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2023. 8. 9. 21:12

내 기억에 처음 읽어 본 이문열의 작품은 고등학교 때 접했던 "사람의 아들"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이 이 정도로 존재했던 소설은 처음이었고 당시 집에 있던 문학전집을 통해 접했던 기존의 국내 소설과는 완전히 결이 달라서 재미있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단의 평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문열은 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최고로 잘 나가던 소설가였다. 그가 써낸 소설은 항상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상업적 성공이라는 면에서 이문열을 능가했던 소설가는 아직까지 못 봤으며 앞으로도 더욱 나오기 어려울 듯 하다.

 

"사람의 아들"의 결말은 다소 황당했지만 재미있게 읽긴 했고 상도 많이 받은 유명 작가라기에 내가 잘 모르는 심오한 뭔가가 있겠거니 했다. 이문열에게 의구심이 들었던 건 군 생활 당시 내부반에 있던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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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삼국지를 읽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80년대 시절 삼국지는 남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일종의 필수 교양이었다. 당시에는 한문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여 세로로 쓰인 판본이 유행이었는데 그걸 10번 넘게 읽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놓을 수가 없었다.

 

기존 삼국지를 10번 정도 읽은 상황에서 이문열의 삼국지를 접하니 스토리에 눈이 가지 않고 스토리를 풀어가는 작가의 방향성에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느낀 것은 답답함이었다. 기존 삼국지는 무협지를 읽는 듯한 호쾌함이 있는데 이문열의 삼국지는 답답한 고구마 그 자체였다. 결국 읽다가 완독하지 못하고 집어치웠다.

 

옛날 삼국지는 호쾌하다. 물론 10번 정도 읽어보면 유비에게 유교적 대의명분을 몰아주기 위한 장치들이 행간에서 느껴지긴 한다. 이문열은 자신의 통찰력을 자랑하듯이 특유의 만연체로 길게 길게 늘어 뜨리며 유비를 깎아 내리고 조조를 띄워 준다. 그것도 대놓고 그러지 않고 빙빙빙 열바퀴 정도 돌려서 말한다. 읽는 내내 그의 서술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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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망한 왕조가 무수히 많은데 한나라가 위나라에게 망한 것이 뭐 그리 큰 일인가 싶겠지만 이후 중국의 왕조는 배반과 찬탈로 얼룩지게 되고 조조는 그런 개판의 시작점이다. 조조 자신은 위나라의 왕이 되는 것으로 그쳤지만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 기반에서 그의 아들인 조비가 양위를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황제에 오른다.

 

한번 역성혁명이 났는데 두번은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찬탈로 일어난 위나라는 마찬가지로 진나라에게 멸망 당하며 그 과정에서 사마소가 당시 위나라 황제였던 조모를 대 놓고 시혜한다.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했지만 황제 시혜라는 선을 넘었으니 또 다른 역성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통일된 진나라(서진)에서 팔왕의 난이 일어났고 5호16국 이라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한족 왕조는 최초로 중원에서 쫓겨나 강남으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이후에도 문벌귀족과 지방토호들이 날뛰었고 지배계층이 현실도피적인 도교에 빠져 마약(오석산)에 미쳐 살았다.

 

사마염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원 지역의 생산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생산력은 인구수에 영향을 미치며 장기적으로는 군사력 우위로 나타난다. 중원을 차지한 탓에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중원을 빼았기면 이를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한족 왕조는 이후 천년 넘게 중원에 진출하지 못하고 막장을 경험한다. 

 

북송 시절에 100년 정도 잠시 중원을 차지하고 요/금나라와 균형을 이루기도 했지만 "정강의 변"으로 다시 강남으로 쫓겨 내려갔고 결국 원나라에게 완전히 멸망 당하고 명나라 때에 겨우 중원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천년만에 중원을 회복한 한족은 중원을 잃었던 시작점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점을 따라가면 조조가 나온다. 한족이 중원에서 쫓겨 난 사건의 시발점에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찬탈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만들었던 나관중이 명나라 초기 인물인 것이 이런 이유가 있다. 삼국지연의가 히트 친 것은 당시 한족들이 집단적으로 시발점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조조가 실력이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긴 호흡으로 보면 결국 조조가 한족 왕조를 완전히 망친 출발점이었음을 한족이 알게 된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유교적 대의명분을 선으로 할 수 밖에 없고 유비가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유비가 사기꾼이었든 아니었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의명분을 몰아주기 위해 유비의 실력을 깎아버린 면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악역이 된 것은 결국 한족의 집단적 자성 때문이었다. 여기에 호쾌함까지 더해 대중을 사로 잡았다. 천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런 배경이 있었음에도 이문열은 그걸 전혀 몰랐다. 그냥 조조도 나름 사정이 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변명거리만 구구절절하게 적어 놓았다. 조조 개인으로 보면 그럴 수 있겠지만 역사의 무게 앞에서 그런 개인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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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듯이 전두환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이문열이 잘나가던 1980년대의 정치지형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면 지금도 그럴만하다고 인정하고 있을 것인가? 이문열이 전두환 팔순 잔치에 괜히 찾아간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를 모른다. 지극히 좁은 개인적 시야에 머물러 있다.

