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ma

2022. 5. 18. 18:46

학창 시절에는 물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물리를 근간으로 하는 이공 계열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리 저리 주워들어 익숙해진 풍월은 늘었지만 여전히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 물리였다. 꼭 필요한 부분만 간신히 외우는 수준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skill들은 물리를 그리 잘 몰라도 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 분야인 것이 우연은 아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예전에 배웠던 물리와 관련한 풍월들을 곱씹어 보니 이게 참 재미있는 것이구나 싶다. 풍월만 알고 있었던 내용들을 자료 찾아보며 검토해 보고 다시 내 자신의 언어로 다시 조합하고 그걸 물리 공식에 맞춰보니 공식을 처음 만들어낸 이들의 심정을 내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고 물리를 좋아한다는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야 조금은 수긍할 수 있을 듯 하다.

유명세로 따지면 원자폭탄의 원리를 의미하는 E=mc^2 이 원톱이겠지만, 중요도로 따질 때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은 단연 F=ma 이다. 힘은 “질량 곱하기 가속도” 라는 뜻의 극히 간단한 수식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함의는 깊다. 공식이라 써 놓았지만 곱씹어 생각해 보니 F=ma는 사실은 공식이 아니라 선언적인 명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하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곱씹었던 생각들을 여기에 써 놓을까 한다.

 

사실 이 카테고리에 첫번째로 올려 놓으려고 작성했던 글이었는데, 하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점들을 해결하느라 완결이 늦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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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는 Force의 약자이며 "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 흔히들 알고 있는 "힘"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이 수식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F란 것은 질량을 가진 물체의 운동 변화에 대한 크기를 의미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뉴턴을 비롯한 그 누구도 힘 그 자체를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힘이라는 놈을 직접 관찰하고 이것이 질량을 가진 물체에 작용하여 속도 변화를 초래한 것을 측정한 후 F=ma 라는 수식을 도출해 낸 것이 아니다. 관찰 가능한 것은 그저 질량과 속도의 변화 두가지 뿐이다.

"A=B"라는 수식은 A와 B가 단어만 다를 뿐 똑같다는 의미이다. 즉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뉴턴의 F=ma도 그런 동어반복이다. F=ma라는 수식을 두고 흔히들 힘이 작용하면 질량을 가진 물체에 운동 변화가 발생한다는 원인-결과의 문장으로 풀이하지만 애초에 F라는 것은 없었던 개념이었으니 건조하게 수식 그 자체를 보자면 물체의 운동 변화를 F라고 하자는 선언에 불과하다.

 

다만 뉴튼의 선언이 특별한 점은 질량(m)과 가속도(a)는 계측이 가능하며 수로 표현할 수 있으니 그 둘을 곱한 F도 당연히 숫자라는 것 뿐이다. 즉 F=ma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법칙도 아니다. 그저 질량을 가진 물체의 운동 변화의 크기를 숫자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뉴튼이 제안한 것에 불과하다. 질량이 있는 물체의 운동 변화의 크기를 숫자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뉴튼 이전에는 그런 제안이 없었다.

 

