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내 생각

조지프 스틸웰

ikipus 2025. 6. 26. 18:36

0. 들어가며

 

맥아더는 다들 알고 있어도 스틸웰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스틸웰은 미국 군인 중에서 동아시아의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며 지금까지도 그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겪었던 연유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스틸웰의 행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군 중에서 가장 무능한 장군으로 임팔 전투를 강행한 "무타구치 렌야"가 손꼽히는데 스틸웰도 무능한 면에서는 무타구치-렌야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자강두천이다.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은 스틸웰 때문에 애를 먹었으며 국공내전의 결말이 중국의 공산화로 끝난 배경에도 스틸웰이 있었다.

 

그는 1883년 플로리다 출생으로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텐진에서 10년을 미군으로 복무했다. 그 덕에 표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스틸웰은 중국어 능통자란 이유로 중국 쪽에 배치된다. 그러나 성과는 내지 못한 채 국민당 정예군을 버마 정글에 갈아 넣었고 이에 장개석은 발목이 잡힌다.

 

스틸웰의 무능은 장개석의 무능으로 둔갑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으로부터 무기 뿐만 아니라 자원 및 식량을 전폭적으로 지원 받았으나 중국의 장개석에게 그런 전폭적인 지원은 없었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공산군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버마의 스틸웰에게 삥을 뜯겨야 했다. 결과적으로 장개석의 국민당은 패배했고 미국은 모든 책임을 장개석의 무능으로 씌웠다.

 

장개석이 국공내전에서 패했던 원인 중에는 스틸웰이 있었다. 모택동은 스틸웰을 정말 고마운 은인으로 모셔야 할 터이다. 한국전쟁은 우리가 당사자이지만 그 전쟁의 근원 중 하나인 스틸웰에 대해서는 다들 입을 닫고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불을 지른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지만 터를 잡고 장작을 쌓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스틸웰이었다.

이승만은 시너가 되기를 자처했고 스탈린은 강풍기를 틀었으며 옆집 모택동은 맞불이랍시고 자기집 장작을 쏟아 부었다. 맥아더는 불 앞에서 폭탄 저글링을 했고 트루먼은 맥아더의 폭탄을 압수했다. 한편 일본은 동사 직전 불을 쬐고 살아났다.

 

스틸웰의 무능을 장개석이 모두 뒤집어 쓴 것은 당시 미국이 중국인을 얕잡아 보면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 초반의 현재 시점에서도 미국은 스틸웰의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듯 보인다. 아니 미국은 둘째치고 우리도 역시 그렇지 않은가?

 

스틸웰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살짝 알아 본 것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참고자료는 나무위키와 그 외 잡다한 검색 결과, 그리고 졸장 전설 13 - "식초 조, 중국을 망치다.. :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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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버마 침공

 

진주만 폭격 이전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은 이미 전쟁(중일전쟁) 상태에 있었다. 당시 중국은 영국령이었던 버마를 통해 연합국으로부터 보급을 받고 있었고 중일전쟁은 교착 상태에 있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은 진주만 폭격과 동남아 진군을 거의 동시에 전개하였고 1942년 1월 영국령 버마를 공격하게 된다. 이때 장개석은 영국의 버마 사수를 돕겠다고 나서는데 버마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영국은 장개석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1942년 3월 버마의 수도 랑군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영국군은 인도로 퇴각한다.

 

영국은 장개석의 도움을 거절했지만 스틸웰은 장개석으로부터 정예 중국군을 받아서 버마 원정에 나선다. 버마의 영국군은 당연히 스틸웰을 돕지 않았으며 스틸웰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장개석의 쑨리런이 지휘하는 38사단이 포위망을 뚫고 스틸웰을 구했으며 장개석이 버마 국경에 3개 사단을 증파하면서 일본군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못하게 된다.

 

일본은 버마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했으며 중국에 보급로 역할을 하던 버마로드(양곤-라시오-곤명)가 끊어지게 된다. 한편 스틸웰은 장개석의 정예 병력 10만을 날려 먹었고 쑨리런의 38 사단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올 수 있었지만 패배의 책임을 무능한 중국군에게 돌리면서 자리를 보전하게 된다.

 

당시 버마 군단 사령관이었고 이후 영국 육군 원수에 오르는 윌리엄 슬림(Viscount William Slim)은 향후 자서전을 통해 당시 중국군에 대해 "그들은 강인하고 용감하며 경험이 풍부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무런 도움 없이 수년 동안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 중에서 최고의 베테랑들이었다. 그 때까지 다른 어느 군대보다도 성공적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 고 평가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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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버마 접수 직후

 

1942년 일본의 버마 점령으로 버마로드가 끊기면서 연합국은 인도에서 항공기를 동원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에 대한 보급을 진행했고 동시에 새로운 육상 보급로를 개척해야 했다. 이에 일본은 1942년 버마를 접수한 직후부터 인도를 침공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인도침공계획은 버마 북부의 험준한 밀림지대를 뚫어야 하는 보급 문제 때문에 보류되었는데 이 때 침공계획을 반대한 인물이 "무타구치 렌야" 였다.

