들 : "배가 고파서 예민해져서 그래"
엄마 : ". . . 어이구 어쩌니 . . . 짐승들이나 그러는건데"
어머님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내가 뒷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들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웃고자 던진 말이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머님은 아들 걱정에 이를 다큐로 받아 들이고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배 고프면 예민해진다 것의 시작은 유머 코드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지불식 간에 나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어머님의 걱정 어린 대답을 들으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배 고프다고 예민해지면서 짜증 내는 것은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랬는지 나라는 인간은 최소한 동물들과는 뭔가 격이 다른 존재라는 생각에 별 다른 의심이 들지는 않았다. 아주 먼 옛날의 짐승에 가까웠던 원시인들보다는 내가 훨씬 진보한 존재이며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 시대의 과거로 날아 갈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제압하고 뭔가 근사한 존재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란 상상도 어릴 때에는 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가고 경험이 쌓이면서 나라는 인간, 아니 남들도 포함해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그렇게 우월한 존재인지 점점 회의가 쌓여갔다. 내가 동물학자도 아니라서 동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TV를 통해 접하는 각종 다큐멘터리에서 보이는 침팬치나 돌고래의 행동 양태를 보면 인간들이 저 동물들과 대체 얼마나 다를 것인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직장이나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생존의 갈림길에 들어서는 때가 있고 그렇게 막다른 길에 몰리면 인간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동물과 다름 없는 선택을 하더라.
과학기술의 진보로 이룩된 근대 문명을 옹호하는 (서구 기존의) 우파 진영에서는 기대 수명의 증가나 1인당 에너지 소비량 등을 거론하며 현대 문명이 과거 중세나 고대 시절보다 훨씬 위대하고 진보된 것이라는 시스템 옹호적인 주장들을 계속 반복하지만 막상 현실의 삶이 힘들게 느껴지는 지점에서는 그런 주장들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래봐야 네가 동물과 다를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우파 진영의 체제 찬양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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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이 주변 자연의 물리적 한계에 종속되어 있다면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 주변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 주변 환경과 관계없는 독립적인 정체성이 힘을 얻게 된다.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 주는 기계 문명이 없었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한때 반짝했을지언정 결국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맘대로 할 있다면 그것은 하찮은 것이 된다. 인간이 목을 매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은 항상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유행가에서 사랑이 빠지지 않는 것은 사랑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기후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기후 문제는 하찮은 것이 된다. 고대 부족에게 토템은 십중팔구 중요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았다면 호랑이에게 많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나무가 토템이라면 나무의 생산력에 목숨이 달린 생활 환경이었을 것이다. 토템은 부족원들의 생사를 일방적으로 결정짓는 중요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고대나 중세에도 국가 단위의 사회 체계가 있었지만 실제 개인의 일상 생활은 부족 단위의 생활이었다. 역사를 배울 때 원시공동사회에서 부족국가로 다시 부족국가에서 중앙집권적인 왕정국가로 발전 단계가 있다고 하지만 각 개개인의 일상의 삶은 여전히 자신이 속한 부족에 종속되었다. 일상의 삶이 주변 환경에 따라 제약 받는다면 이럴 수 밖에 없다. 수만년 동안 인간의 삶이 그러했기에 수십명 내외의 부족의 정체성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앙집권으로 부족의 토템이 종교로 대체되면서 개인의 정체성에 국가가 들어 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인 생활에서는 여전히 부족은 많은 것을 차지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거의 모든 경우 가까운 부락은 사이 좋은 이웃이 아니라 적군이었을 것이다. 투석전은 소속 부족에서 영웅이 되고자 하는 본성에 잘 맞는 행위였다.
근대 기계 문명으로 인해 일상의 삶이 자연의 제약에서 물리적으로 해방되자 진정한 부족의 해체가 가능해졌다. 자연적인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공간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면서 대규모 도시가 형성되었고 질소 비료를 인위적으로 합성해 내면서 식량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며 자연의 허용치를 넘어서는 인구 증가를 이룩해 낼 수 있었다. 사회적인 효용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나이를 훌쩍 넘어 수명이 증가하게 되었고 심지어 요즘은 영생을 목표로 삼게 될 지경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자연적인 지역적 한계에 기반을 두는 부족은 존재 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부족 단위의 소규모 집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데 현대 문명 사회에서는 소속될 부족이 아예 해체되어 없어진 상태다. 인간은 없어진 부족을 대체할 소규모 집단을 끊임없이 찾아 헤멘다.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새로운 부족에 소속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파벌을 만들고 라인을 세우는 것도 소속 부족을 찾아가는 것이다. 학파, 폭력 조직, 골프 모임 등도 부족이다. 각종 동호회는 부족의 대체재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개인", "자유" 등의 개념은 기계 문명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시 하게 여기는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자유"라는 것이 사실은 타고난 본능과 전혀 맞지 않는다. 현대 시대에서 진정한 문제의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현대의 우리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기계 문명의 소산들이 타고난 본능의 방향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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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나 중세 시절에는 인간의 본성을 눌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누른 것은 맞지만 부족 지향의 타고난 본성을 누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침팬치 집단을 보면 두목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집단원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누른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집단의 서열에 따라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며 번식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침팬치 집단이 침팬치 각 개체의 욕망을 누르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침팬치의 타고난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건가?