뉴튼 이전 사람들은 물체의 운동에 변화가 발생한 원인 그 자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바람이 불고 뒤이어 바람개비가 움직이는 광경을 목격하면 다들 "바람이 바람개비를 돌렸다"라고 말했다. 내가 힘을 줘서 손으로 바람잡이를 잡고 돌리면 "내가 바람개비를 돌렸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뉴튼의 F=ma는 무엇이 바람개비를 돌렸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다. 그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바람개비의 질량과 바람개비의 가속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F=ma라는 선언에서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운동 변화량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무엇이 운동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뉴튼은 F를 일으킨 장본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기본전제를 깔고 수식을 제안한 것이다. 흡사 더러운 일을 해서 번 돈이든 고귀한 일을 해서 번 돈이든 돈은 돈 액수 그 자체로만 평가하겠다는 자본주의적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기본 전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뉴턴의 기본전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바람개비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어떤 놈이 바람개비를 돌렸는지 알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알 수가 없다면 귀신이 나타났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물체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면 바람이 불었거나 물길에 휩쓸렸거나 누가 밀었거나 아무튼 뭔가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건 바람이 한 것이고 물이 한 것이고 누군가 한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를 목격하면 변화 그 자체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어떤 놈이 그랬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뉴턴이 F=ma라고 선언했음에도 여전히 "힘"이란 놈이 운동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다들 자기 멋대로 의역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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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화분을 들어 옮기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홀연히 화분을 들어 옮기신 후 사라졌다고 치자. 내가 화분을 옮기는 것이나 예수님이 화분을 옮기는 것이나 운동의 입장에서는 똑같다는 것이 F=ma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리가 없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은 화분은 성물이 될 것이고 예수님이 했던 작업은 내가 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휠씬 더 고귀하고 인간이 짐작도 할 수 없는 의도가 담긴 것이 되어야 한다.

 

옛날 사람들은 힘이라는 것이 어떤 것에 깃든 것이고 힘은 그 힘을 발휘한 주체의 속성을 유지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힘을 쓴 것은 예수님의 속성을 가지게 되고 불가축천민이 힘을 쓴 것은 불가축천민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힘을 발휘한 주체에 따라 힘의 종류가 달라지게 된다. 바람의 힘은 바람의 속성을 가지게 되고 불의 힘은 불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는 식이다. 그 힘들은 서로 상호 교환 및 등가로 취급될 수 없다. 미개한 옛날 사람들이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힘이란 것이 어떤 주체에 깃든 것이고 주체에 따라 힘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여기면 주체의 개수만큼 힘의 종류도 많아져야 한다. 바람의 힘이라 해도 서풍의 힘은 제퓌로스라는 신의 속성상 아름답고 좋은 힘이고  북풍은 보레아스라는 신의 속성상 차갑고 매서운 힘이라는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온갖 종류의 신들이 다 튀어 나와야 한다. Case-By-Case의 연속이며 끝이 없다. 물체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힘을 발휘한 주체에 따라 힘에 대해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전히 이런 사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다. 환경 운동을 하시는 어떤 분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 에너지에는 방사능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풍의 신 제퓌로스를 믿었던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에 혹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21세기에도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하듯이 말이다. (지구가 편평하다면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다시 찾아야 한다. 지구가 편평하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만유인력이 틀렸음을 증명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물체의 운동이 변화한다"라는 식의 "A이면 B이다" 라는 문장 구조를 선호하지 않는다. 나 자신과 내가 경험했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A이면 B이다"가 아니라 "A가 B를 한다"라는 표현을 훨씬 선호한다. 바람이 물체의 운동을 변화시킨 것이고 물살이 물체의 운동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서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으로 진술한다. 뉴튼 이전의 옛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런 식이다. 악마가 전쟁을 일으키고 신이 홍수를 내린다. 초월적인 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 시킨다는 것이다. 요정이나 귀신 따위들이 그런 주체들이다. (지금도 이런 사고 방식에 의지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고 많다)

"A가 B를 한다"는 문장 구조는 어린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칠 때 써 먹는 방식이지만 대중에게도 잘 먹히는 인기 있는 방식이다. 영화 스타워즈에서도 "Force 이면 물체의 운동 변화"라는 "원인-결과"의 문장을  "주체-대상" 문장으로 바꿔서 "Force가 변화를 일으킨다"고 사용했다. 음모론도 "A가 B를 한다"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이런 걸 보면 절대 다수의 인간은 좋은 말로는 어린이의 순수함을 가진 듯 하며, 나쁜 말로는 멍청함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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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잡설

 

멍청함의 유혹이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긴 했으나 사람들이 "주체-대상"의 문장을 선호하는 것도 나름 이유는 있어 보인다. 현실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은 그 변화를 일으킨 주체의 의도가 훨씬 중요하다. 그 의도에 맞춰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변화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쳤다면 첫번째 반응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주변을 살펴서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맥락을 알아야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는 건 그 다음 순위가 된다.