 

한편 스틸웰은 자신이 지휘하는 중국군을 인도에 묶어 두고 이들을 동원해 버마를 탈환할 생각에 눈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게다가 스틸웰은 장개석이 미국의 원조만 받아 먹고 실제로는 싸울 의지가 없다고 여겨 중국 본토로 보내야 할 보급품을 인도에 주둔한 자신의 중국군으로 보냈다. 이러니 장개석과 스틸웰은 사이가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장개석은 스틸웰에 대해 "이 자는 상식도, 인격도 없다. 우매하고 고집스러우면서 비열하기가 보기 드물 정도이다. 미국에 이런 장교가 있다니, 게다가 마셜이 이런 자를 일급 인재로 여기고 있으니 실로 괴이하다" 라고 하였으며 스틸웰은 루즈벨트 앞에서 "장개석은 약속을 절대 지키지 않는 우유부단하고 교활하면서, 신뢰할 수 없는 늙은 악당입니다"라며 서로를 디스했다.

장개석에 대한 스틸웰의 평가는 미군이 평가한 이승만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스틸웰은 영국군과도 마찰을 일으켰고 그는 만만한 장개석을 압박하여 중국군 지휘권을 확보하려 했다. 홧김에 한 말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틸웰은 자신의 부관에게 장제스 암살 계획을 입안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1943년 5월 트리이던트 회의에서 영국 수상인 처칠이 버마탈환을 분명히 반대했지만 이상하게도 스틸웰은 버마 탈환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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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강두천의 뻘짓 대결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인도 독립군과 연합하여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기로 한다. 침공의 교두보로 인도의 임팔을 선택했고 버마의 밀림을 뚫고 인도의 임팔을 점령하는 계획을 확정한다. 주동자는 1942년 당시 인도침공계획을 반대했던 "무타구치 렌야"였다. 그는 버마 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부임 후 입장을 바꿔 임팔작전을 주도했고 1944년 3월에 임팔작전을 실행한다.

 

한편 처칠이 버마탈환을 반대했음에도 스틸웰은 1943년 10월 자신의 중국군 2개 사단을 버마 북부에 진군 시킨다. 그는 4개월의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많은 피해를 봤고 일본군을 섬멸하지도 못한 채 일본군과 대치 상황에 놓인다. 당시 스틸웰은 일본군이 임팔작전으로 병력 이동한 덕을 봤다. 만약 일본군이 전력으로 대응했다면 스틸웰의 중국군은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스틸웰의 중국군이 버마 북부에 묶여 있을 때 1994년 3월 일본군은 임팔 방면으로 진격한다. 이 소식을 들은 스틸웰은 경악하여 중국 본토 원난성에 배치된 16개 사단의 20만 중국군을 버마로 진격시킬 것을 장개석에게 요청한다. 장개석은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으며 이에 스틸웰과 마찰을 일으킨다.

 

결국 스틸웰의 압력으로 미국의 루스벨트는 1944년 4월 3일  "당장 윈난의 군대가 살윈 강을 넘어서 버마로 진격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미국의 원조는 정당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장제스에게 날리고 이에 장제스는 굴복하고 지휘관을 "웨이리황"으로 삼아 원난의 중국군을 버마에 투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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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얻어 맞는 장개석

 

아니나 다를까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은 총공세를 폈고 교착 상태가 깨지면서 허난성이 무너진다. 다급해진 장개석은 버마에 투입된 13개 사단을 다시 중국 본토에 투입하려고 했지만 당시 버마에 투입된 중국군은 임팔전투의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버마의 험준한 밀림지대에서 병참선이 한계에 달한 채 일본군 56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스틸웰은 이들을 중국 본토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스틸웰은 인도에 쌓여 있던 보급품을 자신이 지휘하는 중국군에만 보급하고 중국 본토에는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으며 원난에서 투입된 웨이리황의 13개 사단의 중국군에게도 전달하지 않았다. 또한 보안 준수를 이유로 중요한 회의에 웨리이황을 끼워 주지도 않는다.

 

당시 중국 본토의 일본군도 사력을 다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원난성의 중국군이 복귀했다면 전세는 일거에 뒤집어 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냥 당시 미군의 공군 전력(14항공대)마저도 태반이 버마를 지원했기에 일본군은 중국 본토의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장제스는 10만 병력을 겨우 쥐어 짜냈지만 역부족이었고 허난성에 이어 형양과 구이린을 넘기면서 일본군은 중국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할 수 있었다.