개체가 각 개체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본성이라면 침팬치는 집단을 해체하고 각 개체가 독립적인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들은 개별적인 욕망보다는 집단의 규칙을 지키며 집단에 소속되어 집단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에 대한 당위를 더욱 우선시 한다. 단독 생활을 하는 호랑이는 해당 종이 멸종하여 마지막 한마리가 살아 남는다고 해도 번식기를 제외하면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류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여 지구상에 살아 남은 마지막 인간이라면 살아가는데 의미를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자유"의 가치는 같이 살아가는 토대를 공유하는 타인이 존재할 때에만 유효한 것이다. 인간을 별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부자를 대접해 주는 타인이 존재할 때에만 유효한 것이다. 노벨상의 존재를 아무도 쳐주지 않는다면 누가 노벨상을 받고 싶어 하겠는가? 섹스에 대한 욕망도 근대에 와서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들이 쫓는 대부분의 욕망은 남들에게 대접받고 싶어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인 경우가 많다. 계급 사회는 의외로 이러한 사회적인 욕구를 잘 채워준다. 최하위 서열을 제외한 나머지 서열들은 최소한 자신이 큰 소리 칠 수 있는 하위 계층을 거느리고 있으며 자신의 운명을 상위 서열에게 위임한 채 나름대로 걱정없이 살아간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운영했을 때 상당부분의 노예들은 차별을 받고 살았지만 그 차별 덕에 흑인들은 백인들의 간섭 없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살아갔다. 노예 해방으로 곤란해진 것은 백인 주인들이었지만 생계 수단(?)을 잃은 흑인들도 곤란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계급 사회에서는 1차 집단인 가족에서도 서열이 생긴다. 가부장의 권위가 생기고, 형은 동생들에게 형님으로의 권위가 생기며 시어머지는 며느리에게 권위가 생기고 큰 동서는 작은 동서에게 권위가 생긴다. 심지어 서열의 가장 마지막인 막내에게는 귀여움을 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계급 사회에서는 계급의 갯수만큼 타인에게 대접받는 권력이 생긴다. 군대에서 하루 아침 사이에 계급과 서열을 없애버리고 모두가 일률적으로 평등한 구성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최소한 최말단의 이등병은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할 행동의 기준이 되는 서열이 없어지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불안해지고 그 집단은 붕괴한다.
일본 식민시 시절 때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차별 받았다. 하지만 1등 일본인, 2등 조선인, 3등이 중국인, 4등 동남아시아인으로 차별 받는 구조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래도 차별은 부당하다며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2등 취급이면 나쁘지 않다며 받아 들일 것인가? 더욱이 2등 조선인이 노력해서 1등 일본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내 개인의 노력으로는 이런 차별 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도저히 가망 없다고 느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러한 이유로 나는 친일파들이 대부분 노력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악독하다는 평을 반대로 해석하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며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 했다는 뜻이다.
2차세계 대전의 일본 패망으로 갑자기 명목으로는 다들 갑자기 평등해 진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군대 내부반에서 갑자기 계급이 없어진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혼란이 일어났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날뛰었다. 그리고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뒤집어진 것이다. 그나마 유교적인 전통이라도 없었다면 더더욱 폭주하여 회생 불가의 상태까지 치달았을 것이다.