 

내 머리를 친 것이 호랑이라면 아프다고 머리를 싸잡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이 우선이다. 내 머리를 친 것이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면 나를 해할 의도는 없으므로 그 다음 우선순위인 머리를 감싸고 누워도 된다. 내 머리를 얼마나 세게 툭 쳤냐는 우선적인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생존의 측면에서 보면 주체의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우리가 "주체-대상"의 문장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생존 경쟁을 거쳐온 본능에 연유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본능에 연유한 것들을 이겨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주체-대상"으로 서술하는 것을 쉽게 받아 들인다. 주술은 이런 태도로 세상을 설명한다.  다들 주술은 엉터리라고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현실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본능적인 태도를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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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a는 "주체-대상"으로 기술된 문장이 아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원인-결과"로 기술된 것도 아니다. 그냥 운동변화 논할 때 이를 관측할 수 있는 숫자로 추상화 하자는 선언이다. 사실 현실에서 힘이란 것은 힘이 깃든 주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이 어떻든 상관 없이 추상화를 통해 주체를 배제하고 숫자를 통해 힘 그 자체의 크기만을 다뤄보자는 것이 F=ma 이다. 이 선언을 받아 들여야 운동변화에 대해서 수치의 정합성을 따지는 사고를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F=ma는 운동에 대한 "원인-결과" 를 수치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된다.

F=ma에서 "F"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건 그저 "ma"라는 운동변화의 크기를 지칭하기 위한 단어에 불과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ma"다. m(질량)은 숫자로 관측 가능하고 a(가속도)도 숫자로 관측 가능하다. 즉 눈으로 볼 수도 있지만 수치로 계량 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질량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가속도는 시간당 속도 변화이고 속도는 시간당 이동거리인데 우리는 역시 시간이 무엇이고 거리가 무엇인지도 사실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모르기는 하지만 기준을 정하면 그 기준의 상대적인 비율로 수치화 하여 대상을 계량할 수는 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질량과 가속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기준에 대한 상대적인 비율로 질량과 가속도를 수치화 할 수 있다.

수치화를 한다는 것은 물리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의외로 물리학은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물리학자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수치화 할 수 있는 것만 취급하며 그 수치들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리처드 파인만에 따르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한다. 그냥 닥치고 계산해서 계측된 수치들 간의 상관관계를 맞추기만 그것으로 만족한다. 물리학이 재미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이것 때문이다. 뭔지도 모르면서 수치만 때려 맞추려 하니 공허하고 재미가 없다.

 

하지만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해 봐야 대상이 무슨 변화를 일으킬지 예상할 수 없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리학은 질량/시간/공간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수치로 해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대응에 따라 대상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예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예언을 가능하게 해 준다. 대상에 대한 이해보다는 내가 이렇게 했을 때 대상이 어떻게 나올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이러면 대상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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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a는 물리학 체계의 시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F=ma는 그 자체로는 진위를 증명할 수 있는 명제는 아니다. 어떤 명제이든 진위 여부가 이미 알려진 다른 명제와 비교를 해 봐야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 F=ma의 참/거짓을 판별하려면 F를 서술하는 다른 명제가 있어야 하고 그 명제는 참이어야 한다. 그 둘을 비교하면 F=ma의 참/거짓을 논할 수 있다. 뉴턴 이 F=ma를 제시하기 이전에는 F에 대한 다른 명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뉴튼이 F=ma를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린 것은 아니다. F=ma라는 명제는 운동량의 정의(mv)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사실 뉴튼은 F=ma로 정의한 것이 아니라 F="운동량의 변화량"으로 정의 했다. 다만 운동량의 변화량을 극히 짧은 시간동안의 변화량으로 서술하려다 보니 미분개념을 사용했을 뿐이고 동일한 내용을 F=ma라는 더 이상 간단할 수 없는 선형 수식으로 언급하는 것을 사람들이 선호할 뿐이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니 F=ma 라는 명제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고 싶으면(하나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짓이지만) 운동량의 정의(mv)에 대한 진위를 판단해야 한다. 운동량은 뉴튼의 앞 세대인 데카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작 (방법서설 비슷한 책)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놓고 여기에 연역하여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참"이라 판정한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역적 전개를 통해 운동량은 mv이며 이 세상의 운동량의 총합은 일정하다는 운동량 보존의 법칙까지 진도를 나간다. (데카르트의 저작은 읽다가 포기했음)