 

스틸웰은 중국 본토의 문제를 모두 장개석의 무능으로 돌리면서 오히려 비난했고 차라리 연안의 공산주의자들이 더 믿음직하다며 여차하면 장제스 정권의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대표단이 연안의 모택동과 접촉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미국의 대중정책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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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틸웰의 해임과 일본의 패전

 

스틸웰은 자신이 원조 물자 및 중국 병력을 버마에 때려 부었던 것은 쏙 빼 놓은 채 중국 본토가 위험해진 것은 장개석의 무능 때문이라 주장하며 장제스로부터 중국군의 지휘권을 빼앗아 자신이 중국군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겠다고 나선다. 임팔 전투의 승리 직후 루즈벨트는 1944년 9월 16일 장개석에게 "스틸웰 장군은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당신네 군대를 지휘해야 합니다" 라는 최후 통첩을 보낸다.

 

장개석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고 스틸웰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중국군 지휘권을 내 주는 대신 스틸웰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지휘관으로 달라고 강하게 요청한다. 이에 루즈벨트는 장개석과 타협하여 1944년 10월 19일 스틸웰을 해임하고 "엘버트 웨드마이어"가 지휘관이 된다. 이후 두 달 뒤 버마 북부에서 일본군은 일소되었고 온화한 성격의 "웨드마이어"는 장개석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원조물자를 중국군에게 제대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타국 군대의 전작권을 미군이 가져간 사례가 대한민국이 최초가 아니었구나.

 

이에 1945년 3월 일본군은 충징을 향한 공세에 나섰지만 제대로 보급을 받은 중국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내세워 거세게 저항했고 일본군은 대 참패를 당한다. 이후 중일전쟁의 주도권은 역전되었고 중국군은 광시성을 탈환한 후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했지만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일 전쟁이 끝나게 된다. 스틸웰이 아니었다면 중일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스틸웰을 한직을 돌다가 1945년 6월 오키나와에 주둔한 10군 사령관을 맡게 되고 일본 본토 상륙 작전에 참여할 계획이었으나 역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개점휴업 상태가 된다. 이 후 스틸웰은 한반도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스틸웰의 한반도 상륙이 중국 컴백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장개석의 반대로 스틸웰은 계속 오키나와에 머물렀고 하지가 지휘하던 10군 산하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다. 장개석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미군정 사령관은 하지가 아닌 스틸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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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틸웰 캐릭터와 미국의 무능

 

이 후 스틸웰은 한직을 돌며 여생을 보내다가 1963년 위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버마에서 스틸웰이 장개석의 정예군을 버마 밀림에서 소모시키고 중국에 대한 보급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덕에 장개석은 중국 본토를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한 채 일본군에게 밀리게 된다. 백범일지에 일본군의 폭격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틸웰이 미군 공군력을 버마에 집중 시킨 탓이었다.

 

당시 중국은 동남아에서 식량을 의존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동남아를 접수하면서 중국은 식량난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국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보급을 해 주고 있었지만 그마나도 상당량의 보급품은 스틸웰이 먹었고 장개석은 제한된 보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보급을 담보로 장개석을 사사건건 제어했고 장개석은 본토에서 어려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을 살려 준 것은 미국이었다.

 

스틸웰의 무능은 개인적인 차원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국에는 스틸웰과 비슷한 세력이 상존하는 듯 하다. 중일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중국 측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려 줬지만 스틸웰은 조언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본군에게 덤볐다가 큰 코를 다쳤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군은 전투에서 압도적이었을지 몰라도 상부의 의사결정 과정에는 스틸웰과 비슷한 캐릭터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후세인의 이라크를 엎어 버릴 수는 있었지만 그 결과는 친 이란 세력인 시아파의 집권으로 이어 졌다. 애초에 미국은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으로 이란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서 이라크의 후세인을 지원했었다. 당연히 후세인의 이라크는 수니파가 주류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미국이 이라크를 뒤집어 엎고 반 후세인 세력과 손 잡다 보니 시아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라크에 시아파가 득세하면서 벌어진 일은 중동 지역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 확대였다.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이 식량과 무기를 어디에서 구했겠는가? 이란이 뒤에서 보급을 해 준 것이 거의 틀림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육로가 필요하다.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집권하면서 중동지역이 더 시끄러워 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그 뒷처리는 잼병이었다.

 

이라크 전쟁의 결과가 친이란 세력의 강화를 초래한 것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삽질로 나타난 것이 공산주의 중국의 탄생이었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 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미국의 삽질이 한 몫 했던 것은 분명하다.(국공내전의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ikipus :: 국공내전 그리고 한국전쟁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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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임팔작전은 희대의 뻘짓거리로 비웃음을 사는 대표적인 군사작전이고 특히 일본인들이 바보 같은 짓으로 꼽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덕에 중국군이 버마에 묶이면서 중국 남부를 일본군이 쓸어 버렸던 것을 보면 아주 뻘짓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스틸웰이 전권을 쥐고 있었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어쩌면 해 볼 만한 도박일 수도 있었다.

 

PS 2:

일본군이 임팔 작전 때문에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았다면 1943년 스틸웰의 침공에 전력을 다했을 것이고 스틸웰은 괴멸적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틸웰을 괴멸 시킨 후 임팔작전을 실행 했다면 어쩌면 세상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는 1944년의 임팔전투는 "무타구치 렌야"가 "조지프 스틸웰"을 살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