 

이문열의 아버지가 월북 인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문열의 아버지는 일정치하 당시 일본 유학을 경험했던 인텔리 계층이었고 당시 글 좀 배웠다는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해방 후 좌익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미군의 인천상륙 후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아버지가 좌익 계열 인사였는데 아이러니하게 그 때문에 이문열은 우익인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  밥 먹듯 이사를 다녀야 했고 학교도 제대로 마칠 수 없어서 검증고시 거쳐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울대를 때려치고 사법시험에 도전했으나 결국 3번 낙방 후 포기했다고 한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을테니 더 이상 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후 어찌 어찌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가 되었으나 90년 이후 성공적인 작품을 내 놓지 못했고 김대중 정권 당시 홍위병 운운하는 발언으로 이슈를 끌며 언론에 정권 비판 컬럼을 제법 쓰기도 했으나 현실 정치판에서 큰 영향력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지금 찾아 보니 2004년 17대 총선에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하긴 했다. (내 기억에 17대 총선은 한나라당의 패배였다)

 

2009년 용인 외대에 석좌교수로 임용되었고 같은 해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보수 우파 색깔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사회적인 울림을 끌어내지는 못했고 보수 진영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얻은 것도 아니다. 이후 이러 저러한 자잘한 감투를 쓰긴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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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의 좌익 계열 거물인 백낙청은 이러한 면에서 이문열과 정반대 입장에 있다. 백낙청은 1938년 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일정시절 고등문관을 지냈으며 해방 후 미군정에서 경기도 재무부장 및 변호사로 활동한 전형적인 친일파 인텔리였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후 행방이 알려진 바 없다.

백낙청의 아버지가 고위 친일 공직자였기에 집안이 꽤 부유했던 모양이고 백낙청은 어학을 포함한 공부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던 듯 하다. 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이 최빈국으로 있을 때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브라운 대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한다.

 

당시로는 초일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심지어 그는 고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열린 세계 고교생 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1954년에 미국 방송에 출연했던 적도 있으며 1955년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한 고등학교 신분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만났고 UN에서 영여 연설도 수행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GxY-ePSwcI)

 

하버드 대학원 시절 서울대학교 교수로 25세에 채용되었고 이후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면서 2003년까지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서울대 교수 재직 초기에 "창작과 비평"이라는 문학지 (문예작품을 싣는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문학지와 동일한 이름의 출판사를 설립한다. 흔히 "창작과 비평"을 줄여 "창비"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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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은 현재까지도 문학지 외에 각종 인문서적을 출판하고 있으며 교과서도 출간하고 있다. 참고로 유흥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낸 곳이 '창비"이다. "창작과 비평"은 좌파 계열의 성향을 띄며 그 동안 문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시인 고은을 띄워 준 출판사도 "창비"라고 한다.

 

 "창작과 비평"이 문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분명 백낙청이 보유한 타이틀이 한 몫 했음이 분명하다. 50년대 고등학생 신분으로 미국을 들락거리며 미국 방송에 출연하고 하버드 대학을 나온 25세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를 당시 누가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전대미문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 수십년 동안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다보니 많은 문학계 인사가 사제 관계로 엮어 있는 모양이다. 백낙청은 문학계 외에도 진보정권에 막후 영향력을 꽤나 행사했지만 그의 위상이 워낙 높아 백낙청을 공개적으로 까는 보수인사들이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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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아버지를 둔 우익인사 이문열과 우익 아버지를 둔 좌익인사 백낙청을 보면서 아이러니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세상이라는 것이 정말 단순하지 않다. 이문열은 백낙청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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