물리학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F=ma라는 명제가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에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부터 따지고 들면 물리수업이 아니라 철학 수업이 되며 정치/문화/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므로 물리수업 시간에는 F=ma를 그냥 주입식으로 학생들 머리에 우겨 넣는다. 사실 F=ma라는 간단한 수식을 납득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 여부를 따진다는 건 딱 봐도 배보다 배꼽이 큰 일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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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저작을 끝까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운동량을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정의한 것에 대해 동의할 수는 있다.

 

운동의 크기를 숫자로 표현하자는 아이디어는 지금 생각해 봐도 매우 참신하다. 운동의 크기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운동이 부피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면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F와 마찬가지로 운동 역시 사물에 깃들어 있는 것인데 그걸 무슨 수로 크기를 잴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데카르트는 어떻게 하든 운동의 크기를 숫자로 표현해 보려고 머리를 써 본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간단하게 정의가 된다.

 

우선 운동이란 것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운동이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조차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의 크기가 0이 되기 위한 조건은 직관적으로 볼 때 명확하다. 움직이지 않거나 질량이 없다면 0이다. 즉 속도가 Zero 이거나 또는 질량이 Zero라면 운동의 크기는 0이다. 이것 역시 다들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속도가 커질수록 또는 질량이 커질수록 운동의 크기는 커져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수식으로 써 놓은 것이 P=mv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 이다.

 

운동량이라는 정의에는 물리학에서 관심을 가지는 근원적 대상인 질량과 속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직관적으로 봐도 더 이상 딴지를 걸어보기 힘들 정도로 명쾌한 선형수식으로 정의되어 있다. 내가 데카르트와 동시대를 살았다면 데카르트가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내 놓았을 때 열광했을 듯 하다. 운동의 크기를 숫자로 모델링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것일 줄이야.

 

운동량의 정의에 대해서 수긍했다면 F="운동량의 변화량" (F=ma)라는 것에 대해서 뭐라 딴지 걸 일 자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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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박사가 어느 강연에서 물리학자가 신을 운운하면 게임 끝난 것이라고 했는데, F=ma 라는 제안이 탄생한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신이 튀어 나온다는 것이 역설적인 상황이긴 하다.

 

물리라는 학문과 인간의 피상적인 직관은 정반대에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물리의 출발선은 모두가 합의 가능한 수준의 직관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직관에 바탕을 둔 F=ma를 바닥으로 두고 쌓아 올린 물리학이라는 체계가 위태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물리에서 관심 있는 것은 운동이라는 것만 받아 들인다면 F=ma에 기초한 물리학 체계가 무너질 일은 없다. 

 

물리학에서는 관찰 및 실험을 통해 참이라고 판정된 명제들 간의 인과 관계에 대한 수식적인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일이다. 그 수식을 구성할 때 F=ma라는 기본 합의에 따른 단위들을 이용하여 수식을 구성할 뿐이다. F=ma는 물리학의 관심대상을 함축한 것 뿐이므로 수식은 관심대상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다. 물리학에 오류가 생긴다면 그것은 F=ma가 틀려서가 아니라 관찰 및 실험의 해석에 오류가 있는 것 뿐이다.

 

PS : 학생 때 이런 사정들을 선생님이 알려 주었다 한들 물리가 재미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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