중세 사회에서 욕망을 억압 당한 사람들은 불행하게 살아갔을까? 글쎄다. 내 짐작에는 자신이 소속된 부족 수준의 나와바리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나름 잘 살아갔을 것이다. 100년 뒤의 기대 수명이 300년이고 생활 수준이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다고 해서 지금 당장의 기대 수명과 생활 수준을 비관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옛날 사람들도 낮은 기대 수명과 열악한 생활 수준에 고생하며 살았겠지만 남들도 그러하다면 그런 것이 문제 되지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굳이 캠핑을 가서 열악한 생활을 하는 것을 돈 쓰면서 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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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근거한 현대 문명과 침팬치 수준의 부족 지향적 인간 본성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미국에서 폭탄 테러를 자행하며 기계 문명의 파괴를 외쳤던 시어도어 카진스키, 일명 유나바머의 "기술사회의 미래"라는 신문 기고문을 읽어 보면 그는 인간의 이러한 욕구를 "Power Process"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탄복할 수준으로 정확하게 집어 냈다. 그의 기고문에서 현재 상태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한 부분은 너무나도 쉽고 설득력 높게 씌어져 있어서 가히 새로운 고전 수준으로 취급되어도 될 정도다. 다만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멋지게 문제 재기를 해 놓고도 그에 대한 해결책이 너무나도 중딩스러운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과 인간의 본성이 서로 맞지 않으니 기술 문명을 파괴하자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해결책으로 해양경찰을 해체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아예 바다를 없애자는 문제 해결 방식이다.
백신의 접종을 거부하고 지구는 평평하다고 외치는 사람이 21세기 미국에 의외로 많다고 한다. 소위 반지성주의라 불리는 흐름이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도 반지성주의의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인들이 멍청해서 그렇다고들 치부하지만 과연 그들이 멍청해서 그런 것일까? 태생적으로 타고난 그릇이 침팬치 수준의 부족 지향이라면 똑똑하고 멍청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카진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월반을 거듭하여 하버드 수학과를 일찍 졸업하고 20대에 미시건 대학에서 수학교수를 했을만큼 똑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확하게 찾아낸 인간의 욕구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바보 천치 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고 똑똑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방송에서 강형욱의 방송을 보고 있으면 문제견들은 그저 자신의 타고난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강형욱의 문제해결 방식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개를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개의 주변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을 교육하는 내용이 된다. 개는 개일 뿐이고 말귀를 못알아 듣는 개한테 백날 말해봐야 개는 안 바뀐다. 말귀 알아 듣는 사람을 바꾸어서 주변 환경을 바꾸고 그것으로 개의 행동을 교정한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도 알고보면 개와 그다지 다를 바는 없다. 왠만해서는 남의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특히 미국사람들은 남의 말 안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 같다. 문명이 퇴행하는 것은 인간과 타고난 본성과 문명이 맞지 않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작은 그룹에서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고위 공직자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관직을 특수 관계인에게 부여하는 것은 전형적인 부족 지향의 욕구다. 브라더와 브라더의 결합이라는 가족에 준하는 유대감으로 갱단을 조직하고 그 안에서 튀어 보겠다고 극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도 이하 동문 같은 욕구다. 패거리 문화는 우리 한국인의 고유한 문제점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잠재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본성이다.
문명과 인간 본성과의 불일치에 대한 문제는 이미 기원전부터 제기된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공자는 간단히 "극기복례"라고 대답했다. 문명과 본성의 갈등에 대해 공자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다른 짐승들과 비교해서 뛰어난 점은 투석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체온 조절을 통한 장거리 달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뛰어난 진짜 차별점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으로 살겠다면 부처님이 되고 마귀로 살겠다면 마귀로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타고난 본성을 거슬러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은 그야말로 위대한 능력이다.
타고난 소규모 부족 지향 본성을 거슬러서 인류 전체를 부족으로 삼아 인류의 대표자로 살 수도 있고 골방 구석에 쳐박혀 주어진 방구석에서 제왕으로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또한 그렇게 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전자는 본성에 반하는 어려운 길이고 후자는 본성에 맞는 쉬운 길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폼나고 가오가 사는 길인지는 자명하다. 노자나 장자를 읽어보면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있느냐고 그들은 반문한다. 폼나는 길에는 댓가가 있다는 것이 노장 사상의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잘 나가다가도 자꾸 퇴행하는 것은 임계 상황이 닥쳤을 때 부족주의 본능에 따르는 쉬운 길을 가기 때문이다. 개인 차원에서 노장 사상은 시원한 자유를 제공하지만 문명의 입장에서 노장 사상은 신중하게 재 검토 되어야 할 대상이다.
냉전 시절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경쟁자가 있던 시기에 미국은 긴장하고 있었다. 냉정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우리처럼 유교적인 자산이 없는 미국은 긴장이 풀리면서 본성을 따르는 멍청해 보이는 인간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건 멍청한 소리다. 배고파서 예민하다는 불평에 그건 짐승의 길이라고 일침을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 일침에 정신이 번쩍 드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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